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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50화 (50/150)

49화

“제대로 이별을 나눌 여유도 없으셨겠지요.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부모님은 언제나 그립기 마련이고요. 그래서 수도에 가도 좋을지, 청하려고 오신 겁니다. 각하께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만….”

안나가 비죽 웃었다.

루크는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시녀장과 보좌관의 눈길을 당장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눈앞의 나디아가 더 급했다. 나디아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 것인가?

별 것 아닌 말 한마디 꺼냈다고 얼굴이 굳고, 침통해하고, 그러다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책상에 머리를 박다니.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고 환자 취급을 해준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디아, 미안하오. 내가 조금…… 오해를 해서.”

“오해요?”

“……별건 아니오. 별거는 아니고…. 나디아, 수도로 갑시다.”

“정말요?!”

활짝 웃으며 기뻐하던 나디아가 이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시 제 부탁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루크 안 그래도 쉬는 날 없이 일하고 있는데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 않소. 안 그래도 황태자에게 초대 편지가 왔고.”

레너드의 편지를 때맞게 이용하며 루크가 말했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나디아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흘렸다.

“…당신 부모님께도 제대로….”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 그래야지.”

사죄를 해야 한다. 루크는 무릎을 몇 번 꿇어야 할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나디아가 보았다가는 걱정을 하거나? 너무나 고맙게도 말리려 할 수 있으니,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사죄할 작정이었다.

루크는 다시 이마를 짚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사소한 계기였다. 루크는 나디아의 입에서 ‘수도’로 ‘가겠다’는 말이 나온 것만으로 순식간에 많은 상상을 했다. 행복하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루크는 사실 불안했던 것이다.

나디아가 정말 행복해하는지, 걱정스러웠다.

혹시 아직도 무섭고 불편해하는 게 아닐지, 그녀는 착하니까 배려해주고 있는 게 아닐지.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지만 과연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 걸까.

‘입은 뒀다 무얼 하려고. 나디아는 곧장 대화를 해주려고 했는데.’

바닥이 푹 꺼진 것 같아서,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루크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제게서 떠나간다는 상상을 잠깐 한 것만으로도 그의 세상은 빛을 잃고 말았다. 너무 끔찍했고, 그래서 놀랐다.

“헉, 나, 나디아?!”

루크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나디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탓이었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요.”

“으응?”

“…역시.”

콩, 소리가 났다. 나디아의 이마가 루크의 이마에 닿은 소리였다. 잠시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나디아가 그대로 눈을 들었다. 긴 속눈썹 아래에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루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열이 나잖아요.”

“뭐?”

열? 내가? 루크가 입을 떡 벌렸다.

“얼굴이 너무 빨갛기에 혹시, 싶었어요. 열이 오르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질 리 없으니까.”

열이 오르기는 했다. 부끄러워서 빨개졌기 때문이다. 안나와 제이도 이번만큼은 당황했다. 누가 봐도 건장한 남자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고 아프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오, 나디아. 난 괜찮고, 열도 안….”

“안 나긴 뭐가 안 나요. 뺨도, 이렇게?.”

나디아가 손바닥으로 루크의 뺨을 쓸었다. 루크의 얼굴이 당장 터질 듯 뜨거워진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디아가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이리 와요. 약도 먹고 좀 누워있어요.”

“응? 어, 어어….”

나디아가 루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일어나라는 재촉이었다. 루크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안나와 제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도와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디아가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줄 오해를 했고, 그걸 깨닫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거라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에 얼굴 좀 가까이 붙였다고, 그녀가 다정하게 뺨을 쓸어주었다고 더 빨개진 것이라는 소리를…….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루크는 길 잃은 어린애처럼 나디아의 손에 끌려 집무실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가 힘없이 끌려나가는 모양은 마치 곰이 강아지에게 끌려나가는 형국 같았다.

제이와 안나의 억눌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

루크는 스테이턴 영지를 비우는 날이 많지 않았다.

수도를 싫어하기도 했으나, 그곳에 친인척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없는 이유가 가장 컸다. 태자 레너드를 제외하면 사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제이는 수도에 함께 갈 기사단과 수행원을 신중하게 골랐다. 이번에는 당연히 제이 자신도 함께 갈 예정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던 스테이턴 가문의 저택도 가꿔야 했고, 정기적으로 수도를 방문해야 했으므로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제 수도에는 스테이턴 공작 부인의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이 각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너무나 뻔한 이야기였으나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제이라면, 자신이었다면 루크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중한 딸, 혹은 여동생을 납치하듯 데려가 버린 대귀족. 이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비록 루크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그는 랭커스터 가문에 있어 원수나 다름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제이 자신이 따라갔더라면 레너드에게 놀아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이 역시 귀족들의 사교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다.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안나만 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렌트는 데려갈 수 없었다. 그는 루크가 영지를 비우는 동안 성을 돌보고 급무를 처리하는 데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같은 이유로 게리 노스도 데려갈 수 없었다.

기사 중에서도 멀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추려내야 했다. 첫인상과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제이는 면도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보고서 깊이 깨달았다.

나디아의 수도 방문은 비단 이번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수도에서 자란 귀족 아가씨에게 시골은 답답할 것이다. 그곳에는 그녀의 가족들도 살고 있다.

납치하듯 데리고 와 버린 주제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테다. 나디아가 원한다면 루크는 그녀가 일 년에 몇 달씩 그곳에 머물게 해줄지도 몰랐다. 본인이 얼마나 괴롭든지 결코 내색할 수 없으리라. 제이는 헤벌쭉 웃는 낯으로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했던 루크를 떠올렸다.

영지를 다스리며 몇 달씩 수도에 머무는 귀족은 많았다.

스테이턴 공작만 한 대귀족이면서 중앙 정계와의 교류가 단절되다시피 한 경우가 오히려 매우 희귀했다. 나디아와의 결혼으로 스테이턴 공작의 행보도 많이 변화할지도 몰랐다.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걱정과 염려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랭커스터 가문에 명예 회복을 한 후의 이야기였다.

“제이, 준비는 다 끝났어요. 언제든지 출발해도 돼요.”

“예, 안나. 이른 새벽인데 공작 부인 컨디션은 괜찮으십니까?”

“워낙 들떠 계셔서…….”

안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나디아가 가족들과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짧은 대화 속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직계 가족이라고는 단둘밖에 없던 스테이턴 가문의 삭막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가정에서 자란 게 한눈에도 보였다.

루크에게는 낯선 환경일 것이다.

“각하께서 잘하실 수 있을까요.”

“일단 얼굴도, 무섭지 않게 바뀌었으니……. 희망을 가져 봐야죠.”

“공작 부인처럼 기절해버리시는 건 아니겠죠?”

“…….”

만약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이 나디아와 같다면……. 영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닐 것 같았다.

“어떻게든 각하를 잘, 포장해서…… 호감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죠.”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나도 마차에 타세요. 곧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안나는 마차를 흘긋 보았다. 마차 안에는 루크와 나디아가 타고 있었다. 원래는 안나도 저 마차에 탈 예정이었으나 그녀는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디아에게 찰싹 달라붙은 루크를 제 눈으로 굳이 봐 가며 비위를 상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가 마차에 오르자 준비를 끝낸 일행이 제이의 지휘 아래 수도로 출발했다.

*

같은 시각, 레너드의 편지는 주인 없는 스테이턴 영지로 날아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대략의 사정이 담긴 편지는 성을 지키던 집사 그렌트의 손에, 밀봉된 채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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