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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54화 (54/150)

53화

나디아의 머리가 루크의 팔에 닿았다. 루크는 숨을 고르며 나디아의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디아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잔머리가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다.

‘무리를 시켰어….’

나디아에게는 견디기 힘든 자극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꽉 잡고 있던 팔뚝 부근의 옷자락이 구겨진 만큼, 기절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내 걱정했던 대로 끝내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루크는 미안한 한편으로,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나디아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이 사랑스러운 감정을 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세상에 대고 외쳐도 부족했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감정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좋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말해도 모자라다. 나디아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애써 참고 있지만.

“미안하오.”

“……으응…….”

잠결에도 대답을 해주려는 듯 작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루크는 비식 웃고는 몸을 떼었다. 축축하게 젖은 허벅지와 얼룩진 치맛자락, 땀에 젖은 머리카락까지? 삽입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을 행색이었다.

루크는 자신이 발정난 짐승 같았다.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삽입을 참았을 뿐 결과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나디아는 신음을 참았지만, 이 꼴로 나섰다가는 누구나 마차 안에서 일어난 행위를 눈치챌 것이다.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져 정리해주었지만, 끈기 있는 체액으로 젖은 속옷을 다시 입힐 수는 없었다. 얼룩진 드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정액과 체액 냄새가 풍기는 마차 안 공기도….

결국 루크는 나디아의 드레스 자락을 내려 정리하고, 그녀를 눕혔다. 그리고 마차 커튼과 창을 살짝 열어 말했다.

“마차를 세워라.”

나디아가 깨지 않게 작게 말했으나 다행히 제대로 전달이 된 것 같았다. 마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추어섰다. 루크는 제 겉옷을 벗어 마차 안을 가리며, 밖으로 나갔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마차의 뒤에서 따라오던 제이가 급히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루크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각하?”

갑자기 윗사람의 의심 섞인 눈초리를 받게 된 제이가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루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 주변을 호위하던 기사들 또한 갑자기 마차를 세운 그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할 뿐, 다른 기미는 없었다.

흑곰 기사단은 자신들의 단장을 닮아 대체로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개중 눈치가 빠른 자들이 있어도, 루크는 자신의 걱정처럼 마차 안에서의 행위를 의심받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흑곰 기사단을 비롯해 그의 부하들은 모두,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그런’ 쪽으로 능숙한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야수였던 남자가 냉랭한 미남자로 탈바꿈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루크는 기사단의 한 점 의심 없는 눈초리의 이유도 모르는 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그들이 눈치를 챘다면 나디아는 부끄러워 죽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기절해서는 눈도 뜨지 않을지 모르고,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든 파렴치한과는 살아주지 않겠다고 가버릴지도 모른다….

루크가 말했다.

“안나는 어디 있지?”

“후방 마차에 타고 있습니다. 불러올까요?”

“…그래.”

“공작 부인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혹 마차 여행이 버거워 컨디션이 나빠지셨다거나, 멀미라도….”

제이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나디아가 결혼식을 올린 직후 보름간 마차 여행을 하고, 며칠이나 앓아누웠다는 것을 기억해낸 탓이었다. 루크는 아프지는 않다고 대답하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컨디션이 안 좋다더군.”

“세상에! 안나를 불러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까운 마을로 사람을 보내 의사를 데려올까요? 아니면….”

“단순히 멀미일 뿐이라고 했다.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안나를 불러와.”

“……? 네, 알겠습니다….”

제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크가 누구인가? 나디아의 일이라면 바늘에 손가락 끝을 찔리기만 해도 죽을병에 걸린 듯이 다루던 남자가 아니었나. 나디아가 괜찮다고 말했어도 당장 뛰어가서 의사를 데려오거나, 오지 않겠다면 납치라도 해 오라고 말할 사람이었다.

제이가 머뭇거리자 루크가 눈을 부라렸다.

“뭘 봐?”

“…아닙니다….”

왜 소리를 치지 않지?! 제이의 의문이 증폭되었다. 일부러 성질을 긁듯이 눈앞에서 늑장을 부렸는데도 루크는 호통을 치지도, 엉덩이를 걷어차지도 않았다. 위협적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수염으로 덮였을 때와는 궤가 다르지만 여전히 무서웠으므로 익숙하지 않았다면 얼어붙었겠으나, 제이는 좋든 싫든 루크가 익숙했기에 겁을 먹지는 않았다.

‘기분이 좋으신 건가? 아니면 나쁘신 건가? 뭐지…?’

