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55화 (55/150)

54화

10. 누구냐 넌

보름 후.

“스테이턴 공작이……?”

레너드는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확인을 해 보아도 그의 귀는 잘못되지 않았다. 성문 경비대에서 올라온 보고를 그대로 읊어준 근위대원이 긴장한 낯으로 다시 보고했다.

“옙, 오후 8시경 성문을 통과하였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군.”

편지를 보낸 후로 고작 보름 남짓이 흘렀다. 그전에도 종종 장난스러운 편지를 보냈지만 루크가 고작 그딴 시비에 낚여 수도에 오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레너드가 랭커스터 가문과 앤더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마지막 편지로도 그가 움직여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고작 소문 따위에 신경을 쓸 위인이던가? 누군가 시비를 걸면 갚아주고, 덤비면 때려눕히며, 칼을 들면 짓밟아놓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쯤이야 그의 의식 끄트머리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럼 왜 왔지?’

스테이턴 영지에서 수도까지는 무려 보름이 걸린다. 그나마 길이 닦여 있기 때문에 빨리 올 수 있는 것이었다. 편지가 제아무리 빠르게 날아가도 하루 만에 도착했을 리가 없고, 설령 도착했다고 한들 편지를 받자마자 곧장 출발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정말 내가 전에 보낸 편지를 보고 온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쁘지는 않았다. 기쁘다기보다, 좀, 찝찝한 기분에 가까웠다. 레너드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디로 갔지? 또 스테이턴 공작과 그 측근 두셋만 온 건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마차 3대와 흑곰 기사단원 20명이 동행하였습니다.”

“마차가 3대?”

“예, 그리고 흑곰 기사단원….”

“그놈, 그자들은 됐고.”

레너드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흑곰 기사단에 매우 큰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번에는 일행이 많으니 스테이턴 저택에 묵겠군?”

“예.”

“이쪽으로는 언제 온다고 하던가?”

“그게….”

곧바로 돌아와야 할 대답이 늦어지자 레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대귀족은 수도를 여행하듯 방문하지 않는다. 용건이 무엇이든 입궁하여 황제에게 얼굴을 비추고 인사를 해야 했다. 대귀족의 이름 아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중소귀족이라면 수도에 오든 귀향을 하든 굳이 알릴 필요가 없겠지만, 스테이턴 공작쯤 되면 이야기가 달랐다.

게다가 20명이라고 해도 기사단까지 데리고 나타났다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비틀린 망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고작 20명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이냐 말하는 자식들도 분명 있겠지.’

정말이지 뭘 모르는 소리다. 흑곰 기사단은 전원이 괴물이었다. 그 주인처럼.

“대답을, 듣지 못하였습….”

“뭐?!”

“그, 그게, 각하께서는, 그….”

근위대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어물거렸다. 아마 황태자 앞에서 꺼낼 수 있는 가장 온건한 단어를 고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속사정을 대강 알 만해서, 레너드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할 일을 마치면 연락을 하시겠다고….”

“…….”

“그, 크흠….”

아마 저 말도 우아하고 교양 있는 단어로 전달되지는 않았으리라. 레너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새삼스럽지도 않군.’

이상한 소식 가운데 이것 하나만이 익숙했다. 루크는 그 신분을 가지고도 측근 두어 명만 데리고 수도를 오갔으며, 꼭 필요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레너드의 아버지, 모드리야의 황제는 “스테이턴 공작은 그 정도가 딱 좋다. 거리감도, 태도도.”라고 말하며 내버려 두었다.

따라서 언제나 루크를 찾아가 술자리를 만드는 것은 레너드의 몫이었다. 그가 시비를 걸러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제껏 얼굴 볼 일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루크는 수도에 오더라도 스테이턴 저택에 묵는 법이 없었다. 적당한 숙박업소를 잡거나, 때때로 근위대의 숙소에 쳐들어가 묵기도 했다. 차라리 근위대의 숙소에 묵는 게 낫긴 했다. 잡으러 멀리 갈 필요가 없어 수고가 줄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묵는 숙소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야수같이 커다랗고 험상궂은 남자가 어슬렁거리는데,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괜찮은 술을 몇 병 들고서 저택으로 쳐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레너드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사와 신뢰가 넘쳐 흐르는 녹색 눈동자….

초췌한 안색과 간절한 눈빛이 마치 작은 동물 같아 죄책감을 절로 자극하던 남자.

