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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42화 (42/150)

41화

기꺼이 게리 노스의 일격을 허용한 주제에 부인 앞에서 ‘괜찮다’고 다독이던 그 얼굴이란! 게다가 루크는 상처를 숨기기는커녕 그녀가 자세히 볼 수 있게 벌겋게 달아오른 팔뚝을 내밀어놓기까지 했다. 게리 노스는 그날 밤 술을 마시며 공작 부인이 자신을 얼마나 차갑게 노려봤는지 아냐고 울며 하소연을 했었다.

‘어?’

사박사박 가벼운 발소리로 공작 부인이 게리 노스에게 다가갔다. 다소 창백한 낯빛이었으나 그녀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감정 한 톨 보이지 않아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이었고,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고작 빨갛게 달아오른 상처를 보고도 울 것처럼 안타까워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게 무척 의외였고 놀라웠다. 사실 나디아도 루크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다면 루크의 실종이 그녀에게는….

나디아가 말했다.

“노스 경.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남편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마십시오, 부인! 제가 반드시! 각하를! 무사히! 모시고 오겠습니다!”

게리 노스의 이상한 행태를 의아하게 여겼던 흑곰 기사단은 그제야 납득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게리 노스는 거추장스러운 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리 노스는 늠름하게 말 안장 위에 올라탔다. 마치 동화 속 영웅이라도 된 듯 씩씩한 기세였다.

“구조대분들, 전부, 무사히 다녀오세요.”

나디아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중견 기사는 그제야 그녀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애써 의연한 척 스스로를 다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단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책임감으로 불안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거였다.

불안해할 상황이 아닌데. 낙오자들은 물론이고 구조대도 위험하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나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녹색 눈동자를 굳게 빛내는 나디아를 보고 있노라니…….

‘이게 뭐지. 아, 뭔가, 뭔가….’

나디아가 자신들을 의지해주고 있다, 희망을 걸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게리 노스가 이미 감화되었듯이, 구조대 모두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루크와 로렌스를 잡아다 나디아의 앞에 갖다 바치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멀쩡할 게 분명한 야수 공작을 이렇게도 걱정해주시다니.’

나디아의 마음고생이 손에 잡힐 듯 보여서 안타까웠다. 체력이 다한 로렌스를 챙기지 못해 미안한 마음, 신입을 구해준 루크의 헌신, 비 오는 숲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야 했을 그들에 대한 동정이 단 한 순간에 깡그리 날아갔다. 이럴 거면 제 본색을 솔직하게 보여주어 걱정이라도 하지 않게 했어야 했다.

구조대의 마음속에는 괜히 나디아를 걱정시킨 루크와 로렌스에 대한 원망만이 남았다.

구조대가 떠난 자리, 나디아는 그들의 빈자리를 한참이나 지켰다.

*

선발대는 말을 타고 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와 로렌스를 발견했다. 암석 아래로 떨어져 닦아놓은 길에서는 떨어졌지만, 루크와 로렌스는 정확한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덕분이다. 한두 번 다닌 숲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노릇이었다. 스테이턴 성 인근 숲은 루크에게 있어 집 앞마당과도 같았다.

“내 말은?”

“…일단 무사하시냐는 제 질문부터 듣고 물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이는 다짜고짜 제 말을 내놓으라 말하는 루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멀쩡할 줄 알았지만! 알긴 했지만….’

로렌스는 선발대 중 자신과 친한 기사에게 매달려 거의 울고 있었다. 죄송하다, 두 번 다시는 방심하지 않겠다, 살려달라고 횡설수설했다. 모르긴 몰라도 무척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깨끗한 물과 혹시 몰라 준비한 약을 먹였다. 숲에는 독초가 많이 있었고, 평소라면 몰라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반면 루크는 태연하다 못해 개운한 얼굴이었다. 물론 숲속에서 며칠을 보냈으므로 더러운 몰골이긴 했다. 셔츠가 다 찢어져 등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자잘한 생채기도 나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하루를 꼬박 굶은 주제에 여전히 힘이 넘쳤다.

‘그래, 내가 뭘 바란 건지.’

루크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그게 더 놀라울 일이었다. 제이가 말했다.

