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신입을 놀려주기 위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선배들의 말이 모두 진실이었을 줄이야. 로렌스는 이 무시무시한 훈련에 어린 시절부터 참여했다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공작도, 또 어린 손자를 지옥에 밀어 넣었던 선대 스테이턴 공작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 딱 죽을 것 같을 때 훈련이 취소되었다. 예정보다 딱 하루 줄어들었을 뿐이지만 로렌스에게는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은 구원이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닷새째가 되는 밤, 스테이턴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훈련이 진행되는 숲에서 성으로 돌아가는 데만도 한참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발해도 밤이 되어야 도착할 거리였다. 물론 도보였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밤에 출발했으므로 닷새째가 되는 아침에는 도착할 예정이었다.
로렌스는 방심했다. 훈련 취소가 너무 기뻐 이르게 안심하고 만 것이다. 긴장이 풀어진 몸은 더 빠르게 지쳤다. 마침 폭우도 내려 온몸을 따갑게 때렸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다리에서 힘이 풀려서? 가파른 암석지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 당황한 선배들이 손을 뻗었지만, 로렌스는 그들에게 도움을 구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서 죽는구나.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데 내가 최초의 사망자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할 때였다.
“제기랄, 로렌스 하버!”
우뢰와 같이 커다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로렌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의 고함이라기보다는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노성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것이었다.
“계속 가라! 가서?, 제기랄!”
“각하!”
루크는 커다란 몸을 날려 로렌스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한발 늦었다. 두 사람은 한 데 엉켜 암석지대 아래로 데굴데굴 굴렀다. 비록 신입이라도 공작을 지키는 기사인데, 꼴사납게도 로렌스는 어린아이처럼 루크에게 안겨 보호를 받았다.
“슬슬 움직여도 되겠지. 하루 꼬박 기다려줬으면 충분하리라 믿는다.”
“넵!”
루크는 로렌스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썩 믿음직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더 기대하기도 무리였다. 그가 뒤를 돌자, 암석 위를 무식하게 몸으로 비비며 내려온 탓에 상처투성이가 된 등이 훤히 드러났다. 로렌스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어두워졌다.
귀환을 결정한 것이 나흘째 밤, 그리고 지금은 엿새째 아침이었다. 로렌스가 하루 꼬박 기절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루크에게는 스테이턴 영지에 속한 것이라면 풀 한 포기, 흙 한 줌이라도 소중했다. 모두 제 것이었다. 조부가 물려준,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 덜떨어진 신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했지만, 나디아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짜증은 없앨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파들거리며 겨우 선 신입 기사를 보며 루크가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였던 동안 그의 머릿속은 온통 나디아밖에 없었다. 그녀가 울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여린데 기절이라도 했으면….
울고 있는 나디아의 얼굴을 상상할 때마다 기절한 신입 기사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루크는 잘 참아냈다.
‘그래도 이 녀석을 구해준 걸 알면 칭찬해주겠지!’
걱정을 끼치게 되긴 했지만, 사고의 이유는 선행이었다. 무려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다.
루크는 성이 있는 방향을 보며 눈을 빛냈다.
*
구조대는 순식간에 꾸려졌다. 안나와 그렌트, 게리와 제이의 지휘 아래 기사단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체력이 약한 기사는 일찌감치 솎아냈고, 근무 일정 탓에 훈련에서 제외되었던 기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산악 지대에서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발 빠른 자들이 우선되었다.
산악 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제이드 앨런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훑었다. 게리 노스는 당연히 구조대에 투입되었다. 루크 다음가는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였으니 움직이는 데 문제도 없었고, 책임감 때문으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제이도 구조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스테이턴 성은 그렌트와 안나에게 맡겨두어도 충분했다. 아직 사람들은 공작의 실종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안나와 그렌트는 아랫사람들의 입을 무섭게 단속했으며, 쓸데없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했다.
현재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에게는 후계자가 없다. 손이 귀한 스테이턴 가문은 그 흔한 방계 혈족도 없어서, 만약 현재 루크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작위는 거의 연관이 없는 엉뚱한 가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스테이턴 가문의 지배에 만족하고 있는 영지민들에게는 그것 하나가 불안이었다.
다행히 젊은 스테이턴 공작은 야수 공작이라 불릴 정도로 지나치게 건강한 사람이었으니,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으로 불안을 조장할 필요는 없었다.
“제이드 앨런, 채비는 끝났나요?”
