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듣고 있나, 하버 경.”
“예, 예에….”
로렌스 하버는 땀을 뻘뻘 흘렸다. 폭우가 내렸던 게 거짓말처럼 쨍쨍한 햇살이 공기를 뜨겁게 데웠다. 습기가 많고 더운 숲에서,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걷는 것은 퍽 힘겨운 일이었다. 하루를 기절해 있었다고 해도 아직 체력은 다 회복되지 않았고, 동행하는 사람이 영지에서 가장 높은 대귀족이었다. 로렌스 하버에게는 여러모로 힘겨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현재 로렌스 하버를 괴롭히는 것은 더위도, 체력도, 아픈 발목도 아니었다.
“그때 나디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지. 겁도 많으면서 아픈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의무와 친절로….”
“그러셨군요….”
“그녀의 뒤로는 햇살이 비치고 있었어. 금발은 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그녀를 만나고야 깨달았다네. 마치 후광 같았지….”
“그러셨겠네요….”
“과자도 얼마나 잘 만드는지. 나디아가 만든 브라우니를 자네도 먹어봤어야 하는데. 이건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
“그거참… 아쉽습니다….”
헉, 헉. 로렌스는 벅찬 숨을 헐떡이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실 그는 루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루크도 묵묵하게 발을 움직이며 반쯤 흘리듯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잘한 상처가 난 넓은 등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보아 힘들지 않은 건 아닐 텐데, 그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각하의 체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더니.’
새벽 훈련에 부지런히 참가하기는 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체력을 실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기사를 몇 명이나 쓰러뜨리고서도 식전 운동이나 한 듯 멀쩡한 걸 보아 ‘강하시구나’했을 뿐, 딱히 인간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저건 괴물 그 자체였다.
습기로 가득 찬 무더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 로렌스 하버는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루크는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제기랄, 말을 할수록 더 보고 싶어지니 죽겠군.”
게다가 입을 열면 튀어나오는 말은 죄다, 천사처럼 아름답고 착하고 귀여운 부인을 향한 사랑의 찬사였다. 루크의 말만 들어보면 나디아는 인간계에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천사 그 자체였으니까.
루크는 홀린 듯이 중얼거리다가도 중간중간 말을 멈추었는데, 로렌스 하버가 감히 짐작해보기로 아마 공작 부부의 사적인 시간에 대해 말하려다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루크의 찬사는 같은 말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는데, 만약 로렌스 하버가 제정신이었다면 이 역시 꽤나 고역이었을 것이다.
“허억, 헉…. 아직 멀, 멀었습니까…?”
“체력을 길러야겠어, 하버 경. 거의 다 왔다.”
“그 말씀을, 헉, 한 시간 전에도….”
“겨우 3시간 걸었다고 엄살 부리지 마라.”
따지자면 이게 다 네 탓이 아니냐고, 루크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 맞기도 해서 로렌스 하버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루크를 지배하고 있는 건 더위와 피로로 인한 불쾌지수가 아니라 나디아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역시 산악 훈련 따위 취소해버려야 했는데.’
나디아가 지쳐 잠들어버린 후 루크는 수백 번 고민을 거듭했다. 산악 훈련은 미리 잡혀 있던 일정이었지만, 고집을 부리자면 취소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취소를 하지 않고 게리 노스만 보내어도 괜찮았다. 그러나 루크는 단 한 번도 산악 훈련에 빠져본 적이 없었고, 그가 부인에게 빠져 게을러졌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나디아가 곤란해질까 걱정되어 억지로, 정말 억지로, 힘겹게 일어난 것이었다.
나디아의 피부는 매끄럽고 촉촉했으며 그의 손에 감기듯 착 달라붙었다. 그저 쓰다듬는 것만으로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를 수 있을 정도였다. 평생 나디아를 쓰다듬기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크와 나디아의 체력은 비교할 수도 없었다. 나디아는 진작 지쳐 쓰러졌지만 루크는 아쉬움에 그녀를 달래고 얼러 몇 번이나 안았다. 그녀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한 후에는 혼자 몇 번 빼기도 했다.
“루크…. 가려고요…?”
약간 갈라진 목소리, 키스로 탱탱하게 부푼 입술, 눈물이 묻은 붉어진 눈가…. 입술을 찾아 키스하자, 나디아는 축 늘어진 팔을 들어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잘, 다녀와요.”
“금방 올게.”
