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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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는 곧장 앤더슨에게 사람을 보냈다.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앤더슨의 간곡한 부탁을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밀 유지를 위해 정작 전달한 내용은 장소와 시간뿐이었지만 앤더슨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작위도 없는 남작의 아들이 황태자와 독대하기 위해 대체 얼마나 애를 썼을까. 앤더슨은 제 가진 인맥이며 수단을 모조리 동원했을 게 틀림없었다.
레너드가 즐기는 사적인 자리는 대개 ‘잘 노는’ 귀족 자제들이 만들었으며, 철저한 비밀 유지만큼 출입도 제한되어 있었다. 만약 레너드가 앤더슨과의 만남을 불쾌하게 여겨 그를 입장시킨 사람을 찾아내려 했다면 단순히 인맥을 잃는 것으로는 피해가 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더슨은 절실하게 매달려온 것이었다.
앤더슨에게 알려준 장소는 레너드가 루크와 종종 술을 마셨던 세이프 하우스였다.
루크가 올 때만 쓰고 있었으니 사실상 거의 쓸모가 없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몰래 만나기에는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레너드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세이프 하우스를 관리해주는 여주인은 차 끓이는 솜씨가 제법 좋았다.
본래 레너드는 늦은 시간에 차 따위를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말술인 루크조차 레너드의 주량에는 혀를 내둘렀다. 레너드는 웬만한 사람에게는 주량으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 앤더슨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앤더슨과 술잔을 나누다가는 다음 날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말만 전해주고 가는 거야, 말만.’
레너드는 앤더슨에게 스테이턴 공작을 수도로 불러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크는 제 편지 때문에 수도에 온 게 아니었으나 앤더슨에게 그 사정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앤더슨이 기다리던 대로 루크가 왔고, 나디아도 동행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어떤 여자였더라….’
베일 아래 가려진 얼굴은 우울했다. 모양 예쁜 입술에 색을 더해 활기를 불어넣었음에도 우는 듯이 보였다. 레너드는 긴장하여 뻣뻣하게 걸어가는 루크를 보며 (비)웃느라 신부의 얼굴은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다.
앤더슨이 존재를 알려준 콩알만 한 양심은 생각을 이어갈수록 그 크기를 키웠다.
레너드는 이기적인 사고를 주로 할 뿐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영특한 편이었다. 공감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앤더슨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입장과 감정을 곱씹어 볼수록 죄책감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초췌한 낯빛과 절박한 태도를 보면 랭커스터 가족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더욱 그랬다.
어울리지 않는 행동과 사고인 줄 알면서도 죄책감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조금 빠른, 그러나 일정한 소리였다. 레너드는 찻잔을 내려놓고 손님을 맞이했다.
앤더슨이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직전에 겨우 숨은 고른 것 같았지만 다급한 표정은 채 숨기지 못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것처럼 보여도 소매 끝이나 깃 부분은 허술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달려온 것이라는 증거였다. 앤더슨은 짧은 숨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전하, 부르셨, 지요.”
“일단 앉도록. 숨이나 좀 돌리고.”
“예….”
앤더슨은 레너드가 가리킨 자리에 앉으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레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앤더슨은 레너드의 주변에는 좀처럼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술기운 없이 보니 꽤 흥미로웠다.
권력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사람은 본래의 성품을 잃는다. 나쁘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힘을 손에 거머쥐기 위해서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어야 했다. 운 좋게 손에 쥔다고 끝이 아니었다. 권력이란 손에 넣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레너드의 주변에도 성품이 선한 사람은 있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가족이나 사랑, 우정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좀 더 대단한 이상이었다. 나라의 평화나 안전 같은 것이다.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이야 더러 있겠지만, 귀족 사회? 선만 잘 잡으면 어느 정도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기꺼이 내팽개치고 제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는 앤더슨이 희귀한 사람이라기보다 레너드의 신분 탓에 그가 접할 수 있는 인간 유형이 한정적인 탓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선 황제의 아들이자 다음 권좌를 약속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앤더슨은 여전히 초췌했지만 지난번보다는 상태가 괜찮았다. 레너드가 해준 약속이 희망이 된 듯 눈가도 붉지 않았다. 기대가 담긴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소식만 전해주는 걸로 괜찮은가…?’
