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비가 오려나?’
나디아는 창틀로 쪼개진 하늘을 보았다. 잔뜩 흐린 것이 오후에는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안나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차를 준비할까요?”
쓸쓸하게 홀로 티타임이나 즐기라는 뜻은 아닐 테니, 루크를 부르겠냐는 질문이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방해하면 미안하잖아요.”
“부인이 무얼 하셔도 각하는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텐데요.”
한 달 치 재무 서류를 불쏘시개로 써도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 말할 것이다. 뿐인가? 더 필요한지 먼저 묻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에이, 설마요. 바쁘실 텐데.”
나디아가 순한 얼굴로 웃었다. 안나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크가 나디아에게 얼마나 빠져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건 당사자인 나디아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휘두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분이시니.’
제 영향력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너에게 이만한 힘이 있다고 알려주어봤자 헛수고였다. 나디아는 제가 루크를 어떻게 휘두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조심하느라 움츠러들 사람이었다.
‘잘 어울리는 부부라 해야 할지, ……나란히 둔한 부부라 해야 할지…….’
루크를 욕하는 건 망설일 게 없지만, 차마 나디아에게 나쁜 말은 할 수 없는 안나는 ‘둔하다’ 정도로 평을 멈췄다.
나디아는 조금 느리지만 착실하게 스테이턴 성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와 시종, 하인들의 이름과 얼굴을 성실하게 외우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소심한 성격 탓에 귀족답지 못한, 다소 어설픈 인사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이제는 꽤 친숙해진 모양이었다. 성 곳곳에 나디아의 취향이 반영된 물건이 늘어났다. 그것만으로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루크에 대한 나디아의 오해나, 사탕을 입안 가득 욱여넣은 어린애 같이 웃고 다니는 루크의 멍청하게 풀어진 얼굴이나, 그로 인한 사람들의 속병 같은 건 사소한 문제였다. 안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휴….”
나디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가 물었다.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부인.”
“그게, 안나….”
나디아는 안나를 한 번 보고, 다시 제 손을 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안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답장이 오질 않아요.”
“네?”
“수도로 보낸, 랭커스터 본가로 보낸 제 편지에…….”
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디아가 말하는 편지는 루크의 실종 사건도 전에 보낸 것이었다. 답장이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혹시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이상하네요. 오늘 아침에도 수도에서 편지가 왔었는데.”
“…….”
나디아도 알고 있었다. 혹시 수도에서 답장이 온다면 곧장 알려달라고 따로 하인들에게 부탁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도착한 편지 중 나디아에게 온 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수심으로 어두워졌다.
“걱정마세요, 부인. 제가 알아볼게요.”
“고마워요, 안나.”
나디아가 흐리게 웃었다.
*
수도로 날아간 편지는 랭커스터 남작 가문의 저택 서재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나디아는 부모님께 쓴 편지들이 도중에 사라졌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편지는 무사히 배달되어 그녀의 부모님 손에 들어갔다.
랭커스터 남작은 막내딸이 보낸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그들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나디아의 편지를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편지 내용은 그들이 수십 번을 다시 읽어도 똑같았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전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느 하나 믿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마음을 써준 것이 분명했다. 가장 힘든 건 자신일 텐데도.
랭커스터 남작은 빳빳하고 매끄러운 편지의 표면을 쓸었다. 편지의 봉랍(封蠟)에 찍힌 인장은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문장이다. 랭커스터 가문이 아니라 스테이턴 가문의 문장. 이제 그들의 소중한 막내딸은 랭커스터 가문이 아니라 스테이턴 가문에 속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디아…….”
랭커스터 남작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막내딸의 이름이 가슴 깊은 곳에 박힌 가시처럼 그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 넉 달 전부터 그는 끔찍한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리느라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나디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예뻤지, 내 딸….’
나디아가 예쁘지 않았던 적이 있기야 했겠느냐마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신부 차림의 딸은 너무나 예뻐서 더욱 가슴이 찢어졌다.
