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63화 (63/150)

62화

“나디아!”

일리야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신음 같았다. 멀리, 아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나디아가 있었다. 허둥거리며 마차에서 뛰어내린 나디아가 자신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일리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달리고 있었다.

“언니!”

그건 나디아도 마찬가지였다. 마차가 랭커스터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나디아는 초조함과 그리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오는 내내 ‘어른스러워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고 되뇌던 다짐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장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마차 문을 열어준 제이가 당황스러운 듯 쳐다보았지만 나디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리운 얼굴만 보였다.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다리가 엉켜 비틀거리자 나디아를 뒤따라 내린 루크와 안나가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나디아는 잘만 뛰는데,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을 졸이게 된다.

나디아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 일리야에게 안겼다. 나디아가 일리야보다 컸기 때문에, 안겼다기보다 안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세상에, 나디아! 어쩜, 어쩌면….”

“언니, 언니…. 아, 정말 언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그리운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운 가족의 품이었다. 나디아에게 일리야는 언니보다 보호자이자 조언자에 가까웠다. 일리야는 딸처럼 나디아를 돌보아주었고, 든든하고 현명한 언니에게 나디아는 제 속내를 숨김없이 말하며 고민을 나누었다. 오빠 앤더슨도 마찬가지로 든든했지만 작고 하찮은 고민거리 하나까지 모두 공유하기는 어려웠다.

일리야는 잠깐 비틀거렸지만, 이내 나디아를 꼭 안아주었다.

‘어떡해,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디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야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와 달리 나디아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 어디 얼굴 좀 보자, 응? 내 동생, 얼굴 좀 보여줘….”

“으흑, 끅, 언, 언니이….”

꾹 눌러 참고 있던 나디아는 일리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얼굴을 더듬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은 전염되는 법이다. 잘 참고 있던 일리야의 눈도 촉촉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울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나디아를 보게 되었는데 눈물 따위로 시야가 흐려져서야 곤란했다.

나디아는 벌써 눈과 코가 새빨갰다. 랭커스터가 사랑하는 녹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그렁그렁하다. 일리야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세상에, 마른 것 좀…….”

응? 일리야의 눈동자가 바쁘게 흔들렸다.

“힘들었지, 얼굴이 핼… 쑥….”

“히끅, 흑, 흡….”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고 다정해서, 나디아는 본격적으로 울기 직전이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애를 쓰느라 나디아는 일리야가 말을 흐리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이게 아닌데…?’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방문 요청을 받고 일리야는 온갖 상상을 했다.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을 간 막내 나디아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낯설고 먼 공작령으로 끌려가 구박을 당하고, 고생을 하고……. 최악의 경우는 끔찍해 차마 구체적인 상상을 할 수 없었지만, 어떤 상상 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나디아는 살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낯빛이 밝고 윤기가 흘렀다. 생크림같이 흰 피부는 맑고 촉촉했으며, 긴 금발 끝까지 잘 관리되어 반짝거린다. 잘 먹고 잘 잔 게 분명해 보였다. 일리야는 나디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나디아는 짐승이 어리광을 부리듯 일리야의 손바닥에 기대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고생을 해 초췌해졌다’거나 ‘어쩌면 이렇게 말랐니’라고 말을 하기는 무리였다.

“……보, 보고 싶었어, 나디아….”

일리야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겨우 한 자락 진심을 꺼냈다.

“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그, 그래….”

비록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웃는 얼굴이 일리야의 기억과 똑같이 해맑았다. 일리야는 안심하는 한편, 사라질 뻔했던 경계를 되새겼다. 나디아의 어깨 너머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일행은 셋이었다. 키가 길쭉하게 큰 남자 둘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자 하나.

‘야수 공작은 어디에 있는 거지?’

