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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36화 (36/150)

35화

나디아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을 하며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기사를 보았다. 기사의 얼굴은 흙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는데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희게 질려 있었다. 말없이 동의를 구하듯 열렬하게 바라보는 나디아의 눈길을 차마 외면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루크는 나디아의 시선을 따라 엎어진 기사를 보았다.

“그렇죠? 네?”

“…….”

“…….”

기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나디아의 어깨를 끌어안은 루크의 살벌한 시선을 깨닫고 굳은 고개를 억지로 끄덕거렸다. 나디아는 환하게 웃으며 뿌듯하게 루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미소를 본 루크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네요, 루크! 루크가 다정하다는 걸 모두가 알아줘서 말이에요.”

“다 당신 덕분이지. 자,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오. 함께 하겠소?”

“그래도 돼요? 바쁘지 않아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해야지. 잠시 기다려주겠소? 먼지와 땀으로 엉망이라….”

“기다릴게요.”

루크는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등을 밀어 연무장 밖으로 이끌었다. 나디아가 재잘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뒤를 돌아 침묵에 잠긴 흑곰 기사단을 일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는 정말 죽여 버리겠다는 경고였다.

나디아와 안나, 루크, 그리고 비틀거리는 제이까지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저분이 소문 속의 공작 부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먼 수도에서 시집을 온 공작 부인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저 야수 같은 공작이 홀딱 반해 애를 먹고 있다는 ‘그’ 공작 부인 말이다. 홀딱 반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소문은 들었는데…….

나디아와 시선이 마주쳤던 기사가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누구야, 저 사람…….”

부인을 앞에 두고 헤벌쭉 웃는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처럼 순하게 웃는 남자는 단연코 모르는 사람이었다. 죽일 듯이 사람을 팼던 걸 들키지 않겠다고 들고 있던 검을 냅다 던져버리는 남자도 몰랐다.

진한 탈력감과 배신감에 떠는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게리는 홀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연무장을 떠나기 직전 자신을 보았던 나디아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얻어맞은 건 난데….’

마치 천하의 악당을 보듯 싸늘한 시선이었다.

*

“다들 루크를 오해하고 있어요.”

나디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선언했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결연했다. 루크는 난감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침음을 흘렸다.

단언컨대 루크는 그 어떤 오해도 받고 있지 않았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어떤 사람인지 성 사람들은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꾸밈이 없고 솔직했으며, 조부의 괴팍한 교육 방침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적응했다.

사실 루크는 조부의 성격을 쏙 빼닮았다.

태자 레너드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게 고작에, 스테이턴 영지를 제외하면 나라 자체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중앙 정치는 하고 싶은 사람이 하게 내버려두되 공작령에 악영향만 끼치지 않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나디아와 얽히며 한심한 꼴을 자주 연출하기는 했어도 그녀의 말처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나디아에게 아무런 해명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놀렸다는 이유로 새벽부터 신나게 구른 기사단에게는 아주 조금 미안했으나 나디아에게 ‘나는 조금도 오해받고 있지 않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던 탓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소.”

“그래도요. 루크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알면 무섭다느니, 야, 야수라느니 하는 오해도 받지 않을 거라고요. 그 소문이 아니었으면 저도….”

나디아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도 오해를 했으니, 할 말이 없지만….”

나디아가 성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첫날밤 그의 외견과 소문에 겁을 먹고 기절하고 말았던 사실이 너무나 미안했다. 루크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수록 나디아의 양심이 콕콕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면도를 하고서 비교적 연약하게 보이는 외모와 불행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그랬다.

“…….”

“…….”

루크의 등줄기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저 뻔뻔한 사람…….’

제이와 안나의 차갑게 식은 눈길은 뻔뻔한 루크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나디아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먼지만 한 양심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정말이지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천천히라도 좋으니 루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모두에게 보여주도록 해요. 루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오해가 깊어지는 거예요. 모든 오해는 대화로 풀 수 있으니까….”

나디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힘내요, 루크!”

나디아에게 제 난폭한 본모습을 보여주느니 조금 더 뻔뻔해지는 쪽을 택한 루크가 입을 다물어 버렸으므로, 스테이턴 성에서 루크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루크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오전부터 바빴다고 하던데.”

“바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안나와 그랜트가 많이 도와주고 있고요.”

