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웃으라고 했죠.”
“…….”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기라도 한 건지….”
마차에 오른 후로도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안나였다.
“말할 줄 모르세요?”
“…….”
“웃으라고 했지, 입 다물라고 했나요?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세요, 각하. 여전히 말을 할 줄 아신다면요.”
“……아니, 나는.”
“?됐어요. 말은 하실 줄 아네요. 어휴….”
겨우 입을 뗀 루크의 말을 자르고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마차의 작은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처음부터 루크 혓바닥이 멀쩡한 걸 확인하기만 할 셈이었다는 듯이.
루크는 조개처럼 입을 닫았고, 제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둘 사이에서 눈치를 살폈다. 그는 랭커스터 저택으로 올 때처럼 마부 옆자리에 타고 싶었으나, 루크에게 멱살이 잡혀 억지로 마차 안에 몸을 구겨 넣어야만 했다.
변명하자면 루크는 정말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노려보는 일리야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안나의 조언대로 ‘눈앞에 부인이 있다’고, 나디아가 있다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자신을 노려보는 나디아라니, 원망과 분노를 숨기지 않고 경계하는 나디아라니?
일리야는 나디아와 많이 닮지는 않았다.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자세히 얼굴을 뜯어보면 이목구비의 모양이 닮아 있었다. 가족이란 다 그런 것일까, 분위기는 달라도 코의 모양, 입매의 각도 같이 쏙 빼닮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나디아의 가족을 앞에 두고서 루크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자신을 원망하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그래,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이걸 어떻게 말해….’
그렇지 않아도 나디아와 결혼한 후 자신을 더 무시하게 된 안나 앞에서는 입이 비뚤어져도 고백할 수 없는 속내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끔찍한 트라우마도 있었다. 입을 열었다가 일리야가 기절이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문제는 긴장할수록 무서워지는 얼굴이었다.
루크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한 것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가 일리야를 위협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감정 없이 메마른 눈빛,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턱.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은 잘 다듬어졌기에 더욱 차가워 보였다. 고압적이고 오만한 귀족의 전형 그 자체였다.
그동안 겁을 먹은 적이 없다 보니, 그리고 대부분 수염에 가려져 있다 보니 알 수 없었던 문제다.
제이가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말했다.
“하지만 안나,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오히려 그분을 겁주지 않았을까요.”
웃기라도 했다면 분명 기절했을 거라고 제이는 확신했다.
“딱 봐도 무서워하시는 것 같던데….”
그 말대로였다. 안나는 짜증스러운 눈길로 제이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일리야는 제법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고, 똑 부러지게 말은 잘 했지만 겁을 먹은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맞잡은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녀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리야가 보기에 루크와 제이는 규격 외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너무 크니까.’
일리야는 나디아보다도 작았다. 안나는 일리야가 마치 털을 세운 작은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한들 그녀를 괴롭히는 결과가 될 것 같아,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는 루크를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루크가 잘했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아무 말도 못할 거면 웃기라도, 아니, 덜 무섭게 생기기라도 하든지…!’
면도만 하면 무얼 하나, 여전히 무섭고 위협적인데. 잘생기면 무얼 하냔 말인가. 어떤 면에서는 수염이 덥수룩했던 예전보다 더 안 좋았다. 기껏 잘생긴 얼굴을 되찾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의 호감을 사기는 어려웠다.
그건 외모에 달린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루크는 비사교적인 사람이었고, 어떤 의미로든 굳이 타인의 호감을 살 필요가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갑자기 친근감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해도 무리인 게 당연했다.
게다가 상대가 영 안 좋았다. 일리야는 겁을 먹었는데도 스테이턴 공작을 향한 원망을 숨기지 못했다.
제법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일리야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스테이턴 공작이 어디 보통 귀족인가. 청혼서를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을 만큼 ‘스테이턴’의 이름은 높고 고귀했다. 아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모두 잊어버리고 만 게 틀림없었다. 제 속내를 완전히 숨기기에는 어렸고, 그렇다고 대놓고 감정을 터뜨리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일리야는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나와 제이, 루크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체구가 작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디아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나디아에게 약한 건 루크만이 아니었다. 안나나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마차 한 대를 가득 채운 공물, 아니 선물은 보여주지도 못한 채? 공작 부인까지 빼앗겼다. 위협도 되지 않는, 작은 여인에게 쓸쓸하게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부인께서는 언제 돌아오실까요…?”
“…….”
“언제 돌아오겠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죠….”
제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크는 외면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그 부분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나디아가 돌아와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지.
