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디아가 훌쩍거리며 잠에 빠진 시각, 루크는 침실 옆방에 있었다.
“의사는?”
“기다려 주십쇼, 저도 수도는 오랜만이라….”
제아무리 능력 좋은 제이라고 하더라도 낯선 땅에서 실력 좋은 의사를 뚝딱 대령할 재주 같은 건 없었다. 오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밤 9시를 넘어가는 시각, 범법자가 아니라면 일찌감치 문을 닫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아무나 데려와 공작 부인의 진료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실력뿐만 아니라 입도 무거워야 했으므로, 까다로운 기준으로 선발해야 했다.
수도 행을 급하게 결정하지 않았다면 스테이턴 영지에서 의사를 수배해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두르는 바람에 의사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랄프 선생님은 고령이시라 장거리 여행이 무리였을 거고….’
랄프는 선대 공작의 주치의였다. 선대 공작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스테이턴 성에 머무르며 일했지만, 루크가 공작 위를 이어받은 후부터는 마을에 가서 작은 병원을 열었다. 이 성에는 상주 의사가 사치라고 말하며 나가버린 것이다.
루크와 제이는 물론, 흑곰 기사단도 말할 것 없이 지나치게 건강했다. 고용인들에게는 영주의 주치의보다는 마을 의사 쪽이 접근하기 쉬웠으므로, 랄프는 의사가 필요한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흑곰 기사단도 부상을 당하면 랄프의 병원을 찾았다. 큰일이 있을 때는 호출할 수 있었으므로 지금까지는 곤란한 일이 없었다.
나디아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행히 안나와 그랜트가 약초에 꽤 조예가 깊었다. 지금까지는 안나가 준비한 비상약과 적절한 처방으로도 충분했지만, 언제까지 임시방편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의사를 구해야 했다.
“부인께서는 단순히 멀미가 심해지셨을 뿐이에요. 과로가 겹쳐 열이 오른 것이니 의사까지는 필요하지 않아요.”
안나가 말했다.
“랄프가 오더라도 이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누가 오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루크도 안나의 판단을 믿었다. 그 또한 랄프의 진료보다 안나의 약을 타 먹은 날이 많을 정도로 그녀의 실력을 몸소 체험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의사는 필요하다. 나디아는 우리와 달라.”
“날이 밝는 대로 수배하겠습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이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안나를 흘긋거렸다. 명령을 받았으니 물러날 타이밍인데, 안나는 할 말이 남은 듯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제이는 먼저 물러나기로 했다.
제이가 나간 후 루크는 안나를 응시했다.
스테이턴 성의 시녀장으로는 안나 브로이어 말고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사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적당한 혼처를 잡아 수도에서 살 수도 있었다. 주름이 진 이목구비는 깊은 세월의 흐름에도 고상하고 우아해 잘 차려입기만 하면 여느 귀부인이라고 하여도 믿을 법했다. 그러나 루크는 저 고상한 외모 아래 숨겨진 매서운 독설과 강단,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안나가 스테이턴 성에서 일하게 되었을 무렵의 나이가 딱 지금의 나디아의 나이였다. 스물셋, 고향을 떠나 먼 시골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가 쉬웠을 리 없다. 어쩌면 안나가 나디아에게 마음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나디아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잡념은 자연스럽게 나디아에게 흘렀다. 안나가 헛기침으로 루크의 주의를 끌었다.
“우선 칭찬부터 해드리지요.”
“…뭘.”
“때와 장소를 가리신 행동을요.”
“…….”
“가릴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지만요.”
말에 가시가 콕콕 박혀 있었다. 루크는 변명도 못 하고 눈을 피했다. 안나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들은 후 루크는 나디아에게 손을 대지 않으려고 지극히 노력했다. 단둘이 마차에 있을 때에는 키스 이상을 하지 않았고, 그러다 참기 힘들어질 것 같으면 갖은 핑계를 대어가며 일어났다. 말을 타고 찬바람을 쐬다보면 흥분한 몸은 적당히 가라앉았다.
대놓고 피하면 나디아가 섭섭하게 느끼거나 상처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녀를 아주 멀리할 수도 없었다. 당연하게 기대어오는 나디아를 밀어낼 재주 같은 건 없었고, 끌어안아 키스를 나누다 보면 손이 저절로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안나가 방해를 해 주었다.
잘 참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그러나 나디아가 희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본 후 루크는 죽을 것처럼 후회하고 있었다.
삽입만 안 한다고 다가 아니지 않나. 밖에서 그녀를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됐던 것이다.
