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8. 보기와는 달리
제이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근래 그는 속이 영 좋지 않았다. 기실 그만이 아니라 스테이턴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비슷한 병증을 갖고 있었다.
위장은 튼튼하다. 제이는 영주의 수석 보좌관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기사였으므로 타고난 신체가 건강한 편이었다. 돌도 씹어먹을 수 있을 루크 만큼은 아니어도 쉽게 속탈이 날 정도도 아니었다. 문제는 몸이 아니라 정신 쪽에 있었고, 원인도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꼴 보기가 싫지?’
바로 스테이턴 성의 영주이자 주군,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었다.
제이는 메슥거리는 속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뭐?”
“입이 귀에 걸리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루크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입가를 덮었다. 입매는 겨우 가렸지만 얼굴에 어린 웃음기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제이는 노골적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벌써 한 달째 보고 있는 꼴인데도 영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차라리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꼴이 나았는데.’
페이퍼 나이프를 빼어 들고 제 아랫도리를 잘라버리겠다 설치던 걸 말릴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한눈에 반해 결혼한 부인에게 말 한마디 걸기 무서워 책상을 부술 듯 다리를 떨 때에도 도와주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찾아올 부작용 같은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제이는 충성스러운 기사이자 보좌관이었다. 그의 충정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이 단단했으나, 진심과 비위는 별개의 문제였다. 제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좋으십니까?”
“……무엇이.”
“시침 떼도 소용없습니다. 얼굴에 훤히 다 쓰여있는 것을.”
“크흠, 흠.”
“새벽 훈련이 없어져서 기사단이야 좋아하고 있습니다만.”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실종, 혹은 조난 사건 이후 한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 스테이턴 성에는 작은 변화가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흑곰 기사단을 괴롭혀 왔던 새벽 훈련이 사라진 것이었다.
매일 새벽 흑곰 훈련단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지휘 아래 훈련을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은 일반 병사들도 훈련에 참여했다. 영주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훈련을 주도하니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고 요령도 부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흑곰 기사단과 스테이턴 영지 병사들은 그 어느 영지보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실종 사건 이후 루크는 단 한 번도 새벽 훈련을 주도하지 않았다. 성에서 일하는 그 어떤 행정관보다 부지런해 곤란했던 영주의 출근 시간도 늦춰졌다. 루크가 침실에서 빠져나오는 시간 자체가 늦어진 것이다.
그러나 영주가 게을러졌다고 안 좋게 볼 영지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실 야수 공작의 괴물 같은 체력 때문에 가장 고생했던 것은 기사단과 행정관들이었다.
“가증스러우십니다.”
제이는 이제는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헤벌쭉 벌어진 루크의 멍청한 얼굴을 보다 툭 뱉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에는 진심뿐이었다.
“내가 뭘?”
“그 덩치로 부인께 걱정이나 받고 좋아하시는 꼴이 영 보기 거북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충성과 비위는 별개였다.
제이를 비롯한 행정관, 흑곰 기사단, 일반 병사와 시녀, 시종, 하인들까지 같은 병증을 앓게 된 원인이었다.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꼴이라 몸에서 먼저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태라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루크는 뻔뻔하게도 의자에 등을 기대며 코웃음을 쳤다.
“어쩌겠나. 아무리 말해도 나디아가 믿지를 않는 것을.”
“믿지 않아 슬퍼하는 분치고는 너무 환히 웃고 계십니다만.”
“이런 건 처음이라.”
루크는 턱을 괴고 웃었다. 씩 웃는 입매가 시원하게 늘어졌다. 그 낯짝마저 꼴 보기가 싫어서 제이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 메슥거림이 속을 괴롭혔다. 감히 주군의 얼굴에 대고 토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수염으로 덮였을 때보다 생김새만 보면 훨씬 나았다. 솔직히, 그래, 제이는 객관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면도를 한 루크는 무척 잘생긴 편이었다. 그러나 싱글벙글 웃는 낯짝을 보고 있는 건 너무나 고역이었다.
두 번째 변화는 바로 나디아였다.
