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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47화 (47/150)

46화

꽃 같은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신과 드넓게 펼쳐진 제 땅을 바람처럼 달리는 루크. 지금은 같았던 뿌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부러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스테이턴 영지에 편지를 보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딱히 일없이 그를 불러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편지를 보낸 참이었다.

얼마나 신혼 생활이 달콤하면, 결혼식의 잡일을 모두 도맡아준 자신에게 연락 한 통 없단 말인가? 레너드는 루크가 마음에 들지만, 그가 너무 행복한 꼴은 보기 싫었다.

“스테이턴 공작을 불러 달라고?”

“네, 전하.”

그렇다고 불행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레너드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분명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랭커스터 남작의 장남,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였다.

기억에는 있으나 낯선 얼굴이었다. 그는 이 자리의 주최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쩔 수 없이 들여놓았지만 영 마뜩잖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너드는 내심 웃었다. 주최자는 영악한 기회주의자의 전형 같은 남자였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을 기꺼이 해줄 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앤더슨이 무슨 수를 쓴 것이다. 고지식한 기사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꽤 수완이 좋은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용건을 비밀스럽게 말할 재주까지는 없나 보군.’

반역 모의도 아니고 굳이 비밀스럽게 말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직접 편지를 보내지 그러나.”

“……감히 공작 각하께 어찌.”

“신분을 떠나 이젠 여동생의 남편 아닌가.”

차마 아랫사람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스테이턴 공작 측에서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레너드는 자신의 말에 한층 더 심각한 낯이 된 앤더슨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앤더슨은 누군가에게 목을 졸리는 사람처럼 괴로운 표정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적당히 술을 마시며 편안히 기대어 있던 레너드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앤더슨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넉 달이 좀 덜 됐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첫사랑에 허덕이기에 레너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을 쳤다. 사랑하면 청혼하라는, 정론이되 멍청한 짓을 권했다. 설마 그 장난이 정말 결혼식으로 이어질 줄은 레너드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루크의 옆에서 레너드의 제안이 멍청한 장난이라고 직언해줄 제이드 앨런만 있었어도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는 직언을 해줄 만한 측근과 동행하지 않았고, 결혼은 성사되었다.

‘하지만 그게 내 탓인가?’

첫사랑에 가벼운 장난이 더해져 벌어진 결혼이었으나 레너드는 가볍게 죄책감을 벗어던졌다. 그의 장난이 짓궂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촉매였을 뿐 원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로는, 레너드는 청혼서를 받았다고 하여 냉큼 받아 들여버린 랭커스터 남작이 평판과 다르게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고 판단했다. 이제껏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고 말이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첫사랑을 놓치지 않게 되었고, 랭커스터 남작도 기다리던 기회를 잡았다. 딸을 팔아치운 대가로 재산 두둑하게 챙겼고, 권력으로 이어지는 끈도? 모르긴 해도 여럿 잡았을 것이다. 딸이 불쌍하게 되었으나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나? 레너드는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양심이 콩알 같은 레너드라도 앤더슨의 얼굴을 앞에 두고는 미안해지고 말았다.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는 넉 달 전에 보았던 얼굴과 달리 무척 초췌한 꼴이었다. 황태자 앞에 서야 했으므로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머리칼도 넘겨 정리하긴 했으나 푹 꺼진 눈 밑과 푸석한 피부를 채 다 숨길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콩알만 한 양심이 콕콕 찔렸다.

레너드는 이기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영리한 두뇌는 그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와 그에 합당한 근거를 쉽게 찾아냈다. 그리고 나머지는 편리하게 지워버렸다.

‘거절하지 않아서’ 얻게 된, 단 한 사람을 빼고는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결과라고 정리해버리고.

레너드는 결혼식 내내 울고 있던 랭커스터 남작 부인과 그녀의 딸, 베일 아래에 우울한 얼굴을 감춘 신부와?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것처럼 우울한 낯의 랭커스터 남작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 걱정이 많은 모양이로군…….”

앤더슨은 차마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레너드는 당황해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장 물러가라!”

“예!”

주최자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앤더슨을 끌어내려 했다. 레너드가 짜증을 부렸다.

“뭐 하는 짓인가!”