루크는 나디아가 특히 연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주변의 사람들-제이, 흑곰 기사단 등-이 지나치게 건강하고 튼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간 표준을 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안나, 그랜트 외에도 성에서 일하는 시녀, 하녀, 시종, 하인까지…. 루크의 주변에도 ‘평범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비록 나디아에 한해 기능이 이상해진 눈알이지만, 그럼에도 나디아가 그들보다 특별히 연약해 보이지는 않다는 걸 알 수는 있었다.
보름의 여정은 누구에게든 피로하고 힘든 일이고, 무리하면 여독이 쌓여 앓게 된다. 안나와 제이의 말처럼 의사의 진료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알지만 나디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나디아가 더 피로할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가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무리하게 만든 바람에 나디아가 결국 앓게 된 것 같아서 루크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안나의 말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발딱발딱 서는 아랫도리를 잘라내고 싶었다.
열이 올라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나디아를 보고도 꿈틀거리려는 기미가 보여, 그는 스스로에게 질려버렸다. 나디아를 만난 후 제 손으로 아랫도리를 잘라버릴 뻔한 적은 수도 없었지만 이번처럼 죄책감에 절어 고려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해서 죄책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 아랫도리가 나디아에 비해서는 너무 큰 것 같아 좀 잘라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 참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토막이 나면 나디아에게도 무리가 가지 않을지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시고요.”
“……별생각 안 했다.”
“상담 상대로 절 선택하신 것도 칭찬해드리지요. 제이는 유능하고 영특하지만 수도의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서투르지요. 저도 수도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만, 제이보다는 낫겠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나.”
루크는 진지한 태도로 상담에 임했다. 이 상황은 나디아를 성에 데려와 놓고도 만나러 가지 못한 채 한 달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내 버린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만 하죠.”
“…이건 전쟁이 아닌데.”
“전시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녀장이 나설 때가 아니지 않나. 상식적인 의문이 잠시 솟았지만 루크는 이내 무시했다. 지금이 전시라면 안나는 사령관이다.
“우리에게는 정보가 없습니다. 랭커스터 남작 가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기는 한데.”
루크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레너드라면 알고 있을 거다.”
“……그분은 잠시 미뤄두죠.”
“그 외에는 몰라.”
안나는 잠시 침묵했다. 레너드가 끈질기게 그를 불러댄 덕에 루크는 일 년에 두어 번은 수도를 방문했다. 비록 비공식적인 방문이었다고 해도, 술자리도 몇 번이나 있었을 텐데 레너드 외에는 아는 사람조차 변변하게 없다는 사실이 매우 처참했다. 사교성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사람이었다.
“부인께서는 당장이라도 부모님을 만나 뵈러 가고 싶으실 테고….”
“…그렇겠지.”
“……다른 방법이 없군요. 선물을 준비하죠.”
“…….”
루크는 매우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안나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방법이, 제이에게 상담했을 때 가장 먼저 나왔던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스테이턴 성의 사람들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고 랭커스터 남작 부부를 뵙자마자 무릎부터 꿇으시는 겁니다.”
“그거면 되나?”
“몰랐다는 변명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부인의 부모님이시라면 틀림없이 진심을 알아주실 거예요.”
“……그렇다면 좋으련만.”
루크는 보기 드물게 의기소침했다. 안나는 축 처진 루크의 어깨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죄인이 되었지만 그의 가장 큰 죄목은 ‘멍청했다’는 거였다. 레너드에게 멍청하게 속아 무식하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가장 큰 피해자인 나디아와 랭커스터 가문을 앞에 두고 그따위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각하에 대한 소문을 바로잡아야 해요.”
“…그게 가능은 한가?”
“힘들겠지만, 손을 써 봐야죠. 제가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부인이 계십니다. 듣기로는 사교계에서도 꽤 영향력이 있으시다 합니다만…. 그분께 연락을 드려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에게 직접 실체를 보여주는 거예요.”
루크는 침음을 삼키며 이마를 문질렀다. 무도회니 뭐니,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지만? 나디아를 위해서라면 그깟 것쯤은 몇백 번이라도 해낼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안나가 어디 가냐는 듯 눈썹을 들었다. 루크가 말했다.
“얘기는 끝난 거 아닌가?”
“끝나긴 했죠. 어디 가십니까? 부인께서는 아프시니, 괜히 귀찮게 굴지 마시고 다른 침실을 쓰세요.”
“귀찮게 굴 생각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잘라내고 싶은 판에…. 루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디아가 잠에서 깨었을 때 낯선 곳에서 혼자 눈을 뜨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겁이 많으니까, 분명 무서워할 것이다. 가만히 지켜보다 눈을 뜨면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잠은 잘 수 없겠지만, 그녀를 따로 두고는 어차피 잠들 수 없을 게 뻔했다.
“……이만 물러가.”
안나가 불만스럽게 쳐다보았으나 루크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