우아한 진주와 섬세한 레이스로 장식한 새하얀 신부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정작 드레스를 입은 딸은 단 한 순간도 웃지 못했는데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디아가 입은 드레스 한 벌이 얼마나 비싼지, 저 드레스를 사려면 그들의 고급 드레스를 다 팔아도 모자랄 것이라며 질투 섞인 야유를 던졌다. 유서 깊은 대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 남작의 딸이라니, 겉만 보면 배가 아플 일이기는 했다.
사람들은 랭커스터 남작의 딸이 스테이턴 공작 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일인지 알라는 양 끊임없이 속닥거렸다. 뒤에서 수군거리다 못해 몇몇은 랭커스터 남작의 앞에 와서는 웃는 낯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무슨 수를 썼기에 저 대귀족을 물었느냐, 딸을 팔아 얼마나 챙겼느냐.
정말이지 너무나 저속해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남작은 그 헛소리들을 그저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들의 말이 비단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딸을 제물 삼아 랭커스터 가문의 안전을 택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제국의 대귀족, 스테이턴 공작이 어떤 까닭으로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를 신부로 원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디아는 사교 활동이 적지 않았지만 모든 자리에 가족들과 동석했다. 부모가 바쁠 때에는 일찍 결혼한 언니 일리야나 오빠 앤더슨, 혹은 앤더슨의 부인과 함께 다녔다. 나디아가 아는 사람은 가족들 전부 알았다. 그러니 사교계에는 나오지도 않는 스테이턴 공작 가문 사람과의 인연이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었다.
느닷없는 청혼과 대 귀족 가문 스테이턴의 이름.
랭커스터 남작은 제게 닥쳐올 것이라 생각한 적도 없는 위기가 당황스러웠다. 혹자는 주제넘은 행운이라 말할지라도 그를 비롯한 랭커스터 가족들에게는 위기였다.
바란 적도 없는 행운은 독과 다름없었다.
랭커스터 남작은 자식들의 결혼으로 어떤 이득을 셈하지 않았다. 이미 제 가정을 찾은 아들과 딸은 물론이고, 나디아에게도 사랑 없는 결혼 따위를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인생에 사랑과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랑과 가족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 위를 홀로 걷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우리 착한 딸….’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차마 거절도 하지 못하는 랭커스터 남작 부부에게 나디아는 ‘시집가겠다’고 먼저 말을 해주었다. 부모가 심려하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하는 착한 딸이었다.
나디아는 웃지 못했다.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어떻게든 웃어 보이려고 어설프게 입꼬리를 당겼으나 그게 더 가족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스테이턴 공작, 제국의 대귀족이자 국경을 지키는 공작령의 주인.
제국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 했다는 대귀족의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제국에 속해 있지만 스테이턴 공작령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공작령의 영민은 제국민이 아니라 공작의 백성이었다. 독립만 하지 않았을 뿐, 스테이턴 공작은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 공왕에 가까운 지위를 가졌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럼에도 먼 옛날 바친 충성의 역사에 기대어 스테이턴 공작은 아직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에 반해 랭커스터 남작은 신분만 귀족일 뿐 사실상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랭커스터 남작 부인은 꽤 이름 있는 백작 가문 출신이었지만 결혼 후 인연은 끊기다시피 했고, 그나마도 수도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랭커스터 가문이 수도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랭커스터 남작의 개인적인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서기관으로 입궁하여 행정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랭커스터 가문 출신이 모두 그렇듯 온화하고 따뜻한 인성으로 수도 라 먼스트로드의 사교계 인사들에게 그럭저럭 인기가 좋았다.
부유하지 않아도, 신분이 대단히 높지 않아도,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도 랭커스터 가족들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안아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귀족의 청혼을 거절하는 담력을 발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디아가 가족을 위해 청혼을 받아들인 후로는 더욱 고작 남작의 담력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상대는 제국의 대귀족이다. 게다가 젊은 공작에게는 그의 뒤에 서줄만 한 가문의 어른이 없었다. 결혼식 때 스테이턴 공작의 뒤를 자처한 사람은 바로 제국의 황태자였다.
랭커스터 남작은 같은 파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무려 황태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럽던 결혼식이 황태자의 등장 이후 10배는 더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