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34화 (34/150)

33화

루크가 서늘하게 게리를 노려봤다. 수염으로 덮여있을 때에는 맹수에게 노려지는 듯해 섬뜩했는데, 수염을 벗고 튀어나온 웬 미남이 노려보자 곱게는 못 죽을 것 같다는 예감에 섬뜩했다. 이러나저러나 섬뜩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후자는 깔끔하게 죽지도 못할 것 같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빴다.

‘아니지! 같은 사람이잖아!’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별개의 존재로 생각한 바람에 위화감을 깨닫지 못했다. 멍청한 생각에 혼란스러워하는 게리의 발치에 훈련용 가검이 떨어졌다. 견습생들이나 쓰는 검이라 들어본 적도 써본 적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게리가 물었다.

“…이건 뭡니까?”

“들어라, 게리.”

루크는 이미 가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검을 쥐었기 때문에, 게리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가검을 주워들었다. 무엇으로든 경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다. 어젯밤에는 모처럼 푹 잘 수 있었지. 컨디션도 좋고, 뭐…… 골치 아픈 일도 없어 더없이 상쾌해.”

“그? 그러십니까……?”

스테이턴 성의 간부 비상회의에 참석했던 게리의 눈길이 루크의 중심부로 흘러갔다. 루크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고작 수염 하나 밀었다고 똑같은 표정, 똑같은 눈길이 이토록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삶은 계란처럼 맨질거리는 피부와 잘난 낯가죽을 가진 남자한테서는 험악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게리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 눈깔을 보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제 눈깔이요?! 제가 뭘 어쨌….”

“어쨌는지 몰라서 묻나.”

“…알긴 알지만, 이해해주셔야죠. 솔직히 각하만 사람 되면 남겨진 저는 어떻겠습니까? 배신감 느껴진다고요.”

“내가 언제 너랑 같은 분류로 묶였나?”

“모르셨습니까?!”

‘아니었습니까?’가 아니라 ‘모르셨습니까?’다. 진작 루크를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증거였다.

“적어도 너처럼 멍청한 적은 없었다, 게리 노스.”

“……어, 주군….”

게리가 가검을 쥐고 커다란 어깨를 움츠렸다. 급할 때마다 그는 루크를 ’각하’가 아니라 ‘주군’이라고 불렀다. 지켜보던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때맞춰 끼어들어 준 게리는 그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게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가검을 들고 압박을 당하는 사람은 게리가 아니라 제이였을 것이다.

“저, 주, 주군, 저기, 제가 어제 발목을 삐, 삐었는데.”

“오호, 언제부터 흑곰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발목 살짝 삐었다고 엄살을 부렸지?”

“엄살, 엄살은 아니고….”

“들어, 게리 노스.”

“…….”

게리는 억지로 가검을 들었다. 진검이 아니라 가검을 들게 만든 건, 아무리 때리고 찔러도 큰 상처는 나지 않을 것이므로 마음껏 날뛰겠다는 뜻이었다. 게리는 주변을 흘긋 보았다. 자신과 함께 벗겨진 공작의 얼굴에 당황하며 수군거렸던 기사들이, 시침을 딱 떼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이 배신자들!’

주군에 이어 부하들에게도 배신을 당한 게리 노스가 훌쩍거렸다.

“두 번 다시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도록 정신 교육을 똑바로 시켜주겠다. 거기,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힉….”

“제이드 앨런, 너도.”

슬그머니 도망치려 뒤돌았던 제이도 그 자리에 굳었다.

오전 내도록 스테이턴 성 연무장에서는 가검에 두들겨 맞은 기사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흑곰 기사단은 하루아침에 매끈한 미남자가 되어버린 공작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눈물과 함께 깨달았다.

야수는 여전히 야수였다.

*

“힘들지 않으세요? 부인. 조금 쉬었다 할까요.”

“그냥 앉아만 있었는 걸요.”

“눈을 너무 혹사하면 어지러울 수 있답니다. 차를 내올게요.”

내오겠다고 말하면서 안나는 다른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차를 우려주는 건 안나이더라도 밑 준비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

나디아는 어깨를 쭉 펴고 뻐근한 목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손가락으로 굳은 목과 어깨를 주무르자 조금 편해졌다. 그녀의 앞에는 스테이턴 가문의 역사와 가계도, 그리고 공작령에 대한 정보들이 펼쳐져 있었다. 한꺼번에 읽으려니 버거웠지만, 모르는 부분은 안나가 설명해주고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보기 쉽게 자료를 더해주었다.

안나가 말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어느 정도 아는 게 있어야 말씀해주시는 것도 이해하지요. 정말, 이 정도 가지고 지치지 않아요. 안나는 절 너무 약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그야….”

