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나누었던 대화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나디아에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했던 날, 그날부터 자신을 보는 나디아의 눈길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마치 6살 난 조카를 보듯, 자애로운 눈으로 그를 보기 시작했다. 그가 받고 있는 오해를 안타깝게 여긴 것도 그와 일맥상통했다.
‘왜지? 왜 날…… 가련하게 보는 거지?’
공포에 젖은 눈길은 자주 받았어도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상처를 가진 사람 보듯 자애로운 시선은 루크 생애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부모님을 잃었던 6살 때에도 그런 시선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동정을 받기에는 너무 신분이 높고 가진 게 많았다.
부모를 잃었어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대귀족 스테이턴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라 먼스트로드의 귀족들에게는 결코 동정의 대상이 될 어린애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저 어린애였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면도를 한 후 나디아는 묘하게 그를…….
‘약한 사람? 처럼…….’
정확히 말하자면 비교적 연약한 사람처럼 보기 시작했다. 수염 좀 밀었다고 그의 굵은 골격이나 근육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체 이 우스운 오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루크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디아는 일주일째 루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아기 새를 보호하는 어미 새처럼 굴었다. 그가 오해를 받는 게 세상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듯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연스럽게 ‘루크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럴 때마다 토할 것처럼 구는 기사단원이나 묘하게 히죽거리는 시녀, 시종, 그리고 사무관들은 아무래도 좋다. 나디아만 행복하다면 평생 내키지 않는 웃음이라도 지어줄 수 있었다. 놀림거리가 되는 것이야 썩 달갑지 않았지만, 고작 그 정도에 상처받기에 루크의 신경줄은 지나치게 굵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 노릇을 그만둘 수 없는 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일주일 동안 루크는 나디아를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했다. 잘 때는 꼭 끌어안고 잤다. 두어 번은 깊은 키스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는 매끄러운 피부나 말랑한 살, 이성을 뒤흔드는 향긋한 냄새가 미칠 것 같은데도 루크는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자신을 가련한 어린애 보듯 바라보는 눈을 마주하면, 기묘한 죄책감이 심장을 죄었다. 못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루크는 나디아에게 미움받을 짓을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겁을 먹거나 싫어할까 봐 지나치게 위축된 나머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가 됐다. 이건 나디아가 아예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나디아는 루크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고, 허락을 해주었는데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했다.
고작해야 나디아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최선이었다.
우스운 건 이제 인내에도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아팠으나 고통에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디아에게 닿지 않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매끄러운 머리칼이 덮인 둥근 머리에 입술을 맞췄다. 그걸로 조금은….
꼼지락.
‘응?’
착각인가. 루크는 눈을 깜박거렸다. 나디아가 잠결에 뒤척거린 모양이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착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품에 안긴 나디아가 제 가슴을 더듬은 것 같다는 착각을….
꼼지락….
“…….”
착각이….
아닌가?
*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의식하기 시작하자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루크의 턱이 빳빳하게 굳었다.
눈을 떠서 나디아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석상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어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손은 루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점점 대담하게 움직였다. 손바닥을 쫘악 펼쳐 크게 쓸어보더니 아래위로 활동 면적을 넓혀갔다. 가슴과 목, 잔뜩 힘이 들어가 더 단단해진 복근까지 더듬은 손은 이내 아쉬운 듯이 떨어졌다.
‘끄, 끝났나?’
루크도 자신이 바보 같다는 자각은 있었다.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는 수준이 아니라 기피하는 꼴이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나란히 누워 손 하나 대지 못하는 데다 그녀가 먼저 내밀어주는 손길에도 겁을 먹어 옴짝달싹 못 하다니.
그렇다. 루크는 겁을 먹었다. 두 팔 들어 환영해도 모자랄 상황에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좋게만 흘러가는 상황을 반갑게 맞아 단숨에 태도를 바꿀 정도로 약삭빠르지 못했다. 그 역시 최근에 깨달은 점이지만, 나디아와 연관된 일에는 특히 우둔해지고는 했다.
나디아가 불편한 듯 몸을 뒤척거리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녀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루크는 눈을 뜨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불편한 침묵을 견뎠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알 길이 없으니 신중해져야 했다. 신중해져야 하는데…….