좋아 죽는 부인과 붙어있다가 나온 참이니 기분이 나쁠 리는 없을 것 같다가도, 부인의 컨디션이 안 좋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도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제이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공작이자 기사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몰라도, 유부남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낯설기만 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더 이상 어물거렸다가는 정말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았기에 제이는 후방의 마차로 향했다. 루크가 마차를 세운 탓에 일행 전부가 멈추어 있었다.

후방 마차에는 안나를 비롯해 그녀의 손발 같은 시녀 셋이 더 타고 있었다. 제이는 정중하게 노크를 한 후 말했다.

“안나,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각하께서?”

안나가 대답하며 마차 문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멈추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했어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공작 부인께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요? 그럼 당장 의사를 불러야지….”

“저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 정도는 아니다…….”

안나 또한 심각한 낯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들이 아는 루크가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안나는 서둘러 외투를 여미고 마차에서 내렸다.

루크는 마차 밖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는 루크를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제이를 돌아보았다.

“안나?”

“…제이, 사람들을 물리세요.”

“네?!”

제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어도 각하 주위에 사람을 두지 말라는 말이에요.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괜히 불똥이 튀고 싶지 않으면 잠깐 흩어져서 오줌이라도 누고 와요.”

“안나! 오줌이라뇨!”

“뭘 그리 부끄러워해요? 제이 당신도 어렸을 때는-.”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제발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제이가 몸서리를 치며 소리쳤다. 제이가 성인이 된 후에는 제대로 어른 대우를 해주었지만, 이따금 불쑥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괴롭힐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어쨌든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싶다는 뜻으로, 안나가 그리 마음을 먹은 이상 거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제이를 쫓아낸 안나가 빠른 걸음으로 루크에게 다가갔다.

루크가 안나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나가 손을 들어 루크의 등짝을 때렸다. 찰싹 소리가 차지게 퍼졌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루크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미치셨어요?!”

“…뭐가.”

“일단 주변에 사람은 다 물렸어요. 어휴, 그렇지 않아도 보름이나 여행해야 해서 힘드실 텐데, 그런 사람한테….”

안나는 흡사 짐승, 파렴치한을 보듯 루크를 노려봤다.

“…갈아입을 드레스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가보시죠.”

“…….”

루크는 루크 나름대로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정말 참으려고 했다.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안나는 루크가 억울하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갈아입을 의복을 마차 의자 밑 가방에 싸두어서 다행이었다.

안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루크를 돌아보았다.

“각하, 수도에 가서도 이러시면 절대 안 됩니다.”

“…….”

“그렇지 않아도 수습할 일이 많아요. 그동안에는 수도와 특별히 관계될 일도 없었고…. 어쨌든 해야 할 일은 잘 해내셨으니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안나, 안나 브로이어는 몰락한 자작 가문의 차녀로, 수도의 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바가 있었다. 선대 스테이턴 공작에게 고용되어 성에 오기 전까지는 잠깐 수도에서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는 다르겠으나 안나는 그곳의 분위기가 쉽게 바뀔 리 없다고 생각했다.

“소문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 이제 각하께서도 아셔야 해요. 각하야 뭐….”

안나는 차갑게 루크를 아래위로 훑었다.

“누가 뭐라든 귓등으로 들을 분이시지만 부인은 달라요. 부인의 가족분들도 다르실 거고요. 부인이야 영지로 돌아가시면 소문이 들릴 일이 없고, 감히 공작 부인에게 대놓고 모욕을 줄 수 없겠지만 부인의 가족들은 어떻겠어요? 스테이턴 영지 사람과 수도의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저걸’ 어떻게 포장해서 랭커스터 가문에 호감을 사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안나는 거침이 없었다.

수도 라 먼스트로드는 분명 스테이턴 영지와 분위기가 다르다. 같은 모드리야 제국민이지만 도시나 지역에 따라 성향 차이가 났다. 억양이나 사투리, 음식, 날씨…. 게다가 무조건 스테이턴 공작의 편인 영지와 달리, 그곳에는 스테이턴 공작을 마냥 곱게 보지 않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를 들면 랭커스터 남작 가문 같은.

루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듣고만 있었다. 안나는 마차 문고리에 손을 대고서 말했다.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용서를 해줄까, 말까인데. 때와 장소도 가리지 못하고 딸을 괴롭히는 파렴치한이어서야….”

파렴치한. 가슴 깊이 비난이 박혔다. 부정도 못 한다.

루크는 끙 신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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