정말 금방 돌아가려고 했다. 처음이라 힘들었을 그녀가 몸을 회복하고 쉴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서 잠들었다가는, 또 괴롭히고 말 것 같아서. 그러나 이렇게 일정이 어그러질 줄 알았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디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또 꼿꼿하게 고개를 들려는 아랫도리를 무시하고, 루크는 속도를 높였다. 로렌스 하버는 제 아랫도리 사정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겠지만, 부인을 떠올리며 숲속에서 아랫도리를 세웠다는 게 딱히 자랑스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제이, 게리는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진작 성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복귀하자마자 말을 끌고서 찾으러 와야 할 것이 아닌가? 굼벵이 기어가듯 걷는 부상자도 데려가 주고 말이다.
하지만 루크 혼자였다면 빠르게 달리기라도 했겠지만 로렌스 하버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건 무리였다. 반나절이면 충분했을 거리였는데? 이 속도로는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하버 경, 듣고 있나?”
“헉, 네, 듣고….”
“나디아는 안 예쁜 구석이 없어. 손톱까지 예쁘지….”
“그러시구나…….”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돌려주는 장단에 맞추어 루크는 나디아의 장점을 열거했다. 머리칼, 눈동자, 섬세한 이목구비, 부드러운 귓불, 둥근 손톱, 가느다란 손가락, 팔목, 사슴처럼 긴 목…. 몇 날 며칠이라도 말할 수 있었다.
죽을 것 같은 목소리라도 대답을 하는 걸 보면 살아는 있는 것이다.
루크는 로렌스 하버의 영혼 없는 생존 신고를 흘려들으며 빠르게 걸었다.
*
조난, 혹은 실종이라고 말은 했지만 구조대의 마음가짐은 가벼웠다. 구조라는 단어는 과분했다. 낙오자를 주우러 가는 것뿐이었다. 신입 혼자 낙오되었다면 조금쯤 걱정했을지 모르겠지만 로렌스 하버는 루크와 함께 있었다. 루크가 로렌스를 죽게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었으므로 적어도 목숨 하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야수 공작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불쌍하다면 불쌍했다.
“그런데 단장…. 왜 이렇게 비장하죠?”
“쉿!”
단장 게리 노스에게 말을 걸었던 기사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게리 노스는 낙오자를 주우러 가는 게 아니라, 필패가 정해진 전장에 출전하는 전사처럼 비장했다. 아무리 봐도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게리 노스의 기세만 보아서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 같았다.
정작 싸움터에서는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이었다. 흑곰 기사단의 중견 기사는 게리 노스가 무장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다른 때라면 낙오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어떻게 놀려줄까, 단순한 머리를 굴려 골몰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갑옷은 왜 챙겨 입었으며, 검은 왜 차고 있단 말인가? 그들은 누군가를 무찌르러 가는 게 아니라 낙오자를 주우러 가는 것뿐이었다.
로렌스 하버를 위한 1인 의료물품을 챙긴 구조대가 말에 올랐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되는데, 게리 노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빨리 안 가면 그 성질머리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어차피 제일 괴로워질 사람은 기사단장 게리 노스였다. 그때 구조대 가까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중견 기사는 그들이 누군지 금방 알아보았다. 연무장에 찾아와 지옥 같은 새벽 훈련을 끝내준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야수 공작이 냉큼 가검을 집어던지고 피해자인 척 내숭을 떠는 꼴을, 그는 똑똑하게 기억했다.
‘아, 맞다. 부인께서는 걱정하시겠지.’
단순 낙오가 실종, 조난이라고 부풀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빠르게 이해했다. 폭우가 내리는 숲에 부상자와 함께 떨어져 하루 넘게 찾을 수 없었으니 모양새 자체는 조난, 실종이라고 해야 했다. 실상이 어떻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 것이었다.
공작 부인은 야수 공작에 대한 소문을 일절 믿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녀 자신이 들은 소문이 훨씬 흉흉할 터인데도 그녀는 마치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은 듯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작은 다정하다’, ‘상냥하다’, ‘무서운 얼굴 때문에 오해를 사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히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탓이었다. 나디아가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녀 앞에서는 그가 가증스럽고 뻔뻔하게도 내숭을 떨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디아 앞에서는 양순하게 굴었으니 그녀가 착각하는 건 당연했다.
다정, 하지. 나디아에게는 그랬다.
상냥……. 하기도 했다. 나디아 앞에서는 누구에게든 퍽 상냥하게 굴었으니까.
무서운 얼굴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동안 겉과 속이 같다는 오해를 샀다.
낯선 미남자가 된 야수 공작이 가증스러웠지만, 제 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꼴은 재미있었다. 부인 앞에서 안면 근육이 풀어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보고 있노라면 기사단은 사랑의 위대함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