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7. 조난과 실종
“큰일은 아닙니다.”
안나가 힘을 주어 말했다. 단단한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나디아는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맞잡았다. 동요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지만, 하얗게 질린 낯빛만 보아도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는 건 쉬웠다.
‘새신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아니었는데….’
결혼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편의 실종 소식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안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나디아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고개를 들기 무섭게 평소와 같이 차가워 보이는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하는 사람을 더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흑곰 기사단의 산악 훈련은 강도가 높고 힘들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중견 기사도 버텨내기 힘들며, 신입은 종종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헛소문까지 따라다녔다. 이 소문은 수도 라 먼스트로드에도 퍽 유명했는데, 나디아는 스테이턴 공작과의 결혼이 정해진 뒤 얼핏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들었던 소문과 달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명과 달리 산악 훈련을 받는 도중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비록 토악질을 하거나 거의 시체가 되어 돌아오기는 해도, 어쨌든 목숨은 다 붙어서 귀환했다. 흑곰 기사단을 따라다니는 악명은 거의 태자 레너드를 수행하러 온 황궁 친위대가 호기롭게 산악 훈련에 따라갔다가 퍼뜨린, 아주 고의적이고 유치한 보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조부의 강제로 산악 훈련에 참여했던 루크는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괜히 그의 별명이 야수, 혹은 괴물인 게 아니었다. 기사단장 게리 노스조차 루크의 끝을 알 수 없는 체력에는 혀를 내둘렀다. 제아무리 강인한 기사라도 녹초가 될 수밖에 없는 훈련을 마치고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홀로 간단한 산책이라도 한 양 태연한 낯짝이었다.
‘만약의 사태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런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을 알고 있었으므로 최측근들은 오히려 실종 사고를 별반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기사단장, 보고를.”
“…예. 아시다시피 이틀 전 폭우가 내린 탓에 훈련 중단을 결정했습니다만?.”
게리 노스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꼬박 엿새를 숲에서 헤매었으므로 멀끔한 모습인 게 이상할 것이다. 가죽 갑옷 아래에 받쳐입은 셔츠는 군데군데 찢어진데다 피가 묻어있었고, 신발과 바지에도 진흙이 묻고 구멍이 나 있었다. 그는 폭우라는 말을 듣자 어깨를 파드득 떠는 나디아의 눈치를 살폈다.
계절은 초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기 스테이턴 영지에는 폭우가 자주 내렸다. 살갗을 뚫을 듯이 한바탕 비가 쏟아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는 날이 많았다. 산악 훈련을 잡았을 때 이러한 상황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폭우 따위는 고려할 요소조차 아니었으며, 사실 위험할 것 같다는 상식적인 이유로 훈련이 중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폭우가 두 번 쏟아지자 훈련 중단을 결정했다. 누가 봐도 일찍 돌아가고 싶은 핑계였다.
예정대로라면 루크를 비롯한 흑곰 기사단은 이틀 전, 혹은 어제 귀환하였을 것이다.
“올 초에 입단한 신입이 발을 헛디뎌 암석 밑으로 떨어졌고, 각하께서는 그를 구하려다 그만….”
“…….”
“하지만 틀림없이 무사하십니다. 산악 훈련이 진행된 장소를 누구보다 자세히 파악하고 계시고, 폭우도 멈추었으니….”
게리 노스의 목소리가 나디아의 귓가에서 멀게 흩어졌다. 루크의 실종 소식을 들은 후부터 넋이 반쯤 나가있던 나디아의 입술 사이로 얇고 긴 숨이 흘러나왔다. 안나와 게리, 그렌트는 하나같이 루크의 무사를 확신했다.
‘내가 이러면 안 돼.’
정신을 차려야 했다. 루크가 사라졌으므로 스테이턴 성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구조는….”
“물론 당장 구조대를 꾸릴 겁니다. 귀환 도중에는 밤이었고, 폭우가 심해 당장 구하러 갈 수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사실 폭우는 핑계였다. 루크라면 다리가 풀린 신입을 둘러메고라도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혈단신으로 폭우가 내리는 숲이 아니라 사막 한가운데에 던져놓더라도 생채기 하나 없이 살아 돌아올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우선 귀환을 결정한 것이었다.
