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65화 (65/150)

64화

나디아는 정말이지 울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있던 어머니를 발견한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부터 터뜨리고야 말았다. 어머니는 나디아가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살이 내려 초췌해진 얼굴과 잿빛에 가까운 안색?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했다. 어머니는 나디아를 발견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디아는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어머니!”

“나디아, 너 정말 나디아니……? 오, 신이시여. 이게 꿈은 아니겠지…?”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은 나디아의 가책을 부추겼다. 편지 몇 통을 보내놓고서 안심하시길 바랐던 스스로가 더없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눈물로 지새웠던 결혼식 전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어머니는 자신을 걱정하며 하염없이 우셨다. 그랬는데, 고작 편지로 안심하실 리가 없었는데.

“나디아 맞아요, 어머니. 저 맞아요….”

“네가 어떻게? 아니, 아니지. 얼굴 좀 보자, 내 딸. 내 딸….”

“흑, 흐윽, 흐으어엉….”

“내 딸, 예쁘고 불쌍한 내 딸….”

랭커스터 남작 부인이 손가락으로 나디아의 눈물 젖은 뺨을 더듬었다. 나디아는 흐엉, 허엉 우느라 눈을 뜨지도 못했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딸을 보는 남작 부인의 눈에도 물기가 스몄다. 남작 부인은 일리야와 달리 나디아의 상태를 점검해 볼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시집가기 전보다 윤기가 흐르는 피부나 머리칼 따위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랭커스터 남작 부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디아가 저를 보자마자 울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니, 불쌍하게도….”

“아니에요, 저 진짜 잘 지내고 있었어요….”

나디아는 우는 와중에도 루크의 변호를 잊지 않았다.

“다, 다 좋은, 좋은 사람, 사람들….”

“네 눈에야 누군들 좋지 않겠어….”

“진짜라니까요…. 어머니야말로 왜 이리 마르셔서는, 아프시면 말씀을 하시지, 속상하게 이게 뭐예요….”

“누가 누굴 걱정해….”

서로를 꼭 끌어안은 모녀를 보며 일리야도 붉어진 눈가를 문질렀다.

사실 랭커스터 남작 부인, 마리아는 제대로 먹지 않아 영양이 부족해졌을 뿐이었다. 딸을 사지에 몰아넣고서 뻔뻔하게 뭘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병은 아니었어도 내버려 두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이미 일리야와 재회하며 한 바탕 울어버린 탓에 코와 눈가가 빨개진 나디아가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했다.

‘이러면 안 돼.’

울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디아는 가족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스테이턴 공작은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며 영지의 모두가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분명 제 걱정으로 이리 마르셨을 어머니를 보니 더욱, 의연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면 울수록 어머니는 더 걱정하실 테고, 루크에 대한 오해를 풀 길도 요원해질 것이다. 나디아는 어머니의 품에서 얼굴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안나가 준비해 준 드레스를 펼쳐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어머니. 예쁘죠.”

“……그래, 정말 예쁘구나….”

드레스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마리아는 뜬금없이 제 드레스를 자랑하는 나디아를 의아하게 보았다.

“한 번 입을 때마다 손이 떨릴 지경인데, 이런 드레스가 한두 벌이 아니에요. 절 위해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주고, 또 시중은 얼마나 섬세하다고요. 사실 아직도 익숙해지지는 않아서 좀 부담스럽지만….”

“…….”

“자수를 놓고 싶다고 했더니 무얼 가져다준 줄 아세요? 세상에, 저는 처음에 그 천조각이 틀림없이 고급 손수건이라고 생각했어요. 향긋하고 부드럽고….”

마리아와 일리야는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어째서 이러나 했더니, 나디아는 제가 얼마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디아의 의도와 달리 눈물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웃고 있는 그녀는 도리어 가엾게만 보였다.

“자수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일리야가 지적했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그런, 무례한 남자와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할지….”

“루크는 무례하지 않아, 언니….”

“나디아, 변호해줄 필요 없어. 너도 보았잖아. 그 사람은 끝까지 한마디도 안 했어.”

“그건….”

나디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나디아가 보기에 루크는 말재주가 부족한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다고 해야 했다. 그는 당황했을 때에는 혀가 굳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건 결코 상대방을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매서운 외모 탓에 오해를 사기 쉬웠다.

첫날밤, 나디아가 겁을 먹고 기절할 때에도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는 불쾌해 그런 거라고 오해했지만 이제는 나디아도 루크를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분명 긴장한 거야.’

