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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48화 (48/150)

47화

레너드는 눈을 뜨자마자 깃펜과 편지지부터 찾았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의 얼굴이 어른거려 더 누워있을 수도 없었다.

‘술을 뭐 얼마나 마신 거지. 머리 아파 죽겠군.’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는 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말술이었다. 루크에게도 주량으로는 져본 적이 없던 레너드도 앤더슨의 주량에는 혀를 내둘렀다. 레너드는 그에게 거듭 편지를 쓰겠다, 제 이름을 걸고 반드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불러주겠다 약속해야 했다.

감사와 신뢰가 넘쳐흐르는 앤더슨의 녹색 눈동자를 앞에 두자 레너드는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장 편지를 쓸 수는 없었던 레너드는 앤더슨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술을 권했다. 그 결과 레너드 본인만 취했다.

앤더슨은 쓰러지는 레너드를 부축해 눕혀주고는 공손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멀쩡하게 떠났다. 레너드 인생 첫 패배였다.

지난 새벽에 겪었던 당황스러운 일을 구구절절 써 내려가고 싶었지만, 자신 앞에서 소리 없이 울던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앤더슨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대체 왜 루크가 수도에 와야만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콩알만 한 양심의 존재를 알게 된 레너드는 잠시 고민했다.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이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네가 신부를 잡아먹은 줄 안다? 무사히 살아있는 신부의 모습을 보여 달라? 왜 그동안 연락 한 통이 없느냐, 결혼식을 올린 후에 따로 인사라도 나눌 것이지 왜 도망치듯 영지로 돌아갔느냐…. 설명이 비난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너드에게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다른 경우였다면 할 말을 찾을 수 없는 편지 따위를 이어 쓸 리가 없건만, 아직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의 초췌한 몰골을 기억하는 레너드는 차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앤더슨이 울었다는 이야기도, 제 장난으로 비롯되어 고생을 하고 있는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서 문장을 완성시켰다.

그 결과 편지는 그가 며칠 전 보냈던 내용과 썩 다르지 않았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수도에 와야겠다. 지금은 말 못 하지만 와서 들으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빨리 와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반듯한 문장과 화려한 수식이 더해지고 황태자의 이름까지 들어가니 없는 내용도 퍽 그럴듯했다.

레너드는 거기에 한 줄을 추가했다. 며칠 전 편지와 똑같은 내용으로는 그의 긴급한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테이턴 공작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소문을 믿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썩어도 준치였고, 속이야 어쨌든 레너드는 모드리야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였다. 평생 ‘그럴듯한’ 문장을 구사해왔던 그의 펜촉으로 쓰이는 문장은 그의 의도와 달리 퍽 심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는 봉랍을 찍었다.

중요한 내용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편지 봉투는 쓸데없이 고급스러웠고, 크게 찍힌 봉랍 위 인장도 쓸데없이 위엄이 넘쳤다.

편지는 빠르게 스테이턴 영지로 날아갔다.

*

루크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질색하며 휙 집어던진 편지 봉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편지지에다 무슨 짓을 해놓은 것인지, 레너드의 편지에서는 수도 라 먼스트로드와 닮은 향기가 배어 있었다.

금박으로 테두리를 더한 편지지 한 장 가득 유려한 글씨가 가득했다. 반듯한 문장만 보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쓴 편지처럼 보였다.

“또 헛소리만….”

그러나 앞뒤 다 자르고 쓸데없는 부연을 빼면 ‘나 심심하니 놀러 와라’가 요지였다.

레너드가 보내는 편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루크는 그의 편지를 열에 다섯은 무시하고 불태웠다. 세 번은 ‘못 간다’고 곱게 답장을 보냈고, 한 번은 ‘한가하냐, 난 바쁘다’고 보내주었다. 그리고 열에 한 번만 ‘목 닦고 기다려라’는 식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나마도 편지를 루크가 직접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루크는 말재주가 없는 만큼 글재주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 문장을 써서 편지를 보냈다가는 혹시 모를 시비가 걸릴 수 있었다. 레너드는 어쨌든 황태자였고, 루크도 어쨌든 공작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지 모르는 편지가 지나치게 격의가 없어서는 곤란했다.

집사 그렌트와 보좌관 제이는 루크의 한 마디를 예의 바른 문장으로 옮기는 데에 매우 익숙했다. 제이가 말했다.

“뭐라고 하십니까?”

“뻔한 걸 뭘 묻나. 심심하니 수도에 오라는 거지.”