*
저택은 변한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나디아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녀는 일리야의 뒤를 쫓아가며 바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꿈속에서 수없이 그렸던 집의 모습을 눈에 담기 바빴다. 많이 봐두고 싶었다. 벽 어디에 흠집이 났는지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지만 아직 한참 모자랐다.
일리야는 빠르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말도 없었다.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일리야의 손목을 쥐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서 눈을 마주쳤다. 루크를 돌려보낸 후로 시선을 피하던 일리야가 그제야 나디아를 똑바로 봐 주었다.
“일리야 언니…… 화났어?”
“……그럴 리가 있니, 내 동생.”
“하지만…… 화난 것 같아.”
나디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일리야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일리야는 조금 곤란해졌다. 제 화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피했는데, 나디아를 외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디아는 일리야의 기분이 안 좋은 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뜬금없이 끌어안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포옹은 그 어떤 말보다 효과적인 위로였다.
“아니야, 나디아. 그냥….”
“언니?”
“너무 반가워서. 너무 좋아서 그래….”
일리야는 스테이턴 공작을 기세 좋게 쫓아낸 직후 제 행동을 후회했다. 아니, 정확히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뒷일이 걱정스러웠다. 한순간 욱해서 저지르고 말았지만 일리야도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힘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디아가 야수 공작에게 억지로 시집가는 걸 무력하게 보고만 있어야 했다.
혹시 내가 무례하게 굴었다고 나디아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지? 남편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면….
“언니, 울지 마. 나 정말 괜찮아. 이거 봐, 응?”
“…그래, 좋아 보여. 다행히….”
겉으로는.
“그렇지? 다들 날 얼마나 잘 챙겨주는지 몰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정말 잘 지내고 있어.”
“?넌 왜 이렇게 착해 빠지기만 해서!”
일리야가 울컥 뱉었다. 배시시 웃는 나디아가 예뻤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힘에 굴복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가족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해주고 있다니. 어쩌면 이렇게 착하게만 자랐단 말인가?
이렇게나 착하기 때문에 나디아의 말만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는 거였다.
‘착한 내 동생….’
역시 나디아는 자신이 지켜줘야 했다. 일리야는 앤더슨의 계획을 다시금 떠올리며, 이참에 아예 이 나라를 떠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겉으로야 멀쩡해 보여도 그 차가운 눈빛을 가진 남자와 같이 사는 게 끔찍하지 않을 리 없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남자와 여리고 착해빠진 나디아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연애 소설을 읽으며 다년간 쌓아온 지식에 의하면, 신분이 높을수록 변태 성욕자가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비밀은 대개 무척 음험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자신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버지나 오빠도 너무 무르고 순하기만 한 사람들이다. 일리야는 제 가족들 중에는 자신이 가장 냉정한 이성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는 평소 차분하고 이성적인 편이었다.
나디아와 관계되지 않은 문제에 한해서는.
“어머니부터 뵈러 가자. 피오나는…. 피오나는 조지가 데리고 있어. 저녁에는 여기로 올 거고….”
조지는 일리야의 남편으로, 콜드웰 자작의 차남이었다. 일리야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성격인데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얼굴을 보았던 덕분에 낯을 가리는 나디아도 편하게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앤더슨 오빠도, 아버지도 밤에는 오실 거야.”
“어? 그럼 나 여기서 자?”
“뭐?”
“응?”
“그럼 네가 여기서 자야지, 어딜 가서 잔단 말이야?”
“으응? 아니, 이제 결혼했으니까….”
당연히 스테이턴 저택으로 돌아가야지, 라고 나디아가 덧붙였다.
“그 사람이 그러라고 했니? 이럴 줄 알았어, 결혼할 때는 인사를 나눌 시간조차 주지 않더니. 반년 만에 얼굴을 보여주면서 고작 하룻밤도 묵지 못하게….”
“아냐! 아냐, 언니! 그런 게?.”
“사람이 어쩌면 그럴 수 있어.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은 다 봐야 할 거 아니야.”
“그, 그렇지….”
“미리 연락을 주어서 시간을 맞추었다면 모를까, 갑작스럽게 찾아와 놓고는….”
“…으응, 그러네….”
미리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은 답장 없는 부모님이 걱정되어 서둘러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나디아는 루크를 변명해주려 입을 열었으나 힘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화를 내는 일리야는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하루도 묵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했다가는 루크가 세상에서 가장 몹쓸 악당이 되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연락을 넣어두면 괜찮겠지…?’
풀이 죽은 듯했던 루크가 걱정되었지만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나디아도 오랜만에 가족들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딱 하룻밤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