심장이 제 것이 아닌 듯이 마구 날뛰었다. 얼마나 거칠고 빠르게 뛰어대는지, 만약 나디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루크는 가슴을 세게 때려 잠시라도 멈추게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완전히 멈추면 죽어 버리겠지만.
‘제발 이대로….’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머릿속에 불길이 치솟은 듯 어지러웠지만 최근 본의 아니게 깊어진 인내심 덕분에 아직은 참을 수 있었다. 나디아가 이대로 다시 누워 곤히 잠들어주기만 한다면, 평화롭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불순한 욕망을 죽일 수 있을 터였다.
겨우 억눌러 온 충동과 욕망이 목구멍 아래에서 용암처럼 들끓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으면서, 동시에 홀로 아름다운 그녀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싶었다. 그건 매우 모순된 감정이었다.
루크는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디아 생각이 머리를 떠난 적이 없었고, 날이 갈수록 감정도 깊어졌다. 그녀가 조금씩 보여주는 호의는 꿀처럼 달았고 그건 루크를 중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여인.
소중하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큼 매일 자라나는 음란한 욕망은 고스란히 죄책감이 되었다. 차라리 그녀를 지켜주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볼 수 있었다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내로 억누르는 욕망은 도저히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나디아의 체취만 맡아도 벌떡 서서 가라앉을 줄 모르는 아랫도리 때문에 힘들다는 말이었다.
나디아는 다시 누워주지 않았다. 잠들어주지도 않았다. 이러려고 갈고 닦은 기감은 아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탓에 눈을 감고도 그녀의 움직임을 훤히 알 수 있었다.
낮은 한숨 소리, 떨어지지 않는 눈길, 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루크의 단단한 턱에 닿았다. 대담하게 가슴을 만지작거렸던 손길과 달리 퍽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그녀의 엄지가 매끈한 턱을 미끄러지듯 스쳐, 이윽고 입술에 닿는 순간.
“아앗….”
루크의 인내심도 뚝 소리가 나며 끊겼다. 그는 제 입술에 닿은 나디아의 손목을 커다란 손으로 잡아채며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놀란 나디아가 뒤로 넘어가고, 루크는 그녀를 팔 사이에 가두었다.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놀란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루, 루크…. 안 잤어요…?”
“…….”
“나 때문에 깬 거예요…?”
“처음부터 잔 적도 없소.”
나디아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루크의 목소리는 깊이 잠겨, 목 안쪽을 긁힌 듯 거칠었다. 어둠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디아는 꿀꺽, 마른 목으로 타액을 삼켰다.
루크가 잡아채었던 나디아의 손을 뺨으로 가져와 눌렀다가, 다시 손톱 끝에 입을 맞추었다.
“이러면 안 돼, 나디아.”
“…….”
“당신은 그저 호기심으로 하는 행동이라도, 내게는 지나친 도발이오.”
짙은 어둠 속에서도 뜨거운 눈길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결코 다정하거나 온순하지 않은, 이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먹힐 것만 같은 눈길이다.
무서워야 마땅할 저 눈과 굳은 표정, 거친 목소리에 가슴이 뛴다면 이상한 걸까. 나디아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그를 홀린 듯 바라봤다.
“이러면, 당신을, 지켜줄 수 없게 돼.”
루크가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으로부터 절 지키려고요…?”
“나로부터.”
나디아는 두어 번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루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했지만,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루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디아는 학습 능력이 좋은 편이다. 눈치가 없지도 않았고, 다만 어느 방면의 지식이 지나치게 없었을 뿐이었다. 그 부분도 안나의 간접적인 도움으로 대충 알 만한 건 알게 되었다.
매일 꼭 끌어안고 자는 남편, 자신이 몰랐던 분야, 그리고 깊은 키스는 나디아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루크가 더 많이 만져주고 안아주길 바랐지만, 그는 도무지 일정 이상으로는 닿으려고 하지 않았다.
꼭 끌어안아 주는 걸 보면 자신이 싫어진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어린애에게 하듯 이마에 입을 맞추어줄 뿐, 그 이상은 해주지 않았다.
“당신을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아. 무섭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더 자극하지 말아주시오.”
“……저기, 루크….”
나디아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루크는 정말이지 괴로워 보였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먼저 루크를 덮친 건 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