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11. 그게 아닌데
‘우리집이다!’
멀리 랭커스터 저택이 보였다. 창밖으로 낯익은 풍경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디아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1분에 한 번은 창밖을 보았고, 너무 들여다보았다 싶었는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서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너무 들뜬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디아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은 속내를 투명하게 보여주지 않는,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눈을 꾹 감고 숫자를 셌다. 그러나 그녀는 다섯을 채 새기 전에 실눈을 뜨고 창밖을 흘긋거리고 말았다. 창밖으로 익숙한 거리가 보이면 저절로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꼭 소풍 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안나가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를 듣고서 나디아는 민망한 듯 볼을 붉혔지만, 금세 배시시 웃어버렸다. 나디아가 말했다.
“제가 너무 들떴죠?”
“아니에요. 그럴 만하죠. 얼마만이죠?”
“넉 달 반……. 다섯 달이 다 되어가네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라고 말하기에 다섯 달은 결코 짧지 않았으나, 너무 많은 일이 있어 돌이켜보면 찰나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환경, 장소, 사람들…. 배워야 할 것도 적지 않았다. 적응하는 데만도 하루가 모자랐으나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 웃으며 해낼 수 있었다.
나디아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 랭커스터 가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라 먼스트로드를 떠날 때만 해도 그런 비극이 없었다. 자신 하나가 희생하여 가족들이 무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이 한 몸 바치리라는 각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이 무서웠던 현실, 가늠할 수 없어 막막한 미래는 까마득한 절벽에 서 있는 듯했다.
‘널 지켜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마라, 나디아.’
랭커스터 남작은 참담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으로 겨우 눈을 가렸으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모습을 나디아는 보고 말았다. 그 심정을 어찌 모를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아버지는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 하셨지만, 나디아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랭커스터 가에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지위, 재물 따위가 아니라 더 소중하고 연약한 조카들이었다.
앤더슨은 일찌감치 결혼해 올해 11세가 되는 아들이 있었고, 일리야는 6세, 5세가 되는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랭커스터 남작은 오로지 나디아를 위해 죄 없는 아이들을 불행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디아도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녀 또한 아이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고 싶지 않았다.
답장이 없어 불안해진 것은 그런 이유였다. 다섯 달이 다 되도록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나디아는 어서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다. 고작 다섯 달이지만 태어나 단 한 번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부쩍 어른스러워진 모습을 칭찬받고 싶기도 했다.
“부모님도 보고 싶고 언니, 오빠도 보고 싶어요. 조카들도요. 많이 자랐겠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니까요.”
“제일 큰 조카가 올해 11세가 됐어요. 작년만 해도 요만했는데….”
남자아이라 그런지 키도 쑥쑥 자랐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지 나디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조카가 벌써 11세군요. 남매간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지요?”
“네, 그런 편이죠….”
“얼마나 사랑을 받았을까.”
질문처럼 말했으나 안나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디아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티가 났다. 소심하고 겁이 많았지만 나디아에게는 구김살이 없었다. 가지지 못해 비틀린 절망, 저보다 더 가진 자를 향한 악의가 없다. 소중하게 사랑하고 아끼며 지켜왔을 것이다.
‘쉽지 않았을 텐데.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에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라 먼스트로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켜주는 쪽도 쉽지 않았겠지만, 무엇보다 나디아에게 힘겨웠을 것 같다고 안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예쁘게 웃는 나디아를 상처입히고 싶은 사람이, 과연 없었을까. 안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저희 가족은 사이가 좋은 편이라서요. 제가 막내인데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다들 절 어린애 취급해요.”
고작 11세가 된 조카마저 어른들을 따라하듯 나디아를 못 미더워할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나디아는 불만스럽게 말하는 척했지만, 말하는 입술은 웃고 있었다.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게 즐겁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좋은 거였다. 가족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크….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나디아가 고개를 들어 루크를 보았다. 루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는데, 누군가 입을 막아 놓기라도 한 듯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디아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뭔가 불편한 거라도 있어요…?”
“흠, 크흠,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 걸요….”
혹시 랭커스터 가에 가는 게 불편한 걸까? 루크는 마치 낯선 무도회에 가야만 하는 나디아 자신 같았다.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루크도 자신처럼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는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디아가 상체를 당겨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루크. 우리 부모님은 다정한 분들이시고, 언니와 오빠도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
“오해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금방 알아줄 거예요. 루크가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걸….”
따지고 보면 오해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나디아의 말처럼 잘 풀린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루크는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나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길이 따가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랭커스터 가에 가지고 갈 선물을 살 때만 해도 이렇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긴장이 되지 않았다기보다 실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했다. 그러나 나디아와 함께 마차에 올라, 점점 랭커스터 저택과 가까워질수록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되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굳은 채 무릎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식은땀이 나고 입 안이 말랐다. 랭커스터 남작 부부를 만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시답잖은 말이라도 떠오르면 좋을 것을, 백지가 된 머리에는 고작해야 인사말밖에 떠다니지 않았다. 그나마도 말을 하다 혀를 씹는다는 멍청한 꼴을 보일 것 같았다.
최악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있다가 랭커스터 가를 겁먹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치겠군.’
나디아와 관련된 일에는 왜 이렇게 꼴사나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껏 루크는 평생 단 한 번도 겁을 먹고 물러나거나 도망친 적이 없었다. 누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한다고 하더라도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디아 앞에만 서면, 그녀와 관련된 모든 일에는 세상에 다시 없을 멍청이처럼 굴게 됐다.
‘눈앞에 부인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안나는 그렇게 말했다. 루크는 눈이 돌아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되뇌었다.
‘웃어야 한다. 웃어야 한다….’
안나는 출발하기 직전까지 신신당부를 했다. 들뜬 나디아의 기분을 망치지 말 것, 랭커스터 남작 부부를 보자마자 무릎부터 꿇을 것, 그리고 멍청해 보일지라도 웃으라고 말이다. 앞선 두 가지는 지키기 쉬울 것 같았지만 마지막이 문제였다.
웃으라니, 뭘 어떻게? 황제 앞에서도, 황태자 앞에서도 가식적으로 웃어본 적이 없는 루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야만 한다는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웃는 게 어떤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얼굴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무거웠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잠시 후 제이가 정중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제이도 마치 결전을 앞둔 전사마냥 비장한 얼굴이었다. 귓가에 전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하필 이럴 때….’
일리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스테이턴 공작가에서 방문 요청을 받은 것은 오늘 아침나절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인장과 심부름꾼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지만, 요청을 보낸 이는 틀림없는 스테이턴 공작이었다. 꽤 정중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연락에는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이 동행한다고 쓰여 있었다.
여동생의 이름 뒤에 랭커스터가 아닌 스테이턴이 쓰여 있어 낯설기 짝이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나디아가 수도에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남 앤더슨은 어젯밤 늦게 나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랭커스터 남작도 아침 일찍 일이 있다며 입궁했다.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디아가 보낸 편지를 받고 쓰러져 며칠 전에야 겨우 일어나신 참이었다. 혹시 나디아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습이라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실 게 틀림없었다.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랭커스터 저택에 머물고 있던 일리야는 혼자 나디아를 먼저 만난 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대문이 열리고 말 두 필이 이끄는 마차가 저택 입구를 향해 다가왔다. 일리야는 땀이 밴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비벼 닦고는 눈을 부릅떴다.
마부와 함께 기사가 내려 마차 문을 열었다. 이제 스테이턴 공작이 내릴 차례였다. 보통은 먼저 내려 부인을 에스코트해줄 것이다.
그러나 치맛자락이 먼저 보였다. 일리야는 입을 틀어막았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디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