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9. 가깝고도 먼
창밖의 풍경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나디아는 잠시 넋을 놓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가을의 중턱을 넘어선 계절,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했다. 높고 푸른 하늘과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빠르게 흐른 시간을 증명하는 듯했다. 분명 이 길을 오래지 않은 과거 지나갔을 텐데, 나디아는 처음 보는 듯 낯선 길목이 새삼스러웠다.
‘그땐 바깥을 내다볼 여유도 없었지….’
혹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언뜻 내다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속이 거북해져도 마냥 참기만 했다. 나디아는 눈을 내리깔고 뺨을 붉혔다. 오해가 다 풀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지만, 당시 그녀는 제가 정말 남편에게 잡아 먹히는 줄만 알았다.
‘소문이 왜 다 그렇게 난 거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었다. 사람을 잡아먹었다가는 제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범법자로 잡혀 들어갔을 것이고, 키는 컸지만 루크만큼 커다란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수염이 있었을 뿐 고릴라처럼 털이 많지도 않았고…….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어이없는 추측이었다.
나디아는 루크를 한 번 보지도 않고 그 뜬소문들을 믿고 말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갑작스러운 가족과의 이별, 체력에 부치는 마차 여행, 그리고 번쩍거리는 번개에 비친 야수 남편. 결혼을 준비하며 들었던 다양한 소문이 머릿속을 지배해 냉정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가면 오해를 다 풀 수 있겠지!’
수도에 가면, 그리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가장 먼저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을 안심시켜주고, 루크를 따라다니는 흉흉한 소문들도 모두 없애야 했다. 나디아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흘긋 돌려 맞은편을 보았다.
루크는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미간에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나디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 같아.’
면도를 하고 난 뒤 루크는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나디아는 아직도 그의 얼굴이 낯설어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날렵한 턱선과 깨끗한 피부, 날카로운 눈매가 어우러져 차가운 분위기가 흘렀다. 굳이 이목구비를 뜯어보지 않아도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이다. 수염 뒤에 이런 얼굴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결혼하기 전에 그를 만났다면 나디아는 그에게 말 한마디 걸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신분을 떠나 냉랭해 보이는 분위기가 무서웠다.
루크는 결혼 전에 나디아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반해서 청혼을 한 것이라고.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굳이 캐묻지 않았다. 면도 전이든, 지금이든 워낙 인상이 강해 만났다면 절대 잊지 못했을 텐데, 나디아는 그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나디아가 보기에 자신은 딱히 뛰어난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반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부분이 없는 것 같았다. 외모도 평범하고, 소심하고, 말재주도 부족했다.
그래서 루크가 자신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볼 때에는 가슴 깊은 곳이 간지러우면서 부끄러웠다. 행복하지만 조심스러웠다.
이따금 나디아는 루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어쩐지 손을 내밀면 거절당할 것만 같은 거리감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수염이 없어져 낯선 외모가 되어버린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나디아?”
“헤헤….”
나디아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루크의 손가락을 잡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루크가 곧바로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사라지고, 냉랭해 보이던 검은 눈동자에 온기가 스몄다. 나디아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루크는 잠시 나디아를 바라보다,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루, 루크?!”
“…너무 예쁘게 보고 있던 당신이 나빠.”
“그, 그렇다고 갑자기? 창문 커튼도 안 쳤는데….”
나디아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래 봐야 마차 안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었겠는가. 루크가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녀가 띄운 거리는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가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요?”
“그?.”
한 손으로 커튼을 내리는 동시에, 루크는 그녀가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입술을 가린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디아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입술은 쪽 소리를 내고서 가볍게 떨어졌지만 루크는 여전히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인 채였다.
“아, 저, 루, 루크, 마차, 마차가 기울어버릴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커도 그 정도는….”
나디아를 두 팔 사이에 가두고 몸을 반쯤 일으킨 루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디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뇨, 루크가 너무 크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소. 당신이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아.”
