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럽던 결혼식이 황태자의 등장 이후 10배는 더 두려워졌다. 그와 동시에 만약 이 청혼을 거절했다면 랭커스터 남작 가문은 정말 멸문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디아는 결혼식의 규모 때문에 정신이 없어 황태자까지는 보지도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랭커스터 남작은 수도에서 오래 살았다. 귀족 중 가장 말단이라는 남작의 지위는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없는 명분상의 신분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럭저럭 재산도 모았고, 사교계 인사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를 받은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해질 수 있는지 랭커스터 남작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청혼을 거절했다고, 주제도 모르고 창피를 주었다고 화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순간 참지 못하고 쏟아내는 ‘화’가 얼마나 큰 재앙이 될 수 있는지도 안다.
그래, 정략혼이라고 해도 대귀족과의 결혼이니 혹자의 말처럼 행운일 수 있었다.
스테이턴 공작이 먹고 떨어지라는 듯 주었던 황금과 땅, 그는 목록을 채 다 읽지도 못한 수많은 재산도 어쩌면 행운일 수 있었다.
적어도 스테이턴 공작이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야수라더니! 진짜 우리 나디아를 홀랑 잡아먹은 건 아닐까?’
성대하고 성급한 결혼식이 끝나고 나디아는 스테이턴 영지로 떠났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루어진 결혼은 꿈처럼 허망하게 끝이 났고, 랭커스터 남작 부부는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첫날밤 나디아가 기절해버린 이유로 충격을 받은 루크가 제정신이 아닌 채로 도망치듯 수도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볼품없고 비참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를 알 리 없는 랭커스터 남작은 스테이턴 공작이 무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딸을 훔치듯 빼앗아 가놓고는 인사할 여유도 주지 않다니. 다른 건 다 차치하고 그 하나만을 보아도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스테이턴 공작에 대한 소문을 알면 알수록 랭커스터 남작은 죽을 것처럼 괴로워졌다. 나디아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애지중지 키웠던 수많은 날들이 매일 그의 머릿속과 눈앞에 나타나 목을 졸랐다.
‘차라리 모두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직 어린 손주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손주들은 너무 어렸고, 보호해줄 어른들이 필요했다. 랭커스터 남작은 가문이 몰락한 후 앤더슨과 일리야의 아이들을 다른 가문으로 입양보내는 단계까지 상상해보았을 정도로 갖은 해결책을 모색했었다.
결국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나디아에게 억지 결혼을 강요하는 꼴이, 랭커스터 남작의 최선이었다.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 나디아. 어흐흑….”
랭커스터 남작의 눈가가 오늘도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어두운 서재의 문이 열렸다. 랭커스터 남작의 서재에 들어선 앤더슨은 아버지의 울음소리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또 이리 어둡게 해놓으시고는….”
“나는 햇빛 아래 나설 자격이 없는 아비다.”
“저라고 다르겠습니까마는, 아버지께서 이러시면 나디아가 더 가슴 아파할 겁니다.”
앤더슨은 창가로 가서는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랭커스터 남작은 갑작스럽게 드리운 빛이 눈부신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눈을 가리는 척 눈물을 훔쳤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장남이 아니었지만, 부모의 못난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또 나디아의 편지를 보고 우셨군요.”
앤더슨이 책상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 뻔한 거짓말을 누가 믿는다고….”
“우리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게 아니냐.”
“차라리 적당히 힘들다고나 할 것이지….”
랭커스터 남작을 타박했지만 사실 앤더슨의 속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나디아의 편지에 랭커스터 남작 부부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 앤더슨도, 일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온 편지 내용은 모두 같았다.
잘 지내고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말을 어떻게 믿겠니.’
착한 막냇동생이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을 위해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글자가 울지 말라는 뜻으로 읽혀 목이 메었다. 그러니 어떻게 답장을 쓸 수 있었겠는가? 답장을 쓰려고 펜을 들면 눈물로 잉크가 죄 번져 더 쓸 수가 없었다.
앤더슨은 야수 공작이라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모두 긁어모아 아주 작은 소문이라도 죄다 긁어모았다.
급히 치러진 결혼식 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가 꽤 많았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아직 28세라는 사실, 그가 황태자 레너드와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다는 사실, 사교계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지만 제국의 건국기념일에는 반드시 수도에 온다는 사실, 그리고…….
‘야수’라는 별명만큼이나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사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거느리고 있는 흑곰 기사단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력집단이었다. 귀족의 사병이라 규모가 한정되어 있지만, 흑곰 기사단이 받는 혹독한 훈련은 수도에서도 무척 유명했다. 그리고 흑곰 기사단의 훈련에는 반드시 공작이 직접 참여한다고 했다.