안나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죄송해요. 제 기준은 언제나 루크 도련님이었기 때문에….”

“도련님?!”

“……예전에는 그리 불러드렸지요. 선대 공작께서 살아계실 무렵에는.”

나디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안나는 실수로 옛날처럼 불러버린 게 부끄러워 잠깐의 안색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무식하게 크고 질긴 각하만 모시다 보니, 저희 눈에는 어쩔 수 없이 부인이 작고 연약해 보여요.”

“…이거 봐요. 안나가 나보다 팔뚝이 더 가느다란 것 같은데….”

나디아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안나처럼 호리호리한 사람이 말해봐야 놀리는 것 같기만 했다.

“그런 거랑 달라요. 이건 좀 더….”

“……?”

“기분 문제라고나 할까요.”

“……??”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안나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스리슬쩍 넘어가 버렸다. 질기고 굵은 밧줄만 잡다가 얇고 가느다란 실을 잡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루크는 어땠어요? 6살… 때 여기에 왔다고, 들었어요.”

“들으셨군요. ……귀엽지 않은 어린애였어요. 말수도 적고요.”

상처를 받아서 마음의 문을 닫았었구나. 나디아는 두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나는 나디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공작의 호감을 높여주기 위해 말을 골랐다.

“그래도 금방 밥도 잘 먹고, 잘 움직이게 됐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선대 공작께서 게으름피우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루크는 어린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기로 유명한 흑곰 기사단의 훈련장에 던져졌다. 말 그대로 기절과 훈련을 반복하는 나날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디아의 머릿속은 달랐다. 상처를 이겨내려 밥을 먹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때였다.

챙그랑!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비명이 들렸다. 차와 찻주전자를 가지고 오던 시녀가 실수한 모양이었다. 안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그들에게 향했다.

혼자 남은 나디아는 책상에 펼쳐진 자료를 훑어보다가, 바람을 쐬고 싶어 일어났다. 안나가 엎지른 차와 찻잔을 치우고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사람은 참 간사한 동물이다. 나디아는 자신이 이렇게 생각이 자주 바뀌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가만히 루크를 떠올렸다.

‘멋있기는 한데, 음, 으으음.’

깨끗하게 면도를 해서 드러난 맨얼굴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기는 했지만 부정할 수 없이 잘생기고 멋있었다. 라 먼스트로드에서도 면도를 한 상태였다면, 물론 무섭기는 했겠지만 마치 팔려가는 듯이 가족들이 오열하지는 않았을지 몰랐다.

그러나 야수 같은 얼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자는, 조금….

‘그 커다랗고 사나운 눈초리를 가진 남자가 연약해 보이다니 이상하지…….’

목소리는 제가 알던 루크의 것이었다. 키스할 때 뺨을 다 덮는 커다란 손바닥도 루크의 것이었다. 꼭 안아주는 팔도, 뜨거운 체온도, 단단하고 두꺼운 몸도 루크의 것이다. 낯설지는 않았지만, 조금 아쉽기는 했다.

나디아는 스스로도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발코니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 그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각하께서 드디어 수염을 다 밀어버리셨다고?”

“봤니? 봤어?”

“그럴 리가. 각하께서는 새벽부터 연무장에서 흑곰 기사단과 훈련 중이셔.”

“보통 사람처럼 멀끔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솔직히….”

“그렇지? 그분이 어디 보통 무서운 분이어야지. 상상이 안 돼.”

“기사단도 불쌍하지. 훈련 끝난 뒤에 가보니까 다들 사람 몰골이 아니던데….”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두들겨 패니까….”

“진짜 무섭다. 연무장 밖에서는 그러지 않으셔서 다행이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얘. 각하가 안팎 가리지 못하고 날뛰셨으면 성이 다 무너졌겠지.”

“야수는 야수니까. 어휴, 무서워라.”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짓궂은 대화였다. 나디아도 그들의 대화에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았다. 장난치듯, 가볍게 농담의 소재로 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그들이 루크를 ‘무섭다’거나 ‘야수’라고 부르는 게 가슴이 아팠다.

‘루크가 얼마나 다정하고 착한데….’

겁을 먹고 기절해버린 나디아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녀는 루크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었다. 수염을 벗어도 벗겨지지 않은 무서운 이미지 말이다. 그녀는 그게 다 부모님을 여의고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혼자 애를 썼던 어린 시절의 잔재라고 생각했다.

‘좋아, 내가 같이 다니면서 루크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보여주자…!’

나디아의 가슴 속에 새로운 목표가 자리 잡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