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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43화 (43/150)

42화

구조대가 출발한 직후 나디아는 제 방에 틀어박혔다. 기사단장 게리 노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며 반드시 공작을 데리고 돌아오겠노라 약속해주었다. 그 옆을 지키는 기사단의 면면에서도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나디아는 그들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안나와 그렌트, 제이는 연신 나디아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은 듯 “각하는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죽여도 죽지 않을 분이세요.”, “금방 돌아오실 테니 제 말을 믿으세요. 숲은 그분의 놀이터나 다름없었어요.”라고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디아에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로 들렸다. 깊은 숲속에 있는, 암석이 높은 산. 흑곰 기사단의 산악 훈련에 대한 악명을 나디아도 들은 적이 있다. 루크에 대한 소문이 그렇듯 오해와 과장이 뒤섞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해도, 실종은 심각한 일이었다.

말에서 떨어지기만 해도 사람은 죽는다. 라 먼스트로드의 귀족들은 사냥과 승마를 즐겼는데, 그들의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 생활 중에도 사고가 나서 죽는 사람은 왕왕 나왔다. 그런데 폭우가 내리는 밤에, 숲에서 낙오되어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났고….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야수, 혹은 짐승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큰 키와 두꺼운 몸을 가진 튼튼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인간이었다.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어 죽을지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제발, 무사해줘요, 루크….’

눈시울이 붉어졌다. 금방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나디아는 울 수 없었다.

루크가 어떻게 되었다는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슬퍼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건네는 위로를 받으면서 철없이 울며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남겨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런 건 억누르려고 해도 의식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늪 같은 거였다.

겨우 진정한 부부가 된 참이었다. 나디아는 눈을 감고 루크를 떠올렸다.

루크는 자신을 마치 세상에 다시 없을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되는 듯 바라봤다.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줬다. 강한 팔에 매달려, 넓은 품에 꼭 안겨 있으면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한번, 또 한 번, 그리고 아쉬운 듯 다시 한번….

나디아는 루크가 보고 싶었다. 그가 떠나간 아침부터 지금까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혹시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루크가 사라져버리면, 그렇게 되면…. 나디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 안쪽이 시큰거리고 목구멍이 답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때였다.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커다랗고 건장한 사람의 무게감, 그리고 빨랐다. 나디아는 손바닥에서 얼굴을 들었다. 혹시, 설마. 기대감이 옅게 피어났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공작 부인의 방문을 노크 없이 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동시에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나디?.”

루크였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방으로 들이닥친 거구의 남자는, 틀림없이 자신의 남편이었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디아는 돌연 제 눈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이 환상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구조대가 출발 한지 고작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면 다짜고짜 문부터 열어젖힐 것이 아니라, 안나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부터 전달받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환상인 걸까?

‘진짜가 아니라…?’

나디아는 눈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분명 꿈속일 터인데, 그의 모습은 진짜 숲을 헤매다 온 사람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신발이며 여기저기 헤진 상의, 바지, 헝클어진 머리칼이며 흙먼지가 묻은 얼굴. 꿈속의 루크는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디아.”

“이거, 꿈 맞죠….”

꿈속의 루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치 진짜처럼 빗물 마른 냄새가 났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쥐었다. 온기….

“꿈이 아니오, 나디아.”

“…진짜…?”

나디아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몽롱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제 뺨을 덮은 루크의 손등을 매만졌다. 단단한 손등과 그 위로 만져지는 뼈, 긴 손가락. 나디아가 기억하는 모양, 온기, 그대로였다.

진짜였다.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었다. 나디아의 남편이었다.

“…미안하오. 놀랐지….”

루크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소식을 들었던 새벽부터 거의 해가 저물고 있는 이 시간까지? 나디아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고,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우윽, 흑, 우흑….”

굵은 눈물이 퐁퐁 솟았다. 흰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루크의 손가락에 닿았다. 나디아는 루크의 손을 꽉 잡았다.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어, 그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건 싫었다. 나디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루, 루크. 진짜, 루크…. 다, 다친 곳은.”

“없소. 멀쩡해. 어디도 다치지 않았고….”

“하지만 떨어졌다고?.”

“그런 걸로 다치지 않아.”

“봐, 봐요. 보여줘.”

루크가 조금 뒤로 떨어졌다. 나디아는 눈물을 닦아내고, 매섭게 눈을 치떴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또렷한 눈빛이었다.

흙이 묻어 더러운 꼴이기는 했지만 장담처럼 루크는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디아의 눈에는 이전보다 여위고, 고생한 듯 초췌해 보였지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디아가 안심한 듯 길고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자 루크가 그대로 안기라는 듯 팔을 들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넘어가 주지 않았다.

“뒤돌아봐요.”

“으응? 나디아, 보다시피 난….”

“뒤.”

