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나디아가 느긋한 오전을 보내며 외출을 준비하는 동안, 루크와 제이는 부지런하게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라 먼스트로드의 황궁 앞에 만들어진 상점가는 귀족을 비롯해 부를 쌓은 중산층이 주로 이용하는 거리였다.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세상 어디를 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 섞인 농담이 나돌 정도로 다루는 물건도 다양했다. 드레스 유행을 선도하는 최신 의상점부터 이국의 향신료나 장신구를 취급하는 잡화점, 숙녀용부터 신사용까지 진열된 구두 가게, 문을 열지 않아도 향긋한 향수 가게까지 있었다.
물론 정말 귀한 몸들께서 가게에 직접 행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최고로 꼽히는 상인들을 저택으로 불러 앉은 자리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다. 미천한 자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제 발로 돌아다니며 그들과 같은 물건을 보고 고른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모드리야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푸른 피, 스테이턴 공작이 직접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도 본래는 없어야 했다.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제이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루크의 뒤를 쫓아가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직접 움직이는 게 성미에 맞는 주군을 모시는 죄였다.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더는 짐 실을 공간도 없습니다.”
제이는 스테이턴 가문의 인장이 찍힌 마차를 응시했다. 선물로 꽉 차 사람이 탈 공간이 남지 않았다. 선물이 아니라 공물에 어울리는 양이었다. 루크가 제이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차는 돌려보내.”
“네? 마차만요?”
아직도 더 살 생각이란 말인가? 루크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더 살 생각이라는 소리였다.
“더 사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기 옷은 왜 사신 겁니까?”
“어린 조카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
왜 이 사람은 중간이 없는 걸까…. 아기 옷이 많아 봐야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드레스는 맞춤 제작을 해야 했기에 살 수 없었지만 보닛과 구두, 값비싼 보석 장신구나 희귀한 과일 같은 식료품, 거기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가죽 카펫과 사냥용품까지, 거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쓸어 담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라 먼스트로드의 상점가를 죄 털어버릴지도 몰랐다.
제이는 이건 아니라는 의견을 여러 번이나 냈지만 루크는 도통 들어먹지 않았다. 그는 어딘지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좌우를 보지 못하고 직진만 하는 멧돼지 같은 기세였다. 안나는 선물 공세를 해법으로 제시했고, 자고로 선물이란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일단 사두면 어디에 써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제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차는 돌려보내겠습니다. 어차피 사람이 탈 공간도 없고, 포장도 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저희도 이만 돌아가야 합니다. 정오가 다 됐어요.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부인께서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한 군데만 더.”
루크가 손으로 앞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그도 그곳이 무얼 파는 가게인지는 몰랐다. 그저 눈앞에 있으니 가리킨 것뿐이었다.
“한 군데만 더 가고 돌아가시는 겁니다….”
그러나 루크는 제이의 대답은 채 듣지도 않고 홀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차라리 새벽 훈련이 더 낫지….’
아니, 아니다. 제이는 곧장 제 생각을 철회했다. 루크와 함께라면 새벽 훈련이든 쇼핑이든 피곤한 건 매한가지였다. 귀 따갑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고, 수습은 모두 제 몫이라는 부분이 똑같았다. 제이는 지친 마부에게 약간의 팁을 주어 위로하고서 먼저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앨런 경.”
“하하….”
스테이턴 성에서 함께 올라온 마부는 동정 어린 눈길로 제이를 위로했다.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수도 라 먼스트로드.
제이는 마차 바퀴에 흙먼지가 엉키는 모습을 보다가 눈을 들었다.
루크는 라 먼스트로드에서는 코가 비틀어질 것같이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실제로는 흙먼지와 사람들의 체취, 이국적인 향신료의 강한 향이 뒤섞여 고약한 편에 가까웠다. 긴 역사를 지닌 만큼 건물들은 낡고 오래되었으며,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러웠다.
제이는 수도에 큰 유감은 없었으나, 평생 이곳에서 사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건 좋지만….’
