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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59화 (59/150)

58화

‘망했다.’

앤더슨을 돌려보낸 뒤 레너드는 자신이 곤란한 입장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이제껏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이 어디까지나 남 일이기 때문이었다. 편지 한 장 보내는 데에야 그리 큰 수고가 들지도 않았다. 랭커스터 가문의 오해는 루크가 풀어야 할 숙제였을 뿐 레너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늘 밤까지는 그랬다.

‘랭커스터 가의 사람들은 전부 이런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거야…?’

레너드는 환히 웃으며 문밖으로 걸어나간 앤더슨이 최면술사나 사기꾼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단 한마디도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은 목구멍에 막힌 듯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저도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압니다, 전하….’

무리한 줄 알면 부탁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부탁드릴 분이 전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저희는 모두 버리고 도망갈 생각입니다. 나디아가 불행한데 저희가 어떻게, 뻔뻔하게 웃으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만약, 만약에… 나디아가 학, 하학, 학대라도? 받고 있는 게 밝혀진다면, 그때는.’

앤더슨은 툭 건드리면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잠깐이라도 좋습니다. 스테이턴 공작 각하의 관심을 잠깐이라도 끌어 주세요. 그 사이에 저희가 어떻게든 나디아를 데리고 멀리 도망치겠습니다.’

어디로 도망칠 것인지, 도망친 다음 어떻게 살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것 같았지만 의지만은 뚜렷했다. 앤더슨은 몇 번이나 ‘만약의 상황’일 뿐이라 강조했다. 레너드의 말처럼 루크가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면 소용없는 계획이라고 말이다.

제 입으로 루크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장담했던 레너드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하라 했던 것도 자신이었고, 앤더슨의 상상대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제 부인을 학대하는 최악의 쓰레기라면? 레너드도 마냥 손 놓고 방관할 수는 없었다.

이래 봬도 레너드는 협상의 귀재라는 평을 들었다. 타고난 포커페이스와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를 농락하며 원하는 바를 쏙쏙 얻어내 중요한 자리에서 활약한 경험도 많았다. 그러나 앤더슨을 상대로는 그의 장점을 아무것도 살릴 수가 없었다.

일단 말을 해야 거절을 하든 설득을 하든 할 수 있을 텐데, 혀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저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다 알고 수 쓰는 거 아냐, 이거?’

레너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결 좋은 금발을 마구 흩트렸다. 콩알만 한 양심은 작지만 힘이 셌다. 앤더슨에게는 다른 이에게 대하듯 냉랭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저 말을 꺼낸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고상하고 우아한 어휘로 비꼬아주었을 테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라냈겠지.

그게 레너드다운 처리였다.

“……괜찮겠지. 루크는 보기와 달리 신사니까….”

레너드는 빠르게 태도를 전환했다. 자신답지 않게 무리한 약속을 해주고 말았으나 그것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루크는 진심으로 랭커스터 가의 막내딸에게 반하여 청혼했다. 보는 이가 다 부끄러워질 첫사랑에 허덕거렸다. 고작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아서 쓰레기가 되었다면, 어울리지는 않아도 참견하여 앤더슨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학대 같은 건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의 약속은 지켜질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는 선행을 하는 셈이다.

“……괜찮은데?”

레너드는 빠르게 합리화를 마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앤더슨은 아직 실질적인 도움은 하나도 주지 않은 레너드에게 절절한 감사를 남겼다. 자신답지 않은 결정이 찝찝했으나 진심 어린 감사를 듣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다. 다소 민망하지만 흐뭇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얼른 오해를 풀어주게, 루크.’

오해만 풀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일어나지 않을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해주는 것으로 죄책감도 지우고, 감사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

나디아는 정오 무렵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사실 눈을 뜬 건 오전 8시 무렵이었다. 약에 취해 일찍 잠들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눈을 뜬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고도 한참을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나치다니까, 정말….’

그저 피로가 쌓여 열이 오른 것뿐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나디아가 중병에 걸린 환자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었다. 가족들의 과보호에 익숙해진 나디아마저 민망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호들갑을 떠는 건 루크만이 아니었다. 안나까지 덩달아 그녀를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나디아는 안나에게 약했다. 처음 스테이턴 성에 온 후 가장 눈치를 많이 살핀 사람이 바로 안나였다.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무표정과 정중한 태도, 단답으로 떨어지는 대답은 나디아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녀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첫인상이라는 건 강하게 남는 법이었다.