영지의 운영이 공작의 의무라면, 성의 내치는 공작 부인의 영역이다. 예산 책정을 제외하고는 사용인 고용부터 성의 관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공작 부인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스테이턴 성은 사정이 조금 특수했다.

선대 공작 부인은 아주 오래전 타계했다. 선대 공작은 재혼을 하지 않았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지도 않아서 성의 내정은 오랫동안 집사와 시녀장의 몫이었다. 선대 공작의 타계 후 작위를 물려받은 손자 루크 또한 결혼이 늦은 편이었다.

공작 부인의 권한이라고 해도 이제 와서 나디아가 끼어들기는 다소 어색한 상황이었다. 집사 그랜트와 시녀장 안나는 나디아가 최소한의 정보만 숙지한 후에는 최종 결정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디아는 기꺼이 동의했다. 영지와 성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권한이랍시고 일을 빼앗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빨리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의욕을 보이며 맑게 웃는 나디아에게 루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욕을 섞지 않으면 말 한마디 제대로 마치지 못하던 그 공작과 저 남자는 과연 동일 인물인가. 제이는 이제 경악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기운이 탁 빠졌다. 어제부터 생각했지만, 수염 없는 남자와 수염 덥수룩한 남자를 별개의 인물로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는 좋을 것 같았다.

한편 안나는 나디아 앞에서 멍청하게 풀린 루크의 안면 근육을 보며 하나뿐인 손자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반항만 한다며 남몰래 한탄하던 선대 공작의 한탄을 떠올렸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북풍이 아니라 햇살이었다.

나그네의 알몸 따위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말이다.

*

공작이 미쳤다.

사랑에, 혹은 부인에게 미쳤다. 경악한 흑곰 기사단을 중심으로 소문은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공작에게 불려갔다는 이발사의 말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기사단원이 입을 모아 퍼뜨리는 데에는 마을 사람들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딱 그 꼴이 아닌가? 결혼 적령기가 지나도록 결혼하여 후사를 보기는커녕 여인조차 가까이하는 법이 없어 영지민들을 걱정시키더니 제대로 늦바람이 든 모양이었다. 소문인 만큼 다소의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의 평가다. 성 안에서 매일같이 루크와 나디아를 직접 봐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작이 미쳤다’는 말은 너무나 온건했다. 할 수 있다면 더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욕하고 싶었다. ‘돌았다’라거나 ‘또라이’라거나? 심할 경우 ‘토할 것 같다’ 정도는 말해줘야 어울릴 것 같았다.

나디아가 연무장에 나타난 지 일주일이 흘렀다.

루크의 누명을 벗겨주겠다는 일념으로 나디아는 루크의 주변을 종종거리며 맴돌았다. 새벽 연무장에 따라나서지는 못해도 훈련이 끝날 즈음에는 반드시 찾아왔고, 집무실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사무관들에게 줄 수제 쿠키나 음료수 따위를 들고서 말이다. 처음에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던 사무관들도 3일쯤 지나자 익숙하게 나디아를 환대해주었다.

솔직히 사무관들은 나디아의 등장이 매우 달가웠다.

‘욕 안 들어도 돼!’

‘일이 편해!’

‘평화로워!’

루크는 훌륭한 영주다. 일 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무엇보다 영지와 영지민의 안녕을 최우선 사항으로 여겼다. 벌이 엄격한 만큼 포상이 후하며, 일만 제대로 한다면 달리 입을 대거나 간섭하는 일도 없었다. 사무관에게는 기사단에게 하듯 난폭한 수단을 쓰는 일도 없었으니 상관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폭한 수단은 쓰지 않지만, 실수를 하면 대번에 욕이 날아왔다. 루크에게 독설 같은 직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제이드 앨런뿐이었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욕먹을 일도 없을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당사자가 아니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심기가 불편하면, 눈치를 보느라 사무관들의 위장은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집무실에 얼굴을 비추게 된 후로는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루크는 실수를 해도 험악하게 인상을 굳히거나 욕을 하는 법이 없었으며, 벌벌 떠는 사무관에게 비록 딱딱하기는 해도 “신경 쓸 것 없다.”라고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나디아가 보고 있기 때문일 게 뻔했지만, 당장 욕을 피할 수 있는 사무관들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사무관들을 비롯한 시녀, 시종, 흑곰 기사단의 평판이야말로 루크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디아에게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어주고 싶고,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웃어 준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나디아를 슬프게 만든다면 그만큼 가슴 아픈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좋은 사람 노릇을 그만둘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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