앤더슨은 결혼식 당일에야 스테이턴 공작의 실물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고개만 슬쩍 숙였던 남자는 같은 남자의 눈으로 봐도 크고 위압감이 넘쳤다.
‘그 북실북실한 얼굴이 아직 20대라니.’
대체 어느 부분에서 놀라야 할지 모를 정보들이었다.
“아버지, 눈물 닦으세요. 아직 희망은 있어요.”
“대체 무슨 희망이 남았단 말이냐. 우리 나디아는 지금도 혼자, 혼자….”
“아버지께서 기운을 차리셔야 어머니도 일어나시죠.”
“아….”
랭커스터 남작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디아의 결혼식 이후 시름시름 앓던 랭커스터 남작 부인은 나디아의 편지를 받고 끝내 자리에 누워 버렸다. 일리야가 간호를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영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스테이턴 공작은 건국기념일에는 꼭 수도에 온다고 합니다.”
“내년 봄은 되어야 겨우 우리 딸 얼굴이나 보겠구나….”
건국기념일은 긴 겨울이 끝나 봄이 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랭커스터 남작이 또 울음을 터뜨리려 하자, 앤더슨이 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레너드 태자 전하와 친분이 있다고 해요.”
“…안다. 결혼식 때도 그분이 계셨으니.”
“제가 레너드 태자 전하를 만나보려고 합니다.”
“네가?”
남작의 아들은 귀족이지만 작위가 없다. 제국의 태자를 독대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닌 것이다. 랭커스터 남작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스며든 햇빛이 앤더슨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올라 있었다.
“어떻게든,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힘을 빌려서요. 좀 빌었습니다. 태자 전하께 공작 각하를 수도로 불러달라고 빌고 또 빌어보려고요.”
“……앤더슨…….”
“이딴 거짓말일 게 뻔한 편지만 믿을 수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 눈으로 잘 살아있는 나디아 얼굴은 확인해야죠. 만약 그 애가 스테이턴 공작에게 학, 학, 학….”
앤더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학, 학대라도….”
“…….”
“받고 있는 것 같은 정황이 잡히면, 그땐.”
랭커스터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말해뒀습니다. 받아들여 주더라고요, 고맙게도. 일리야의 가족에게도요. 만약 나디아가 불행해 보이면, 그땐, 모두 같이 이 제국을 떠납시다.”
“앤더슨!”
“다 같이 도망쳐버리자고요. 그 애를 혼자 지옥에 밀어놓고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지금 이게 사는 겁니까?”
굳은 다짐 사이로 기어코 눈물이 스몄다. 앤더슨이 중얼거렸다.
진작 이럴 것을.
*
수도 라 먼스트로드.
제국 모드리야는 대륙 서남부에서 가장 큰 영토와 오랜 역사를 가졌다. 건국 이래 위기가 없던 건 아니었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모드리야 제국이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비옥한 영토와 부강한 군사, 4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는 이윽고 오늘날의 화려한 문화 예술로 꽃을 피웠다. 모드리야 제국민, 그중에서도 수도 라 먼스트로드에 거주하고 있는 수도민들은 자신들이 문화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태자 레너드는 비죽 웃었다.
“꽃이 피면 지는 날만 남았지.”
“열매가 맺히지 않고요?”
레너드는 손에 쥔 잔을 흔들며 말했다.
“열매는 꽃이 진 자리에 맺히지 않나.”
뜬금없이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태자 레너드를 사람들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레너드는 잠시 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궁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루크였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비웃기나 했겠지.’
비웃기만 했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도 황태자라고 입으로 욕은 하지 않겠으나 눈에는 솔직한 욕이 한가득 담겨있을 게 분명했다.
꽃 같은 도시, 화려하고 연약한 수도.
루크는 수도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레너드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 냄새가 나는지는 몰라도 이 도시는? 마치 설탕 공예품처럼 달고 속이 비었다.
그리고 그는 이 수도의 정점, 곧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은 거대한 제국의 후계자였다.
물론 레너드는 제국 모드리야와 수도 라 먼스트로드를 사랑했다. 그는 이 달콤한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가 사랑하며, 사랑해야 하는 의무였다. 그러나 가끔은,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가 무겁고 두려워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물고기가 물속을 벗어나 살 수 없듯이 그가 살아야 할 도시를 떠나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레너드는 자신의 처지와 주제와 의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달랐다. 그는 황족 못지않은 귀한 핏줄을 잇고 있으면서 자유로웠다. 진심으로 제 영토를 사랑하며 헌신할 준비 또한 되어 있었다.
스테이턴 영지에는 적어도, 호시탐탐 그를 끌어내려 눈을 빛내는 적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 상처를 입히려는 핏줄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레너드는 제 영토와 의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루크가 이따금 부러웠다.
너와 나의 시작은 같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