자신을 노려보는 일리야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던 게 틀림없었다. 나디아는 묵묵하게 돌아서던 루크의 뒷모습을 기억했다. 널찍한 어깨가 풀이 죽은 듯이 보였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

“……나쁜 뜻은 없었을 거야.”

결국은 짧고 모호한 변명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우리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해주는 말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나디아. 그래, 대귀족이시니 고작 남작 가문 따위가 눈에 들어오기야 하겠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를 그리 데려갔으면, 그동안 우리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해봤다면….”

말을 하던 일리야가 일순 입을 닫았다.

스테이턴 공작은 랭커스터 가문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신경을 써주어야 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보듯 내려다보았을 리가 없다. 흔한 인사말마저 하지 않은 채 성가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럴 것이다. 애초에 결혼이 이루어진 단계부터 랭커스터 가문에 대한 배려는 없었으니까.

일리야는 그 사실이 너무너무 화가 났지만, 동시에 스테이턴 공작에게 상식적인 배려를 기대할 수 없음을 새삼 상기했다.

“일리야, 그렇게 화내지 마라. 나디아가 놀라잖아.”

“하지만 어머니….”

“어쨌든 무사히 와 주었잖아. 지금은 그것만 기뻐하기도 벅차.”

나디아는 내심 안도했다. 조금 전까지 루크는 말재주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디아도 그 못지않게 말재주가 없었다. 화를 내는 일리야의 말을 끊고 루크를 변호할 재주가 없었다. 나디아는 평생 단 한 번도 말로 일리야를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차분해졌을 때 자세히 말해야겠다….’

이럴 때는 앤더슨이 너무나 필요했다. 격앙된 일리야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빠 앤더슨밖에 없었다. 나디아는 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한 번에 말하기로 했다. 앤더슨이라면 오해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차분하게 들어주리라.

“그런데 나디아, 얼굴이 너무 빨갛구나.”

“아, 우, 울어서 그래요. 울어서….”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니?”

“아니에요. 건강한데….”

긴 마차 여행으로 새벽까지 끙끙 앓았던 기억은 자연스럽게 지워버렸다. 단순히 피로가 누적되어 열이 오른 것뿐이었고, 지금은 깨끗하게 나았으니까. 배시시 웃는 나디아의 이마에 마리아가 손을 올렸다. 손바닥은 차가웠지만 여전히 부드러웠다. 나디아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피오나가 먹던 해열제가 남아있을 거예요. 가져올게요.”

“아냐, 아냐, 언니! 열은 다 내렸….”

헙. 나디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열이 올랐었구나?”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막내를 보았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소리가 날 것처럼 크게 굴렀다.

“잘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피곤해서 열이 올랐던 것뿐이에요.”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나디아가 우울하게 실토했다.

“열은 다 내렸고 건강해요. 아까 울었고, 또 좀 더워서 빨개진 거예요. 진짜로요….”

“더워 보이기는 하네. 아직 한겨울도 아닌데 털 목도리까지 두르고서.”

“안나가 잘 챙겨줘서요. 멋보다는 건강이라고.”

의식하니 더욱 얼굴이 홧홧해진 것만 같았다. 목을 감싼 털 목도리는 부드러웠지만 답답했고, 땀에 젖어 찝찝했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오면 풀어버리려 했었기에 나디아는 허둥거리며 목도리를 풀어냈다.

“…….”

“…….”

목도리를 풀어내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땀에 젖은 목이 잠깐 서늘했지만 이내 시원해졌다. 진작 풀어버릴 것을 그랬다. 그러게 아직 목도리까지 두를 날씨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스테이턴 영지는 수도보다 추워서 그런가, 옷감이 두꺼운 편…… 언니? 어머니?”

나디아가 의아한 눈으로 마리아와 일리야를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나디아, 너…….”

“네?”

왜 저러시지. 나디아는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사람 같았다.

“어머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다. 내 딸, 안아보자….”

“네…?”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나디아를 마리아가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깨를 떨며 울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 안아주면서도 당황스러운 눈길로 일리야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그러나 울고 있는 건 일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거의 오열하듯 울고 있었다.

“언니, 언니 왜 울어…. 우, 울지 마….”

“나디아, 이 미련한, 착해 빠지고 미련한….”

“응?”

“우리가 미안해, 미안해, 나디아….”

“으응? 아냐,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난 정말 행복하니까….”

나디아는 이번에야말로 힘을 주어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아예 통곡하기 시작했다. 서로 끌어안은 마리아와 나디아를 일리야가 부둥켜안았다.

행복, 결혼, 루크, 다정, 남편….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디아는 두 사람의 울음소리에 먹혀 들리지 않을 변명 대신 열심히 그들을 달래는 데 집중해야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