“예. 다리가 빠른 자들을 먼저 보내고 그 뒤를 쫓아갈 예정입니다. 암석지대 아래로 떨어졌으니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의료물품과 약, 식량과 물도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순조롭군요. 구조 물품은?.”
“당연히 신입 새끼, 아니, 신입 놈, 아니….”
“1인분만 챙겼다고요.”
“예.”
2인분까지는 필요도 없었다. 안나도, 제이도 루크가 부상을 당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폭우에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부상씩이나 입어줄 사람이었다면, 안나는 어린 시절의 그를 조금은 사랑스럽게 여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단 한 번도 그의 조부를 비롯한 어린 시절 보호자들의 기대, 혹은 우려대로 행동해준 적이 없었다.
차라리 걱정을 하고 싶던 순간에도 모든 기대를 정면에서 깨부수던 사람이다.
“부인께서는 어떠십니까?”
제이가 물었다. 채비를 마무리하는 기사들을 보던 안나의 주름진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제이가 울상을 지었다.
“많이 울고 계십니까?”
“…아니요.”
“설마 기절하신 건 아니죠…?”
제이는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신입을 구하느라 낙오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루크가 무슨 생각만 하고 있을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디아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혹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지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그녀가 슬퍼 울었다면, 그것이 제 탓이라고 해도 달래주지 않았던 측근들을 괴롭힐 게 틀림없었다.
‘자기 탓이면서….’
측근들이라고 해도 루크가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기사단에서는 게리, 사무원 중에서는 제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어서 대하기 어려운 안나, 그렌트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제이에게는 무사할 게 뻔한 루크의 안위나, 루크가 함께 있는 이상 멀쩡할 수밖에 없는 신입 기사의 상황보다 나디아의 상황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와 같으십니다.”
“네…?”
“식사도 평소 드시던 만큼 드셨고, 울지도 않으세요. 기절은커녕….”
소식을 듣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창백한 안색이 거짓말 같았다. 채 숨기지 못한 떨리는 손을 보았던 안나는 그녀가 완벽히 괜찮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의외였다.
‘부부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어.’
나디아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의연했다. 부끄러워하거나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와 하녀들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고, 다정하게 웃어 주기도 했다.
지극히 모범적인 행동이었지만 결코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나디아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 걸기를 어려워했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해 한 달을 불편한 상황을 참아 넘기기까지 했다. 친해지고 나면 말이 많지만, 그전까지는 사교성이 좋다고 할 수가 없는 성격인 것이다.
대귀족으로서는 어울리지만,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답지는 않았다.
안나와 그렌트, 게리가 나디아를 안심시키려고 담담한 태도를 취한 것처럼 나디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어리게만 보았던 안나와 그렌트는 그것이 무척 의외였다.
‘기사단장 앞이라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그러는 줄 알았더니.’
게리를 배려해 의연하게 구는 줄 알았는데, 나디아의 태도는 모두 물러간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안나가 혹시 몰라 단둘이 되어 괜찮으냐 물었지만, 나디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안나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저도 루크를 믿어요.”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쯤 되니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못할 만큼 크게 동요했다는 소리일 테니까.
“멍청한 도련님 같으니라고….”
“안나, 소리 내서 말씀하셨어요.”
“…그랬나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무표정으로 안나가 코웃음을 쳤다.
“예….”
제이는 조금 주눅이 들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문관이자 무관으로, 기사이자 보좌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게리와 루크에 비하면야 체력과 근력, 지구력 모두 부족하지만 ‘일반 인류’에 비하면야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발이 빠른 편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선발대에 합류하기 위해 안나에게 목례를 전했다. 나디아는 선발대가 떠나는 걸 아직 몰랐다. 본래 구조대가 출발할 때 전송을 할 예정이었다. 안나는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면 나디아의 채비를 도와주어야 했다.
“제이.”
두어 걸음 떼었던 제이가 안나를 돌아보았다.
“상처가 있을 거예요.”
“…예?”
“제아무리 곰 같은 각하라고 해도 산악 훈련에 다친 신입과 조난까지 당했는데 상처가 아주 없지는 않으시겠죠.”
“……?”
의료물품을 더 챙기라는 뜻인가? 안나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리는 제이를, 안나는 서늘하게 쳐다보았다.
“없으면 만들어 드리고요.”
“아.”
“업무를 보시는 데에는 팔다리, 눈만 멀쩡하면 문제없겠죠.”
말을 마친 안나는 제이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제이와 선발대는 씩씩하게 숲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