루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식 웃었다. 애초에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으니 기분이 상했을 리 없었다.
“……루크, 저 놀린 거죠.”
“조금은.”
그러나 웃으면서도 루크는 뒤로 물러나 주지 않았다. 나디아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너무해….”
“당신이 날 피하는 것 같아서.”
“그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소.”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디아는 그가 키스를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입맞춤은 깊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끊어지지도 않았다. 입술 전체를 삼키듯 덮었다, 아프지 않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얼굴이 가깝다. 눈을 내리뜨고 있어 속눈썹의 결이 자세히 보였다.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어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가 눈을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몄다. 어쩐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기분이 들어 괜히 시선을 내렸다. 루크가 말했다.
“…이제 밀어내지 않는 거요?”
“……어차피 커튼도 닫았고….”
입술을 마주한 채로 나디아가 작게 말했다. 나디아도 키스가 싫지 않았다. 혹여 누가 볼까 봐 밀어내긴 했지만 싫은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가벼운 입맞춤은 기분이 좋았고, 깊은 키스는 몸속 무언가를 짜르르 울렸다. 하루 종일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크는 웃고 말았다. 나디아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제 두 손으로도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루크를 점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이런 점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솔직했다.
나디아는 갑자기 웃는 루크를 의아한 듯 쳐다보다, 제 양옆을 짚은 그의 팔을 보았다.
‘불편할 것 같아.’
마차가 기울 것 같다는 건 다급해서 튀어나온 말이었으나, 루크가 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두 명이 앉아도 충분할 맞은편 좌석이 그 하나로도 꽉 찬 느낌이었다. 키도 크지만 골격과 근육 덕분에 더욱 커 보이는 것이었다. 마차는 큰 편이었지만 그래도 마주 앉아 있으면 무릎이 닿았다.
루크는 자신의 체중을 가뿐하게 지탱하고 있었지만, 나디아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스를 그만두는 건 싫었다.
“루크, 잠깐만요. 다시 앉아 볼래요?”
루크는 순순하게 뒤로 물러났다. 나디아가 너무 당황하는 것 같아서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그 또한 더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이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을 두고 떨어지기가 힘들어서 미련스럽게 지분거리고 있던 거였다. 나디아가 밀어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지.’
피가 몰려 꼿꼿하게 선 아랫도리는 반사적인 현상이었다. 나디아 가까이 있으면, 아니, 생각만 해도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익숙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나디아에게 들키지 않게 잘 가려야겠으나 그 또한 제법 요령이 생겼다.
이상한 부분에서 요령이 붙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만, 뭐 어떠랴.
루크는 나디아가 밀어내는 대로 얌전히 밀려나 제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쑥스러움이 많은 나디아가 여기까지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커튼 한 장으로 가렸다고 하나 바깥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대낮부터 커튼을 친 마차 안에서 부부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익히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안나는 눈치챌 테다. 안나가 알든 말든 루크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나디아는 틀림없이 신경을 쓸 것이었다. 고작 키스라고 해도 말이다.
‘잠시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군.’
루크는 원래 마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4인용 마차라도 사방이 막힌 마차에 앉아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답답해졌다. 수도에 갈 때는 언제나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움직였다.
오늘 마차에 오른 것은 오로지 나디아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나디아와 단둘이 있는 것은 다른 의미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맞닿은 무릎이 스치고, 숨을 크게 들이켜면 나디아의 향기가 따라 들어왔다. 행복한 것과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것은 별개였다.
말을 타고 시원하게 달리다 보면, 정도를 모르는 아랫도리도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때였다. 나디아가 일어나 루크의 다리에 앉았다. 다행히 존재감 선명한 그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나디아?!”
“…무겁진 않아요?”
“그건, 아니오. 당연히….”
“이러면 안 불편하죠…?”
나디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루크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신음을 흘렸다.
안나가 눈치채더라도 모르는 척을 해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