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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61화 (61/150)

60화

등 뒤에서 날아온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마침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라 루크와 제이는 나란히 귀를 의심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나눈 그들은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못 들은 척을 하자는 것이다. 괜히 붙잡혔다가는 성가셔질 게 뻔했다. 그대로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다시 한번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제이드 앨런 경, 듣지 못하였나?”

“……앗, 태자 전하 아니십니까!”

“…여전히 연기에는 재능이 없군….”

레너드는 떨떠름한 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이는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눈치 빠른 레너드라면 ‘그 새끼’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도 남았다. 그 새끼니 저 새끼니 불경하게 부른 건 조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괜히 트집을 잡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몇 대 맞는 게 낫지, 레너드는 끈질기고 치졸하여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제이는 내심 긴장한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레너드는 그의 티 나는 인사를 지적할 뿐, 다른 기미는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부르셨지?’

레너드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어버렸으나 루크는 숨지도 않고 제이의 옆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레너드는 오로지 제이만을 불렀다. 제이가 의아해하는 사이 레너드가 좁은 복도를 지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이 하나에만 박혀 있었다.

“수도에 왔다는 보고는 들었지.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하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군.”

“하, 하하….”

“향수를 고르러 왔나? 그렇다면 추천해줄 만한 물건이 몇 가지 있는데.”

레너드는 이상할 정도로 제이에게만 말을 걸었다. 루크를 일부러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나 없는 사람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뜻하지 않게 발이 잡힌 제이는 어떻게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한편, 말 없는 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루크는 레너드가 자신을 무시해주기를 평생 바라왔다. 그는 만인에게 공평하게 치졸했으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그는 루크가 별다른 트집거리를 주지 않아도 언제나 그의 신경을 긁으며 괴롭혀왔다. 본인은 애정이라 부르는 괴롭힘에 루크는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나, 갑작스레 돌변한 까닭이 궁금했다.

“헌데 빈손으로 돌아가려고?”

“…시간이 없어서요. 저도 아쉽습니다.”

뻣뻣하게 굳은 뺨을 따라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제이는 불편한 기색을 예의 바르게 숨기지도 못했다. 레너드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눈치채고도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루크를 불러도 경은 오지 않아 섭섭했지. 이게 얼마만이지? 3년 만인가?”

“예…. 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얼굴을 맞댄 것은 3년 만이지만 들은 게 많아 그다지 오랜만이라는 체감은 들지 않았다. 루크는 수도에 가기 전후로 레너드 욕을 해댔고, 제이는 수석 보좌관이라는 이유로 그 욕을 모두 생생하게 들어야 했다. 제이는 새삼스럽게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레너드의 외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순금을 녹인 듯한 금발이 어깨 너머까지 길어진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수염은커녕 면도한 자국도 없는 깨끗한 피부 탓인지, 섬세한 이목구비는 우아하고 화려해 마치 인형 같았다.

‘웃으며 쫓아오는 저주 인형….’

레너드에 대한 제이의 가장 호의적인 감상이었다.

외형만 보아도 레너드와 루크는 정반대였다. 성격도 달랐으나 외모만큼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이는 요소도 없었다.

“헌데 경,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전하, 제가 지금 급한?.”

“왜? 바쁜가? 그럼 같이 갈까? 마침 오후 일정이 취소된 참,”

“아닙니다! 물어봐 주십시오!”

따라오겠다는 말처럼 끔찍한 소리가 없었다.

“루크의 신부 말인데.”

“…….”

“경이 보기에는 어떤 사람인가? 이번 수도 행은 신부 때문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자식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올 리가 없어.”

“…….”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참인가?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니까? 그 자식이 첫사랑에 빠진 애송이처럼 절절매던 게 재미있기는 했는데?.”

“전하.”