루크가 진열된 상품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라 말하며 쓸어 담는 동안, 제이도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다. 스테이턴 영지는 부유하고 오가는 상인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라 먼스트로드만큼 다양한 상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설마 각하께서 향수 가게에 들어가는 날이 올 줄이야….”
감회가 새로웠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과 향수는 나란히 읊는 것마저 어색한 조합이었다. 루크는 덥수룩한 수염만큼이나 제 외모를 가꾸는 데 관심이 없었고, 특히 인위적인 향이 나는 건 질색했다. 짜증 나는 놈의 면상이 떠오른다나 뭐라나. 그런데 제 발로 향수 가게에 걸어 들어가다니. 고작 한 사람을 만난 것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제이는 루크와 달리 제 외모를 꾸미는 데 어느 정도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청결을 중요하게 여겼다. 보기만 해도 땀 냄새가 날 것 같은 게리 노스 같은 남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비누나 향수 같은 사치품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기왕 루크를 말릴 수 없다면 제 마음에 드는 상품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딸랑.
문을 밀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향긋한 공기가 훅 끼쳤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진한 향기에 코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후각도 짐승처럼 예민한 루크에게는 괴로운 공간일 텐데 용케 버티고 있구나 싶었다. 사랑이 위대하기는 했다. 본능으로만 살 것 같은 남자조차 상상할 수 없던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고작 반년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루크의 경우 변화보다는 변신에 가까웠지만.
‘어디 계시지?’
제이는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보다 내부는 넓은 편이었다. 주로 귀족을 상대하기 때문인지 꽤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으나, 제이에게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번잡하다는 인상이었다. 진열되어있는 작은 향수병은 분명 같은 부피의 금만큼 값이 나갈 테다.
일반인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이 좁은 가게에서 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자 소파에 구겨져 앉아 있는 루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이는 힘이 쭉 빠져 저도 모르게 낮은 숨을 뱉었다. 쇠 냄새가 날 것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술이 달린 쿠션과 우아하고 화려한 소파에 몸을 구긴 채 앉아 있는 광경은 지독하게도 이질적이라 차라리 우스꽝스러웠다.
“뭐하고 계십니까.”
“귀한 손님을 모시고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기다리고 계신 겁니까? 얌전히?”
그럼 뭐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루크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제이를 보았다. 제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루크가 부끄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야 난동을 피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돌아가시죠. 선물은 충분히 사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소파에서 일어나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루크의 외모는 세련되고 우아한 배경과도 이질감 없이 어울리는 편이었다.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것 같은 흰 피부와 날렵한 얼굴은 조금 나른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날카로운 인상이 누그러지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흘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조건일 뿐, 그의 내면을 아는 사람이 보면 참을 수 없는 이질감만 주었다.
“그러지. 나디아를 기다리게 할 수도 없으니.”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이는 박수라도 칠 기세로 환하게 웃었다. 루크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코를 찌르는 향기가 너무 강렬해 머리가 아팠다. 이런 걸 굳이 몸에 두르고 살다니, 그는 평생이 가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쾌해지려던 참이다. 그 새끼가 생각나서.”
“혹시 그 새끼가 저도 아는 새낍니까?”
“아마.”
루크는 비식 웃었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제국의 황태자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경하게 칭하는 제이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제이는 루크를 두고 불경하니, 담이 크니 지껄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제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누군지는 말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누가 뭐랬나?”
“아뇨, 예의라고는 모르는 불한당 보듯이 보시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제이가 평소 잔소리하듯 고지식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제 곁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루크는 세간의 평가처럼 비상식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 이외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목적을 위해 상식을 고려하지 않은 수단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윤리나 도리를 잊어서는 곤란했다. 제이와 안나, 그랜트는 루크가 지나치게 엇나가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역할의 문제다. 제이는 언제나 루크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으나 근본을 들여다보면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알고 보면 그 새끼도 근본은 다르지 않지.’
깃펜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 우아한 몸짓으로 깔끔을 떠는 꼴만 보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끈질기다는 점이.
“…제이드 앨런? 앨런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