뭔가 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레너드는 불편한 마음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늦은 시간인 줄은 알지만 빨리 전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예. 언제든 괜찮습니다. 혹시….”
“맞네, 스테이턴 공작이 오늘 수도에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하게.”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던 앤더슨이 사과를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너드는 비식 웃었다.
“사과할 건 없어. 나도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던 참이니.”
“예…? 하지만 스테이턴 공작께서 오셨다고….”
“시간을 따져보게. 내가 편지를 보낸 건 막 보름이 됐어. 편지를 받자마자 출발하지는 않았을 테니, 다른 이유로 온 거겠지.”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를 받을 일도 아닌데….”
레너드는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앤더슨을 불러 미리 알려준 것뿐이었다.
그러나 레너드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앤더슨은 스테이턴 공작이 수도에 왔다는 것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루크는 수도에 버젓이 스테이턴 저택을 두고도 이용한 적이 없었다. 워낙 오래 비워져 있어 그곳이 스테이턴 저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명 없다. 소문이 날 리가 없으니 먼저 찾아가지 않는 한 앤더슨이 알 길은 요원했다.
그렇다고 스테이턴 공작이 파티를 주최해 사람들을 초대하는 기적이 일어날 리도 없었다.
“나디아는, 아니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스테이턴 저택에 있을 거라네. 물론….”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
“기다리게!”
레너드가 당황하며 앤더슨을 붙잡았다. 앤더슨은 외모만 보면 침착하고 조용한 사람처럼 보였다. 외모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보기와 달리 저돌적이고 성격이 급한 게 분명했다. 당장 스테이턴 저택으로 뛰어갈 듯이 벌떡 일어날 줄은 몰랐던 레너드가 그가 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잊었나? 자정이 넘었네!”
“아….”
“당연히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해줄 테지만, 여동생을 생각해야지. 긴 여정에 지쳤을 테니 오늘 밤은 편히 쉬게 내버려두는 게 좋지 않겠나?”
“…그, 그렇겠네요….”
앤더슨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 감격, 걱정, 원망, 기대, 실망, 조급함…. 너무 많은 감정이 섞여 있어 얼굴 근육이 어찌할 줄 모르고 일그러졌다.
일단 앤더슨을 붙잡아 앉히기는 했지만 레너드도 남은 말이 없었다. 그가 전해줄 말은 이미 끝났다. 앤더슨이 눈치껏 일어나 돌아가 주면 좋으련만 그는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넋을 놓고 있었다. 레너드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산다는 거로군….’
수많은 죄를 지어놓고도 가책 한 줌 느낀 적이 없던 레너드로서는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꺼낼 수 있는 말을 고르며,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일방적인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레너드는 자신이 제3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 한마디를 거들었을 뿐,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이 일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없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라면 어찌할 생각인가?”
그래서 불편할 침묵을 깨뜨릴 질문을 이것으로 고른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 레너드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내심 웃었다. 그가 아는 루크라면 앤더슨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 리가 없었다. 아직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첫눈에 반한 여인과 만난 과정, 당황스러운 감정 따위를 설명하던 야수는 어설프고 풋풋했다.
‘이름을 말하는 데도 벌벌 떨던 게 웃겼지….’
덥수룩한 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짝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말할 때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라는 데 아끼는 만년필을 걸 수 있었다.
‘그’ 야수 공작이 연애에 이리도 숙맥일 줄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약점이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던 젊은 대귀족.
레너드는 생각지도 못한 루크의 어설픈 꼴이 매우 유쾌하고 만족스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루크와 레너드는 비슷한 입장으로, 끊임없이 비교의 대상이었다. 루크는 단 한 번도 레너드를 의식한 적이 없었으나 레너드는 달랐다.
친아들에게는 한 번도 후한 칭찬을 해준 적 없던 황제마저도 루크를 두고는 ‘젊은 나이에도 스테이턴의 이름을 훌륭하게 이었다’고 더러 칭찬을 했다. 그러니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작 연애 같은 것으로 열등감을 위로받으려는 제 모습이 비참하기는 하지만.
“…할 겁니다.”
씁쓸하게 웃던 레너드는 작은 목소리를 놓쳤다.
“뭐라고? 다시 말해주게.”
“?도망칠 겁니다.”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겠지…? 레너드가 제 귀를 의심하는 동안, 앤더슨은 결연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디아를 데리고 도망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