나디아와 루크가 결혼한 지는 넉 달이 좀 안 됐다. 그중 보름은 스테이턴 영지로 이동하느라, 한 달은 방치되어 날아갔으니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이제 두 달 반을 좀 넘긴 셈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루크는 나디아가 겁을 먹어 기절할까 무서워 절절맸다. 밤마다 돌이 되어 뜬눈으로 아침을 기다리기도 했고, 페이퍼 나이프로 아랫도리를 자르려고 하기도 했다. 덥수룩한 수염을 밀기도 했고, 조난 겸 실종을 당하기도 했다. 나디아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게리의 눈먼 검에 얻어맞기도 했고….
그 결과 나디아는 루크가 눈만 떼면 제 발로 위험에 뛰어드는 무모하고 연약한 남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나디아는 루크의 너덜너덜한 등짝의 상처가 모두 나을 때까지 직접 약을 발라주고 거즈를 갈아주었다. 상처를 볼 때마다 제가 더 아픈 듯이 울상을 지으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상처를 돌봐준 덕분에 얕은 상처는 흉터도 남기지 않고 나았다.
“각하 같은 괴물을 어떻게 연약하다 생각하실 수 있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싱글싱글 웃는 루크의 낯짝도 거북했지만,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건 그를 연약한 새끼 짐승마냥 여기는 나디아의 태도였다.
제이는 심각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게 아닌지 걱정됩니다만….”
“지금 감히 공작 부인의 눈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건가?”
“……정정합니다. 부인은 그저 착하신 것뿐이고, 각하께서 사기를 치고 계신 거죠.”
루크는 부정도 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너무 귀엽지 않나, 응?”
“…….”
“난 솔직하게 다 말하고 있어. 나디아가 믿어주지를 않아서 그렇지.”
저 가증스러운……. 제이는 찌푸린 눈살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질색하며 루크를 노려봤다. 충성스러운 부하치고는 굉장히 불손한 눈빛이었지만 루크는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루크는 기분이 좋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인생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는 건가?’
인생의 절정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루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이 미쳐서 제게 축복을 내려준 게 아닐까 싶었다.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조차 세상이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 다한 것이다.
처음에는 루크도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크는 정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디아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며 호소했다. 자신은 결코 약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디아는 믿어주는 듯 믿어주지 않았다.
“그런 것과는 달라요. 루크는 자신의 몸을 아끼질 않잖아요.”
그것도 아니었다. 루크는 딱히 희생정신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지를 아낀다고 해도 밤낮없이 일만 하시고….”
남보다 체력이 뛰어나다보니 쉽게 지치지 않을 뿐이다. 해명 같지 않은 해명을 하나둘씩 이어갈 때마다 나디아는 오히려 루크를 불신하게 되어 버렸다. 말을 할수록 나디아의 안에서 자신이 ‘배려가 넘치고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더 말도 못 하게 됐다.
나디아의 걱정이 너무 달았다.
루크는 숲에서 돌아왔던 날 펑펑 울며 자신을 끌어안던 나디아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너무 자주 꺼내어 되새기다 보니 이제는 기억조차 닳을까 아까워질 정도였다. 상처에 닿을까 무서워 스치지도 못하던 손가락, 후두둑 떨어지던 굵은 눈물방울, 파리하게 질린 안색….
괜한 걱정을 끼쳐 죽을 것처럼 미안한 한편, 자신을 위한 마음이 고맙고 애달파서 가슴 깊은 곳이 저렸다.
그 누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이토록 걱정해주겠는가?
누가 야수 공작을 마치 새끼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겠는가?
다른 사람의 동정이나 걱정은 받아도 기분만 나쁘겠지만 나디아는 달랐다. 루크는 생각을 바꾸어 나디아의 오해를 조금 즐겨보기로 했다. 나디아가 걱정할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이 울리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혀가 아릴 만큼 다디단 마음이 가슴 안쪽에 간지러운 봄바람을 일으켰다.
다시금 활짝 웃는 얼굴이 된 루크를 보며 제이는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나마 육성으로 욕을 뱉지 않은 것이 그의 마지막 충정이었다.
“세상은 아름다워….”
지랄하네, 라고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성 사람들 모두가 불치병으로 앓아누울 판이었다. 제이는 그 끔찍한 불행을 막기 위해 가져온 편지를 루크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멍청하게 웃던 루크의 시선이 빳빳한 편지 봉투의 겉면에 닿았다.
한 달 만에 루크의 미간이 깊이 패였다.
“뭔가, 이건.”
불퉁한 목소리였다. 제이는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보시는 대로, 수도에서 온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