“이 아래에 말을 묶어 놨습니다. 곧 본대가 올 예정이고, 저희는 선발대로 먼저 온…. 어디 가십니까, 각하!”

“먼저 돌아간다.”

“아니, 잠깐만요! 각하!”

“왜.”

루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쓸데없는 용건으로 자신을 붙잡은 것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눈길이었다.

제이는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각오를 다졌다.

“공작 부인께서?.”

“나디아가?!”

루크가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제이는 일부러 말을 끌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크는 머릿속이 나디아로 꽉 찬 모양인지 제이가 수상쩍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제이는 루크가 완전히 가까이 다가온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턱 아래로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는 났지만 루크는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올렸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은 밀려날 줄 알았던 제이는 살벌한 루크의 눈을 지척에서 마주해야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이는 주먹을 슬그머니 떼어냈다. 루크는 도망치려는 제이의 손목을 콱 붙잡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나의 사주인가 보군.”

“정확, 하십니다….”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예, 예?”

“하던 말이나 계속해봐라. 나디아가 뭘 어쨌는데.”

“…화 안 내십니까?”

“간지럽지도 않았다.”

제이는 안도와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나름 전력을 다한 주먹이었는데도 루크는 마치 벌레에게 물린 양 취급했다.

“역시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 혹시 울었나?”

“뻔히 아시는 분이 이런 일을 벌이십니까.”

“저놈 때문이다. 난 저놈을 구했을 뿐이야.”

“각하께서는 이 영지의 영주이십니다. 흑곰 기사단은 각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좀 들으십쇼!”

“잔소리는 성에 가서 듣겠다.”

“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실 거면서?.”

루크는 그나마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는 제이를 내버려 두고 선발대가 왔던 방향으로 뛰듯이 걸었다. 선발대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모두 무시했다.

“각하! 곧 구조대가 옵니다! 기다렸다가 함께 가야, 각하!”

“말을 내놔라!”

저 성질머리를 누가 말리겠는가. 제이는 힘이 넘치다 못해 신이 난 것 같은 루크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로렌스를 살려만 두고 먼저 뛰어서 귀환하지 않은 게 기특했다. 루크는 순식간에 기사에게서 말을 빼앗아 안장 위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탑승에 말이 울며 펄쩍 뛰어올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먼저 간다, 천천히 따라와!”

“각하!!”

루크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나디아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이는 나디아의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루크의 머릿속에서 ‘울며 걱정하고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안나가 잘 안심시켜줬겠지만…….’

안나와 그렌트, 제이는 알고 있다. 루크에게 산악 훈련은 가벼운 몸풀기나 산책과 같으며, 훈련이 이루어지는 숲은 그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장소라는 것을.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산악 훈련에 참가해왔고, 이보다 더한 위기 상황에서도 큰 부상 없이 무사했다. 그러니 그들이 잘 말해주었다면 나디아도 그가 무사할 것이라는 걸 알 터였다.

하지만 알게 된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얼른 돌아가 나디아를 안심시키고 그녀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내내 곱씹었더니 더 보고 싶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보지 못하면 갈증이 나서 죽을지도 몰랐다.

돌아가 나디아를 만나고, 끌어안고, 키스하며, 사람을 구한 선행을 칭찬받고 싶었다.

루크는 로렌스 하버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없는 선발대를 뒤에 두고, 스테이턴 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도중에 구조대를 만나 말을 갈아탔다. 게리 노스를 비롯한 구조대는 할 말이 많은 듯 원망스럽게 루크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불량한 기사단을 혼내줄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훈련 때 꺼내보면 될 일이었다. 하나씩 훈련 시켜주다 보면 눈빛이야 저절로 순해지고, 뭐 그런 거였다.

물 한 잔, 혹은 육포라도 한 조각 먹고 가라는 만류는 당연히 듣지 않았다. 도보로야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빠른 말의 다리로는 시간이 크게 단축된다.

굳게 닫힌 성문에 대고 루크가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귀환을 알려라!”

조용히 들어가 나디아의 얼굴부터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발보다 말이 빠를 것이다. 자신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들으면 나디아의 걱정도 그만큼 덜어지리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실 성 밖 사람들은 스테이턴 공작의 실종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귀환을 알리라는 명령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크는 성문이 열리자마자 또 냉큼 말을 타고 달려갔다.

“나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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