“예?!”

“이 사람만 놔두고 다 나가란 말일세!”

“저, 저요?”

주최자가 소처럼 눈을 껌벅거렸다. 레너드가 차갑게 고갯짓을 했다.

“전부.”

“…예….”

앤더슨도 눈만 깜박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쫓겨날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가 얼마나 큰 각오를 다지고 레너드 앞에 섰는지 알 수 있었다. 레너드는 깊이 반성했다.

술을 마시거나 카드를 치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다. 넓은 방 안에 단둘만 남은 레너드는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앤더슨에게 내밀었다.

“마시게.”

“아닙니다, 전하. 저는….”

“그리 긴장할 것 없네.”

황태자가 내미는 잔을 받고서도 앤더슨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앤더슨이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콩알만 한 줄 알았던 양심이 부피를 키웠다. 레너드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걱정이 많은 건 이해하네. 당연히 걱정이 되겠지.”

“…예.”

앤더슨은 울컥한 건지 목소리 끝이 떨렸다. 레너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앤더슨이 말했다.

“제 여동생은 정말이지 착한 아이입니다. 가족들을 위해 시집을 가겠다고 결정해주었지만 저희는….”

“…….”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스테이턴 공작 각하께서는, 그, 무서운 소문이 워낙 많은 분이 아닙니까…….”

“…….”

“결혼식 때 뵙긴 했지만, 지금 여동생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저희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전하….”

앤더슨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정수리를 보며 레너드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는 법도 모를 것 같이 생긴 남자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그가 우는 원인이 자신의 가벼운 장난이었다는 게 레너드는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자네도 스테이턴 공작을 직접 보았지 않나.”

“예.”

그렇기 때문에 더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레너드가 말했다.

“그 사람은 보기와는 다르다네.”

“…….”

“그, 진정으로 자네 여동생에게 반하여 청혼을 한 것이고….”

“네?”

앤더슨은 무례하게도 손에 쥔 술잔과 레너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황태자가 이미 인사불성으로 취한 건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다짜고짜 청혼서부터 던지는 경우가 어디 상식적인가. 진심으로 반했다면 청혼하기 전에 만남을 청하고 친분을 다지는 가벼운 데이트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익히고, 춤이라도 한 번 춰 보아야 했다. 폭력 같은 강요를 내세울 게 아니라.

레너드는 차마 속사정을 모두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청혼부터 하는 거라고 장난을 쳤다고, 이 초췌한 남자 앞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앤더슨이 조금 덜 힘들어 보였다면 뻔뻔하게 말을 던져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앤더슨은 금방이라도 말라죽을 것 같은 꼴이었다.

“……스테이턴 공작에게 그 뒤로 연락은….”

“선물 같은 것들이 오기는 했습니다만….”

열어보지도 않은 게 틀림없었다. 랭커스터 남작의 평판만큼 앤더슨 라드 랭커스터도 고지식한 사람 같았다. 레너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진짜 홀랑 결혼하고 바로 내빼버린 거냐, 이 멍청한 친구야….’

요령이 없고, 묘한 곳에서 비상식적인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다웠다. 그러나 그 결과가, 강제로 결혼을 요구하고서 납치하듯 데려가 버린 것과 다름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술이 단숨에 깼다. 레너드의 등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스테이턴 공작에 대해 어떤 소문을 들었을지 다 알고 있네.”

“……흑, 전하….”

레너드는 앤더슨의 어깨를 꽉 쥐었다. 이해받았다고 생각한 앤더슨이 감동으로 울먹거렸다.

‘진짜 작은 동물 같은 집안이네.’

레너드는 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리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 친구는 보기와 다르다네. 자네 여동생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 레너드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사히, 살고 있을 거라네.”

“…무사히, 말입니까….”

앤더슨에게는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할 단어 선택이었다. 레너드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스테이턴 공작을 불러주겠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아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닐세. ……혹시 도와줄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하, 하하…. 한 잔 쭉 들이켜게.”

앤더슨은 연신 감사하다 말했다. 그의 입에서 ‘감사하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레너드는 양심이 찔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편지를 보냈으나 당장 한 장 더 써야겠다. 레너드는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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