묵직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레너드는 제 머리보다 위에서 떨어진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었어도 이처럼 소름끼치지는 않았을 테다.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겠지? 레너드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루크와 제이가 했던 생각을 똑같이 하며, 레너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너드도 신장이 큰 편이다. 근육질은 아니지만 스스로 말하길, 보기 좋을 만큼 단련한 몸은 길쭉하고 탄탄했다. 실제로 180센티가 넘는 제이와 눈높이가 비슷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레너드가 아는 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 낮고 음산한 목소리와 저보다 높은 키의 주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없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험악한 인상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아닌가? 제이는 분명 혼자였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지만 흑곰 기사단일 게 분명한 커다란 기사가 한 명 있었을 뿐…….

“제 아내에 대해 쓸데없는 관심 거두어주십시오.”

“……?”

“?뭡니까.”

레너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면 떨어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포커페이스의 달인이라 불리는 그조차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듯 애타게 제이를 쳐다보았으나, 제이는 동정과 공감이 섞인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지. 다른 사람이고말고…….

“…루크?”

레너드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루크는 장난치지 말라는 듯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루크는 퍽 공손하게 말하였으나 어투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모드리야 제국의 황태자를 향해 감히 짜증을 숨기지 않는 작자는 대륙을 통틀어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뿐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는 분명 루크가 맞았다. 맞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인가……?”

“…면도 좀 했을 뿐입니다.”

“고작……?”

면도가 그렇게 위대한 행위였단 말인가? 단순히 인상이 변했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레너드는 눈을 부릅뜨고 루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어린 시절의 모습이 아주 약간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내리뜬 눈이 매우 오만하고 건방져 보였다. 겨울바람을 휘감고 있는 듯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히고 입을 고집스레 다물었다. 날렵한 콧대와 날카로운 눈매는 분명 기억에 있는 것이었으나,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하관을 덮었던 수염이 사라진 것만으로 이토록 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세상 남자들은 모두 수염을 밀어버려야 할 것이다.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입을 벌리고 있던 탓인지 마른 목구멍이 따가웠다.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 잠깐!”

“?하실 말씀이라도?”

“그….”

붙잡기는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많았지만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이 없었다. 그는 머리가 굵어지고 난 후 처음으로 뇌가 백지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말이 떠듬떠듬 흘러나왔다.

“그, 그… 자, 자네 부인….”

“제 가정사에 관심 꺼 달라고 방금 부탁드린 참입니다만.”

가정사…. 루크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단어가 술술 흘러나왔다. 레너드는 충격에 빠져 입만 벙긋거렸다. 루크는 대답 없이 입술을 바르르 떠는 레너드를 보다, 제이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며칠 내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럼.”

“……그러게…….”

레너드는 허망하게 루크를 보내야만 했다. 제이가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내며 루크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제이는 혼자 뒤돌아서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나마도 레너드는 인사를 받을 정신도 없었지만 말이다.

레너드는 마치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충격적인 무언가를 목도하기는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가 되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남은 것은 신경질적인 미남의….

그러니까 미남 말이다.

“말도 안 돼….”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그가 누구인가? 모드리야에 단 넷밖에 없는 공작이자 어린 나이에 작위를 이어 훌륭하게 영지를 다스리는 현명한 영주, 용맹한 기사이자? 야수가 아니었나.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은 이제 말로 꺼내기도 지겨울 지경이었다. 일각에서는 스테이턴 공작이 영지에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믿고 있었다. 이 모든 소문의 원흉은 모두,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외모 탓이었다.

얼굴의 반을 덮은 수염과 매서운 눈매, 차라리 흉기에 가까운 신체….

이 모든 것이 고작 면도만으로 저리 뒤바뀐다고?

레너드는 오늘 새벽 앤더슨과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 년에 두어 번밖에 교류하지 않았지만, 성격이 더러운 루크에게 저 말고 다른 친구가 없다고도 확신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들은 혈연으로도 얽혀 있는 친척 관계이기까지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레너드는 루크를 보아왔다.

또렷하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꽤 예쁘장했던 그 아이가 자랐다면 저 얼굴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이목구비를 뜯어보면 레너드 자신과도 닮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너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야? 저 새끼….”

저게 진짜 ‘그’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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