루크는 코웃음을 치며 레너드의 편지를 휙 던졌다.

누군가는 태자의 편지가 황송해 손을 떨 텐데, 이 사람에게는 빳빳하고 냄새나는 불쏘시개일 뿐이었다. 제이는 루크가 던진 편지를 주워 빠르게 읽었다. 루크의 요약은 무례할지언정 핵심을 찔렀다.

“태자 전하께서는 여전히 각하를 좋아하시는군요.”

“네 눈엔 이게 좋아하는 걸로 보이나?”

루크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차가웠다. 제이도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부러워 죽을 것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

“스스로 좋아 뒤집어쓴 굴레를 답답해하는 멍청이일 뿐이야.”

“수도에 살다 보면,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고 치자고.”

루크의 기세가 단번에 험악해졌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했다. 날카로운 기세는 투기와 닮아 있었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치아가 드러났다. 수염이 없어도, 미남자의 얼굴로도 루크의 기세는 조금도 온화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답답하다고 나한테 괜한 시비를 거냐고.”

“……유일한 친구니까?”

“내가?”

루크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이거랑?”

“……어쨌든 친구 비슷한 사이 아니었습니까?”

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다 루크의 짜증 섞인 눈길을 받고서 시선을 피했다. 루크는 얼굴로 욕을 하고 있었다. 친구라고 했다가는 네 쓸데없는 눈깔을 직접 뽑아주겠다는 의사가 만만했다.

‘미남이 되면 뭐하냐고, 더 무서워졌는데….’

부인을 생각하며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리 바보 같은 멍청이가 또 없건만, 저 잘생긴 얼굴로도 무섭기는 여전히 무서운 걸 보면 그냥 사람 자체가 무서운 거였다.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뜨고 있을 때에는, 얼굴만 보면, 평생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귀공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얼굴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로, 빈틈없이 단련된 전신은 여전히 흉기와 다름이 없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말 그대로 짐승에 가까웠다. 짐승이 무서운 건 당연한 이야기였으니 어찌 보면 매우 어울리는 겉과 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겉모습이 말끔해지자 전혀 달라지지 않은 내용물이 더 튀었다. 본디 같은 얼룩이라도 검은 옷보다 흰옷에 튄 게 더 눈에 띄는 법이다.

“그냥 아는 사이다.”

“친척 아니었습니까?”

“아주 먼 혈연이긴 하지.”

“요즘엔 그냥 아는 사이, 혈연이기는 한 사이에 정기적으로 만나 술도 마시고 놀러 다니기도 한답니까?”

“내가 언제 이거랑 놀았지?”

“두 분이서 퍼마신 술이 몇 통인지 아십니까?”

“그러는 너는 세어봤나?”

“…….”

말이 안 통했다. 제이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루크가 아주 제대로 삐딱선을 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마지막은 썩 아름답지 않았다.

‘이번에는 태자 전하 장난이 좀 심하긴 하셨으니.’

좀 심하긴 했다는 표현조차 지금은 일이 잘 해결되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제이는 루크를 이해했다. 레너드는 생각 없이 가볍게 장난이나 쳐보자는 의도였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자칫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질 뻔했다.

가족을 위해 모르는 남자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 나디아가 가장 불행할 뻔했고, 다소 멍청했을 뿐인데 저도 모르는 사이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강제 결혼이라는 심한 폭력을 휘두르게 된 루크도 불행해질 뻔했다. 스테이턴 성의 영주 부부가 불행해지면 자연히 따르는 측근도, 영지민들도 행복해질 수 없으니…….

‘……조금 심한 게 아니었는데?’

만약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겠는가? 행복해서 얼굴이 풀어진 지금도 이따금 무서운데, 이게 하루, 한 달, 일 년…… 평생 이어졌다면.

“…….”

제이는 레너드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레너드는 ‘첫눈에 반한 여인에게는 청혼부터’라는 가벼운 장난으로 그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말 한마디뿐이었다면 제이는 그에게 속아 넘어간 루크도 똑같이 욕했을 것이다. 루크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청혼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 내내 입을 다물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결혼 준비를 도와주기까지 했던 레너드의 잘못이 가장 컸다.

속사정을 모르고 그저 급히 결혼했다는 소식만 들었을 때는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위신을 생각해 배경을 채워준 황태자 레너드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가졌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제 장난으로 허우적거리는 루크를, 최선을 다해 놀렸을 뿐이었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각하를 보며 얼마나 웃었을지….’

잘생긴 얼굴 가득 환히 웃으며 박수를 쳤을 레너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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