“…….”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의 얼굴이었다.

‘마차가 3대…. 혹시 부인도 데리고 온 건가?’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저 많은 인원을 끌고 마차까지 가져올 필요가 없었겠지…. 레너드는 자문자답을 이어가며 이마를 문질렀다.

일단 연락을 넣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

보름간의 마차 여행은 과연 나디아에게 무리였다.

나디아는 결코 체력이 약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친구들에 비하면야 오히려 아주 건강한 축에 속했다. 보기 좋은 옷맵시를 위해 식사를 거르기도 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디아는 웬만하면 세 끼를 꼬박 챙겨 먹었다. 조카들과 함께 달콤한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으므로 연약하다는 수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해 바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운동량도 꽤 많은 편이다. 그녀의 혈색 좋은 뺨은 이런 생활 습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디아에게도 보름간의 마차 생활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좁은 마차에 갇혀 종일 흔들리는 생활은 활동적인 나디아에게 독이었다. 갑갑할 뿐만 아니라 소화도 되지 않았고, 흔들리는 통에 속이 뒤집어졌다. 무얼 먹어도 속이 뒤집어지니 뭘 더 먹기도 힘들었다. 먹지 않으면 더 기운이 빠지는, 악순환이었다.

루크와 안나는 나디아의 컨디션을 살피며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나 나디아는 그들이 자신에게 신경을 쓴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제 컨디션을 티 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루크가 바쁘다는 건 나디아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수도 행을 결정해주었으니,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폐는 끼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폐 끼치기 싫었는데….’

자신이 아니었다면 일행은 조금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디아는 열이 오른 채 힘겹게 의식을 이었다. 흐릿한 시야가 또렷해졌다 다시 흐려졌다. 속이 메슥거려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틀 전까지는 제법 잘 숨겼다. 어떻게든 식사를 씹어 삼켰고, 속이 울렁거려도 잘 참아냈다. 루크와 함께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으므로 표정을 꾸며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틀 전부터는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나디아의 의지로는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얗게 질린 안색은 가면이라도 쓰지 않는 한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떠는 나디아를 발견하고서 루크가 얼마나 희게 질렸는지, 나디아는 제가 아니라 그가 아픈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뒤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긴장하고 있던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까지 올랐다.

고작 보름간의 마차 여행을 버티지 못하고 두 번이나 앓아누운 꼴이 된 것이다. 긴 마차 여행을 할 때 피로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것을 숨기려 혼자 꾸역꾸역 참지 않았다면 열까지 오르지는 않을 수 있었다. 나디아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또 오해를 사버린 것 같아….’

나디아는 신음을 삼키며 무거운 팔로 눈가를 가렸다. 팔이 쇳덩이라도 된 것처럼 무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루크는 나디아를 연약한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세상 누구라도 연약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으나, 문제는 안나를 비롯해 제이, 흑곰 기사단까지 전부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디아는 저보다 가느다란 안나에게 연약한 사람 취급을 받기는 싫었다. 민망했다.

이번에는 제 발등을 찧은 셈이었다.

나디아는 연약하기는커녕 씩씩했고, 친구들에 비하면 살집이 붙은 편이었으며, 루크가 종종 칭찬하는 것처럼 그다지 착하지도 않았다. 낯가림이 심해 사교성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고, 말재주도 뛰어나지 않았다. 특별한 재주도 없다.

사실 자신은, 루크가 황홀하게 바라볼 만한 사람이 아닌데.

이런 걸 전부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루크가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결국 입을 다물고 마는 자신이 더 싫었다.

‘모르겠다….’

열이 오른 머리를 탓하기에는, 멀쩡할 때에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나디아는 달뜬 숨을 뱉으며 다시 눈을 떴다. 팔로 눈가를 꾹꾹 눌러준 덕분인지 아까보다는 시야가 또렷하게 잡혔다.

‘여긴… 어디지….’

아마 스테이턴 저택인 것 같았다. 푹신한 침대와 베개가 편안하게 몸을 끌어당겼다. 나디아는 자꾸 끊어지는 생각을 억지로 이어가려 노력하다 몸을 웅크렸다.

부모님을 만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시라, 잘 지내고 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아 불안했다. 아프기 때문인지 자꾸만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 흘렀다. 울고 계시지는 않을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지….

“……엄마….”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쓸쓸하게 그녀의 귀로 돌아왔다. 나디아는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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