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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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한바탕 흘리니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루크는 후련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기사단 정예를 혼자 스무 명이나 쓰러뜨려 놓고서 아직도 기력이 넘치는 루크를 제이는 질린 기색을 숨기지 않고 쳐다봤다.
‘저게 인간이냐?’
야수, 혹은 짐승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비단 외모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 같지 않은 체력과 근력에 빗대어 처음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저런 걸 인류라고 인정해버리면 기준이 이상해질 게 틀림없으니까.
가검을 사용한 대련은 가차없었다. 때리고 찔러봐야 타박상이 고작이다. 그러나 때리는 쪽의 마음만 가벼울 뿐, 가검을 빙자한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기사단은 입장이 달랐다. 차라리 진검을 사용해주는 쪽이 나았다. 진검으로는 무식하게 두들겨 팰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더 덤빌 놈은 없나? …게리.”
연무장 바닥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던 게리의 거대한 등이 움칠거렸다. 가장 먼저 쓰러진 그는 일찌감치 정신을 차렸지만 모르는 척 누워 쉬고 있었다. 이대로 루크가 마음 풀릴 때까지 날뛰다 가주기만을 바라고 있던 그는 툭 떨어진 제 이름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일어나.”
“…….”
“흑곰 기사단이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지? 안 되겠군. 산악 훈련 일정을 잡아라.”
“헉, 제발 그것만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소리를 지른 게리가 헙 입을 틀어막았다. 기절한 척하며 루크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낯선 미남자가 서늘하게 웃었다. 게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역시 일어나 있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부러 못 들은 척을 했다는 뜻인데….”
“방금 정신 차린 겁니다. 진짭니다.”
“게리 노스, 검을 들어라.”
변명은 털끝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게리는 바닥에 떨어진 가검을 주워들었다. 대개 새벽 훈련은 점심나절이 되기 전에 끝났지만, 보아하니 루크는 아직 끝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나디아와의 밤이 두려워 피해 다닐 때 굳이 당장 처리해야 할 필요가 없는 업무까지 끌어다 처리해버린 덕분에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게리는 제이가 루크를 재촉해주길 바라며 그를 흘긋거렸지만, 진작 나가떨어진 채 눈만 겨우 뜨고 있어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게리는 겸허히 눈을 감았다. 면도를 해 말끔해진 루크를 왜 놀렸을까? 반반해졌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무 놀란 탓에 정신이 나가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산악 훈련을 받기 전에 어디 하나 부러져서 휴가를 받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그래! 그럼 적어도 깨끗하게 죽을 수 있어!’
지나치게 두려운 나머지 게리 노스의 사고는 이상한 방향으로 튀고 있었다.
흑곰 기사단의 훈련은 매우 험하고 힘들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라 꼽히는 훈련이 산악 훈련이었다. 말이 산악 훈련이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 혹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산에서 더 혈기왕성해지는 저 짐승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악 훈련이라면 혀를 내둘렀다. 게리는 차라리 아주 심하게 다치기로 결심했다. 가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대한 등이 꿈틀거렸다. 매섭게 되살아나기 시작한 눈빛에 루크가 씩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게리 노스가 흑곰 기사단의 단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루크의 난동을 가장 오래 막을 수 있는 체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루크의 난동을 오래 막아줄수록 기사들의 인망을 얻을 수 있었고 말이다.
게리의 작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전 내도록 날뛰어놓고 숨도 거칠어지지 않은 괴물에게는 잔재주가 통하지 않았다. 무조건 공격, 또 공격하여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아야 했다. 다행히 루크는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받아치는 걸 즐겼기 때문에 죽을 것처럼 공격을 하다 보면 운 좋게 한 대 정도는 들어맞기도 했다.
흉흉한 기세가 연무장을 감돌았다. 씩씩거리며 타이밍을 재는 게리 노스와 살벌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기다리는 루크를 기사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도저히 인간들의 싸움으로는 보이지 않는 현장이었다.
기사들은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단장의 승리를 기원했다. 비록 자신들은 인간이라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지만, 단장이 대표로 흑곰 기사단의 기개를 증명해준다면 산악 훈련 일정을 잡으라는 루크의 명령이 취소될지도 몰랐다.
바위처럼 단련된 근육이 뜨겁게 열을 뿜으며 꿈틀거렸다. 이어지는 대치가 지루해진 루크가 일부러 틈을 내주었다. 게리는 뻔한 함정인 줄 알면서도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괴성을 지르며 가검을 휘두르는 게리를 보며 루크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때였다.
“루크!”
공격을 흘려 받아치려던 루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퍼억!