“…….”

루크는 뭉그적뭉그적 천천히 뒤를 돌았다. 등판이 썩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루크가 완전히 뒤를 돌자 나디아가 헉, 크게 숨을 삼켰다.

‘그래 봐야 긁힌 상처뿐인데….’

나디아에게 이 상처가 났다면 한 달 열흘은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겠지만, 루크에게 이 정도는 스친 흔적에 불과했다. 약간 따끔거릴 뿐,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나을 것이었다.

그러나 루크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나디아는 평생 넘어져 다친 상처밖에 본 적이 없는, 곱게 자란 아가씨이며, 현재 그의 상처가 넓은 등판에 가득해 겉보기에는 꽤 심각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처럼 긁힌 상처뿐이었지만 찢어진 셔츠자락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그게 빗물에 젖어 넓게 퍼지는 바람에 더 심해 보였다.

나디아는 말이 없었다. 루크는 뒤를 돌아선 채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열어젖힌 문으로 안나가 들어섰다. 안나는 뒤를 돌아서서 난감해하는 루크와 상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나디아를 확인하고는, 비릿한 비웃음을 날린 채 도로 나갔다.

“나디아? 정말 아프지 않소.”

“…….”

“그건 말이지, 신입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 보호하느라, 그래! 하버 경을 보호하려다 생긴 상처요. 그나마도 금방 나을 테고….”

“…….”

“사람 생명을 구하고 이 정도 상처이니, 이득….”

“이득이요…?”

“…….”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루크의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돋았다.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단번에 알았다.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사람을 구했다고,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산악 훈련 도중 낙오되기는 했지만 루크에게는 그저 귀환이 늦어졌다는 인식뿐이었다. 돌아가는 게 늦어져 나디아가 걱정하겠구나,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보다는 사람을 구하는 선행을 보였으니 나디아에게 칭찬받을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나디아의 얼굴을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디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그를 보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사람처럼, 아니,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눈앞에 나타난 그를 보고도 꿈이라도 꾸는 양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박거렸다.

나디아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었는지 깨닫자 루크는 숨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가 로렌스 하버에게 구구절절 그녀의 찬양을 읊는 동안, 정작 나디아는 울지도 못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나가 왜 제이를 시켜 자신을 때리게 했는지 알았다. 안나가 왜 그를 못난 사람처럼 노려봤는지, 그리고 기사단과 게리 노스가 왜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는지.

땀이 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크는,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누군가가 자신을 이토록 걱정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부는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안나와 그렌트는 그를 아껴주긴 했지만 선이 명확했다. 손자 같다고 해도 진짜 손자인 건 아니다. 루크는 그들에게 의지가 되는 윗사람이지, 걱정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루크는 누군가에게 걱정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걱정하느니 길거리 강아지를 걱정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었다.

이번 일도 나디아에게 전달이 되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로 지나가고 말 터였다. 훈련에서 돌아오던 중 낙오자가 발생했고, 그들을 데리러 가느라 쓸데없는 시간을 썼다. 딱 그 정도로 정리될 일이었는데.

“훈련이 힘, 힘들었던 모양인지 그 녀석이 떨어지지 뭐요. 그래서 내가 딱, 붙잡았는데.”

“…….”

“그, 그렇게 높지도 않았고, 괜찮을 것 같았고….”

“…….”

“…나디아….”

나디아는 그의 등 위에 닿을 듯, 그러나 닿지 않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녀가 닿을 듯 말 듯 상처 위를 스치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디아가 또 울고 있는 것 같아서 루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위험한 사람을 구하신 건, 잘하셨는데….”

“그, 그렇지?!”

“……그렇다고, 그걸, 저는, 칭찬은 못 해드려요….”

나디아가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루크가 뒤를 돌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 얼마나, 얼마나 걱정….”

“미안! 잘못, 잘못했소!”

“얼마나 걱정했는데,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후두둑 흘러내렸다. 루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어쩔 줄 몰랐다.

“약속하겠소. 두 번 다시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소. 어디서든 일단 내 목숨이 먼저고, 안전이 먼저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뱉고 봤다. 그러고 있을 때 안나와 그렌트가 공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나는 나디아를 달래기 위해서였고, 그렌트는 가벼운 상처를 입은 루크를 치료해주기 위해서였다. 막 성으로 돌아온 참이니 씻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루크는 나디아를 끌어안아 달래며 그들에게 필사적으로 구조 요청을 보냈다. 그는 숲에서 조난당한 것보다 지금 이 위기가 더 힘겨웠다.

‘빨리, 나디아 좀, 어떻게든….’

루크가 입을 벙긋거렸다.

“…….”

“…….”

안나와 그렌트는 나란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넓은 공작 부인의 방에서 홀로 조난을 당한 공작을 내버려 둔 채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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