일리야는 결혼식장에서 야수 공작을 보았다. 그는 흉흉한 소문과 다르지 않은, 말 그대로 야수 그 자체였다. 그 덥수룩한 수염과 살벌한 눈빛, 싸늘한 분위기라니…. 일리야는 결혼식 이후 몇 번이나 나디아가 야수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한 꿈을 꾸었다.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길 몇 번이던가.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아도 그때 보았던 야수는 없었다. 남자들은 언뜻 보건대 기사인 것 같았다. 일반인보다 머리 한두 개는 큰 것 같이 커다란 키와 건장한 체격만 보아도 그러했으나, 날붙이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나디아만 보내준 건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스테이턴 공작을 상대로 상식적인 판단은 통하지 않으므로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되지. 나디아는 속이 깊은 아이니까 우리가 걱정할까 봐 밝은 척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겉으로만 보아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스테이턴 공작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설령 나디아를 괴롭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도? 랭커스터 가문을 직접 방문하는데 남이 다 알 수 있을 흠을 남겨두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타인이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야만 할 테니까.

굶기거나 때리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우선 다행이었으나 고작 이런 것에 안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언니, 이쪽은 내 남편….”

나디아의 볼이 발그레 붉어졌다. 제 입으로 ‘남편’이라 소개하는 게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일리야는 눈을 크게 떴다. 나디아의 손이 향하는 방향에 서 있는 남자가 일리야를 보았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스테이턴 공작 각하셔.”

“뭐…?”

저 남자가? 야수 공작이 같이 오지 않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일리야가 입을 떡 벌렸다.

일리야는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인지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다소 흐리기는 해도 구분은 됐다.

남자는 객관적으로 따져보아도 무척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누가 보아도 일순 시선을 빼앗길 만큼은 됐다. 눈이 나쁜 일리야 마저 남자가 잘생겼다는 데에는 이견을 달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아예 다른 사람인데?’

그때 서늘한 눈동자가 일리야를 향했다. 일리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찢어버릴 듯 살벌하고 매서웠다. 비록 수염이 없어져 야수 같은 이미지는 사라졌지만 저 눈빛만은 일리야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역시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겉모습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지만, 저 살벌한 눈빛은 틀림없이 야수 공작이었다.

“이 분이 그….”

“응, 언니! 어머니는 어디에 계셔? 아버지는? 앤더슨 오빠도 부를 수 있을까?”

“어머니는….”

일리야가 주먹을 꽉 쥐었다.

“피오나는?”

“……나디아, 잠시만. 이분들께 인사 먼저 드려야지.”

“아.”

들떠서 마구 말을 쏟아내던 나디아가 무안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일리야는 제게 달라붙은 나디아를 밀어냈다. 나디아는 아쉬운 듯 일리야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러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라고 생각해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일리야는 몸가짐을 가다듬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나디아의 언니, 일리야 라나 콜드웰이라고 합니다. 멀리서 오신 분들을 더 성대하게 환영해야 하는데 저밖에 나오지 못한 걸 용서하세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니야, 언니. 나도 미리 연락하지 못한 걸….”

“그래도.”

차갑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나디아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일리야와 루크, 안나를 번갈아 보았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특히 딱딱하게 굳은 일리야의 표정은 나디아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끔은 짓궂게 놀리기도 하는 앤더슨과 달리 일리야는 언제나 다정하게 웃어주기만 했는데.

“죄송하지만 랭커스터는 귀한 분들을 대접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어머님께서 쓰러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뭐?! 왜, 왜 말 안 했어?”

“…몸이 약해지셨을 뿐이야. 특별히 다치거나 병에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리야는 제 손목을 붙잡아오는 나디아를 외면한 채 루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속이 부글거렸다. 겁이 많은 나디아와 달리 일리야는 비교적 강단이 있었다. 다른 경우라면 살벌한 남자의 눈빛 따위를 무서워했을지 모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리야의 머릿속에 있던 괴물, 야수와 달리 눈앞의 남자는 그래도 사람이었다.

눈빛이 좀 매서울 뿐인, 사람이었다. 그 차이가 일리야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다짜고짜 결투장 같은 청혼서를 보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여동생을 빼앗아 간 주제에, 겨우 찾아와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도리어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이 살벌한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기만 하다니. 그간 쌓인 불안과 그리움, 스테이턴 공작을 향한 분노는 공포를 잊게 했다.

스테이턴 공작은 제가 무엇을 빼앗아갔는지도 모르는 뻔뻔한 남자였다. 일리야는 이런 남자를 약해진 어머니 앞에 결코 세울 수 없었다.

일리야는 경계 어린 눈으로 루크와 제이, 안나를 차례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그대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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