전력을 다한 공격이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어디 하나 골절되지 않았다고는 믿기지 않는 타격음에 연무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정작 공격을 성공시킨 게리는 얼떨떨한지 자신의 손과 루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디아?”
“세, 세상, 세상에….”
연무장에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환청인 줄 알았던 목소리가 또다시 들리자 루크는 눈을 깜박거렸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환상을 보나,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루크는 하얗게 질린 루크와 너덜너덜해진 채로 쓰러진 기사들, 그리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나디아, 한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혀를 차고 있는 안나를 확인했다.
루크는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가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워낙 크게 얻어맞은 직후인데다 가검을 들고 있는 게리가 각오를 다지느라 평소보다 험악한 얼굴이었던 탓에 무기까지 떨어뜨린 루크는 완벽한 피해자처럼 보였다. 대련에 가해자 피해자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나디아의 눈에는 그랬다.
루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 울지 마시오! 난 안 다쳤소!”
“하지만, 하지만 방금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어요!”
“이거 봐요, 나디아. 이건 가검이오. 날도 없고….”
루크가 바닥에 떨어진 가검을 가리키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나디아는 연무장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안 다쳤어요?”
“당, 당연하지….”
루크가 날듯이 빠르게 나디아의 앞으로 향했다. 기사들은 바닥을 뒹구는 가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기사에게는 검이 생명이며, 대련이라 해도 적을 눈앞에 두고 무기를 내팽개치는 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라던 루크의 말이 그들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전쟁 중에는 죽더라도 검을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던 선대 공작의 가르침이 연무장 먼지처럼 흩날리는 순간이었다.
“보겠소? 멀쩡하오. 소리만 컸지, 하나도 아프지 않다오.”
“하지만 봐요, 이리 빨개졌는데….”
“금방 가라앉을 거요.”
안심하라며 씩 웃는 루크의 뒤통수로 기사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나디아의 뒤에 서 있는 안나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심한 놈을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였다. 괜찮다고 안심을 시킬 거면 피해자 흉내나 내지 말 것이지, 무기를 내팽개쳐 게리만 나쁜 놈으로 만들어버린 주제에 멀쩡하다고 말하는 루크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오? 연무장까지 오다니, 혹 급한 일이라도 생겼소?”
“아? 아니오. 그런 건 아닌데….”
나디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루크의 팔을 붙잡으며 작게 말했다.
“루크가 보고 싶어서….”
“아….”
“방해해서 죄송해요. 살짝 훔쳐보고 갈 생각이었거든요….”
쑥스러움은 전염성이 강하다. 수염 없이 맨들맨들하게 드러난 루크의 뺨도 보기 좋게 붉은 물이 들었다. 기사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게 훨씬 나았다. 이건 지독한 시각적 폭력이었다.
제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이 끔찍한 참상을 이발사에 이어 기사단원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게 된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루크에게 향해 있던 나디아의 시선이 게리에게 흘렀다. 게리는 들고 있던 가검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녹색 눈동자에는 희미한 원망이 어려 있는 것도 같았다. 나디아가 말했다.
“훈련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나디아 마사, 스테이턴입니다.”
“방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게리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방해라니 당치도 않았다. 루크를 제외하고는 한 마음 한뜻으로 이 훈련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루크가 뒤를 돌았다. 나디아를 향해서는 다정하게 녹아내렸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오늘 훈련은 이만하겠다. 다들 많이 지친 것 같으니.”
소리 없는 환호가 흘렀다. 기사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디아를 훔쳐보았다. 대놓고 보기에는 루크의 등이 너무 무서웠다. 그냥 뒷모습일 뿐인데 욕이 들리는 것 같은 게 이상했다. 게리는 루크의 난동을 최대한 오래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단장 자리를 얻어냈는데, 등장만으로 난동을 멈춘 나디아는 어떻겠는가? 이 순간 기사단원들에게 나디아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난폭한 야수가 쑥스러워하는 꼴은 차마 보기가 힘들었지만, 덕분에 이 지옥이 끝나게 되었으니 아무렴 어떠랴? 루크의 뒤에 가려져 있던 나디아와 그녀를 훔쳐보던 기사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나디아가 커다란 녹색 눈을 반짝거리며 손뼉을 쳤다.
“역시 루크예요. 기사들이 지친 걸 배려해서 일찍 훈련을 끝내주려는 거죠?”
“……음? 으응, 뭐, 그렇….”
얼떨결에 긍정하고만 루크는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안나의 시선을 발견하고 말끝을 흐렸다.
“정말 다정하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