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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49화 (49/150)

48화

역시 루크가 수도에 갈 때 자신이 동행했어야 했다. 제이는 첫사랑에 빠진 애송이가 아니었으므로 장난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루크에게 도움은 되지 않았을지언정 해가 되지는 않을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응? 그러면 지금 각하는 부인과 결혼하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

정확히는 못 했을 것이다. 솔직히 수염 덥수룩한 얼굴과 흉악한 기세, 소문을 달고 어떤 여자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루크는 제이가 가져간 편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제이는 루크가 아직 편지를 어찌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진작 불태우라거나 안 간다고 답장하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루크 또한 제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너드가 장난을 친 탓에 자칫 불행해질 뻔했지만, 달리 보면 그 덕분에 나디아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루크는 끈기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나디아가 싫다는데 쫓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레너드의 장난이 없었다면 그들은 연애 비슷한 것도 못 해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겁먹은 나디아가 첫 만남에 기절이라도 하면, 루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도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으리라.

괘씸한데 덕을 본 부분이 있긴 하고…….

“답장 써라.”

“뭐라고 쓸까요?”

루크가 입을 벙싯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보다 노크가 빨랐다.

*

제이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나디아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대답이 없으셨, 셨는데.”

“각하의 집무실에 찾아오실만한 분은 부인밖에 없으시니까요.”

뭐가 좋다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무실까지 오겠습니까. 제이는 사람 좋게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나디아의 뒤에 서 있던 안나만이 알 만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들어오시죠, 부인.”

“잠깐만 실례할게요.”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이는 혹시 자신이 방해한 게 아닌지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공작 부인의 뒷모습을 새삼스럽게 보았다. 공작 부인 너머로 조금 전 살벌하기만 했던 남자가 헤벌쭉 웃는 꼴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디아, 무슨 일이오?”

“루크….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디아가 머뭇거렸다. 제이는 안나에게 눈짓했다. 공작 부인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안나는 대강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 내용일까. 하지만 그랬다면 안나가 먼저 자신의 팔꿈치를 쥐고 바깥으로 끌고 나갔을 것이다. 안나는 제이의 눈짓을 눈치채고도 무시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저, 그게… 사실은….”

나디아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루크는 귀찮은 기색을 보이거나 재촉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제이는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제이가 보기에 나디아는 답답한 성격이었다. 점점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주 말을 더듬었고,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높든 낮든 상관없었다. 낯을 많이 가리고 걱정이 많으며 매사 조심스러웠다.

물론 착한 사람이다. 맑은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제이는 굳건한 충성심을 잊고, 있지도 않은 여동생의 오빠가 되었다. 루크가 밉고 괜히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호감과는 별개로 의아했다.

‘답답한 사람은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나디아는 지금껏 루크가 곁에 두었던 사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루크의 측근만 봐도 그렇다. 제이나 게리, 안나, 그렌트. 모두 화끈하고 대범한 성격으로, 답답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루크 본인도 성격이 급했다. 모든 일에 거침이 없고, 겁을 먹거나 망설이는 법도 없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루크는 누군가 제 앞에서 겁을 먹고 우물거리더라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제이는 그가 짜증을 부리거나 언짢아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루크가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없었네?’

너무 의외라 알아차리지 못했던 면모였다. 측근들에게는 워낙 자주 화를 냈기 때문이다.

“수, 수도에 가고 싶어요…!”

“뭐, 뭣?!”

루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디아는 어깨를 움칠 떨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루크를 쳐다보았다.

‘겁먹게 해서는 안 돼, 진정, 진정하자.’

루크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디아가 제게 겁을 먹지 않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녀가 제게 겁먹어 기절하는 모습을 또 볼 수는 없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니, 너무 놀라서. …다시 말해주겠소?”

“역시 어려울까요? 부,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나디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나디아가 고개를 푹 숙이자 루크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수도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너무 그립다고 말이다. 루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나디아가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꺼냈을지 가늠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나디아는 자주 웃어 주었고, 그녀의 녹색 눈에서는 거짓이나 가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행복한 줄 알았다. 자신처럼 하늘을 나는 기분은 아닐지라도 행복해하고 있으리라고.

다소의 오해와 사건이 있었지만? 낮에도 밤에도 그들은 무척 잘 맞는 부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든 게 루크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

“…….”

루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디아가 놀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애써 숨기려는 노력으로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나디아가 보여준 호감과 선의와 걱정은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나….

그것이 제 감정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

루크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나디아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이제껏 당신 뜻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당신은 언제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한편 나디아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분위기가 무서웠다.

‘내가 말을 잘못한 건가?’

나디아는 말실수를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어쩔 수 없이 오해를 샀다. 사람은 꼭 말하는 쪽의 의도대로 들어주진 않았다. 악의 한 점 없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디아는 처음부터 말을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말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귀족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나디아는 무척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오해는 대화로 풀 수 있다. 나디아는 혹시 루크가 제 말을 오해한 것이라면 자신이 먼저 말해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루크, 제 말은….”

“나디아.”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루크 먼저,”

“당신 먼저.”

그리고 다시 침묵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안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부인, 제가 대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아니에요, 안나. 제가….”

“각하께서 아무래도 멍청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에요.”

“……?”

제이 역시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루크가 눈썹을 들썩거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나디아는 영문을 몰라 괜히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안나와 제이는 부부의 대화가 어디서 어긋났는지 알고 있었다. 나디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크의 얼굴이 굳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버려 두어도 금세 풀릴 오해였다. 나디아는 예민하게 루크의 변화를 눈치채고 대화를 시도했고, 루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디아의 말을 흘려듣거나 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디서 무슨 오해가 생겼는지 서로 알지도 못하는 둔한 부부였지만 소통을 부지런히 하는 한, 괜찮을 것이었다.

“각하, 부인께서는 ‘돌아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고요.”

“……아.”

안나의 말처럼 멍청한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달은 루크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제이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고, 안나가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가운데 오직 나디아만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박거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상상을 다 했던 루크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루크. 왜 그래요?”

나디아가 루크에게 다가갔다. 루크는 차마 나디아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안나는 루크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든지 말든지 말을 이었다.

“수도에 계신 랭커스터 남작 부부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질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오히려 연락이 왔을 테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겠지.”

“부인께 들어보니 워낙 급한 결혼이었고….”

루크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책상에 머리를 박을 기세였다. 나디아가 그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루크? 루크, 어디 아파요? 갑자기 현기증이라도 난 거예요?”

“그게, 아니고….”

아프지는 않은데 어지럽기는 했다. 부끄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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