결국 침대에 앉아 안나가 가져다주는 아침 식사를 비우고, 차까지 마시고서야 겨우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걸 입으세요, 부인.”

“너무 두껍지 않을까요?”

“공기가 차가워요. 몸이 약해져 있으시니 더욱 조심하셔야 해요.”

“저 이제 정말 괜찮은데….”

“안 돼요. 방심이 화를 부른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인께서는 몸이 약하시니 조심하셔야지요.”

약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납득해줄까…. 나디아는 아득한 오해의 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 다 준비했을까? 돈도 많이 들었을 것 같아.’

나디아의 의복은 모두 안나가 준비해주고 있었다. 결혼할 때 챙겨온 드레스가 몇 벌 있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안나는 “시골에서 준비할 수 있는 드레스는 이런 것이 최선이라 수도의 유행에는 다소 뒤떨어질지 모른다.”라고 말했지만 나디아의 눈에는 그녀가 준비해 준 드레스 한 벌, 한 벌이 너무 대단해 심장이 떨릴 지경이었다.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지어진데다 우아한 레이스와 자수는 너무 아름다워 제 몸에 걸치는 게 송구하게 느껴졌다. 가격을 물어보고 싶다가도? 얼마인지 듣고 나면 더 부담스러워질 것 같아서 묻지 못했다.

게다가 안나가 챙겨 온 자신의 드레스가 대체 몇 벌인지…. 겨울용 숄과 케이프, 귀걸이나 목걸이는 몇 세트인지…….

나디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옷의 리본 끝을 당기자 매듭이 쉽게 풀렸다. 목을 감싸고 있던 깃이 열리며 긴 목과 우아한 쇄골이 드러났다. 얇은 천 한 장을 걷어냈을 뿐인데 서늘한 공기가 닿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녀는 얼른 무엇이라도 걸치려고 안나를 보았다.

그러나 안나는 어째서인지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나디아가 입어야 할 캐미솔은 안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왜 저렇게 보지?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나디아는 당황스러워서 눈을 깜박거렸다.

“저, 안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그건 뭔가요?”

“네?”

정말 뭐라도 묻었던 걸까? 나디아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침 식사를 할 때 샐러드 소스나 빵가루 같은 것이 묻었을지 모른다. 루크는 왜 말을 해주지 않았담? 거울이라도 볼 걸…. 나디아가 제 얼굴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하자 안나가 슬쩍 미간을 모았다.

“얼굴이 아니라 목에 있는….”

“목? 목에요? 뭘 흘린 건가? 안나, 떼어주시겠어요? 제 눈에는 안 보여서? 아니면 거울이라도.”

“……아닙니다, 부인.”

“예?”

안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아한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자 나디아는 괜히 위축되어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안나가 표정을 바꾸어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잘못 본 모양이에요.”

“네….”

나디아는 혹시 몰라 고개를 아래로 내려 제 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거울 없이 제 목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데까지는 묻은 것 없이 깨끗했다. 어쩐지 안나가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딱 자른 바에야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안나는 꼼꼼하게 나디아의 옷 시중을 들어주었다. 맵시를 살리고 숄을 둘렀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어 정돈해주고, 섬세하게 땋아 모양을 만들었다. 나디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곧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 얼마나 반가워하실까, 얼마나 놀라실까? 급히 오느라 미리 연락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만약 외출을 하셨더라도 저녁에는 돌아오실 테니 기쁘게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응? 안나? 목도리까지 둘러야 해요…?”

“……날이 추우니까요.”

“숄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 털목도리는,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멋보다는 건강이랍니다, 부인.”

짧은 털목도리가 나디아의 가느다란 목을 가렸다. 두꺼운 겨울용 드레스와 숄, 털목도리로 나디아의 몸은 완벽하게 가려지게 된 것이다. 살이 노출된 곳은 손과 얼굴 정도였다. 그나마 손도 장갑으로 가릴 테니, 딱 얼굴만 드러내는 셈이다.

‘갑갑한데….’

가을의 중턱을 넘어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아직 목도리까지 필요할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디아는 자신을 염려해주는 안나의 배려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풀어 버려야지.’

그땐 안나도 자신을 말릴 수 없을 테니까. 나디아는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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