폭우가 내리는 숲은 빛 한 점 없이 어둡고 위험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기사단 전체의 목숨이 위험했다. 게리 노스는 “먼저 가라”는 루크의 마지막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미 돌아와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게리 노스는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훈련을 떠날 때부터 가기 싫다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을 사람이 넋을 놓고 있거나 딴생각을 자주 했다. 정상적인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
훈련 중단을 결정했을 때에는 게리 노스마저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 미쳤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제발 돌아가자 애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던 주제에 스테이턴 성에 꿀이라도 숨겨놓은 양 빨리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 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낯설고 이상했다.
사고는 신입의 실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루크의 집중력 부족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디아는 루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스테이턴 영지에 속한 건 풀뿌리 하나라도 아까워하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나디아에게는 주군을 버리고 제 목숨부터 챙긴 무책임한 기사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게리 노스에게는 퍽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는 나디아의 비난을 각오하고 있었다.
게리 노스의 주군은 루크이지만, 그는 평범한 귀족이라기에는 여러모로 규격 외였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그것도 수도 라 먼스트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 귀족들의 푸른 피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을 행태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하얗게 질린 나디아의 모습이 안쓰럽고 괜히 미안해, 가시 돋친 비난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자신이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 시체보다 더 창백해져서는…….
게리는 나디아가 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우니를 맛있게 먹어주어 고맙다고 말하며 우는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박혀 있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잠깐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이내 들었다.
“구조대의 인원은요? 언제 출발할 수 있나요?”
“빠른 수색을 위해 기사단 전원이 재정비만 마치면 출발할 예정입니다. 빠르면 오늘 오후에라도….”
“제가….”
나디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가 따라가는 건, 민폐겠지요?”
“…비가 그쳤다고 해도 진흙이 많아 땅이 무릅니다.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숲에 들어갔다가는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나디아는 깨끗하게 포기하고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리는 비장하기까지 한 그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눈만 껌벅거렸다. 나디아의 눈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커다란 녹색 눈동자는 단단하게 빛났다. 그녀가 말했다.
“노스 경, 루크…… 스테이턴 공작을, 꼭 찾아주세요.”
“……물론입니다! 반드시, 목숨을 바쳐서라도?.”
루크가 위험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비장한 나디아에게 휩쓸려 게리 노스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안나와 그렌트는 흐뭇한 눈길로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똑바로 서라.”
“죄, 죄송합니다!”
신입 기사, 로렌스 하버가 억지로 발을 땅에 디뎠다. 발목을 가볍게 삐어 통증이 올라왔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독한 강도로 이어지는 산악 훈련은 로렌스에게는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괴물 같은 사람들.’
로렌스에게는 기사단원 전원이 같은 인종이 아닌 것 같았다. 틀림없이 이종족이나 몬스터의 피가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와 같은 피와 살과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이 저토록 비상식적일 리가 없었다.
선배들은 버릇처럼 앓는 소리를 해댔지만 입과 달리 몸은 가볍게 움직였다. 앓는 소리도 들어줄 사람, 게리 노스 단장이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공작이 있을 때에만 했다. 그들이 듣지 않을 때에는 굳게 입을 다물고 훈련에 임했다.
로렌스는 자신도 흑곰 기사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훈련 이틀째에만 해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사흘, 나흘째로 이어지며 그의 자부심과 자긍심은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폐가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럽고 전신의 근육이 파들거리며 비명을 지르는데 자부심 같은 것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정신력으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은 다 개헛소리였다. 정신력은 근력이나 체력으로 바뀌어주지 않았고, 그저 죽지 않게 버티게 해주는 게 다였다.
로렌스에게는 선배들은 물론이오, 게리 노스 단장과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진정 괴물, 혹은 악마로 보였다. 저런 것들과 내가 같은 인간일 리 없어. 충성심과 존경심보다 본능적인 부정이 먼저였다.
고작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강도가 높아 봐야 뭐 얼마나 높겠느냐고. 스테이턴 성 인근 주민들은 모두가 알고 있듯,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어렸을 때부터 이 훈련에 참가했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자신도 당연히 이겨낼 수 있다. 신입의 자신만만한 포부를 듣고서 선배들은 하나같이,
“바로 그 일 때문에 태자의 친위기사단이 산악 훈련에 참가한 거였는데.”
“겪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울지나 마라.”
“탈주하면 두 배로 괴로워질 테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라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