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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33화 (33/150)

32화

그래서 면도도 했다. 나디아가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더 좋아해 준다면 수염만이 아니라 머리칼을 밀라고 해도 밀었을 것이다. 까짓것, 나디아만 웃어 준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그러나 면도를 한 후 정작 나디아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 손으로 수염을 밀어주고도 나디아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루크를 보았다.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기절까지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첫날밤 그녀가 겁을 먹었던 이유의 70퍼센트 정도는 수염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정말 곰으로 보였던 거겠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이는 선의의 거짓말이든 악의의 거짓말이든 일단 거짓말은 다 못했다. 그가 곰 같았다면, 진짜 곰 같았던 거다.

고작 수염만 밀어서 곰 같았던 인상이 바뀌리라 기대하는 것도 뻔뻔스러우니, 사나운 눈초리며 무서운 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나디아는 이번에도 용기를 내어서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의 맨얼굴이 낯설어도 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증명해줬다. 그 모습에 루크는 다시 한번 반했다.

나디아는 용감했다.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부랑자라 해도 환자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가와 친절을 베풀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각오를 다지고 야수라 소문이 난 얼굴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루크는 본래 그리 감성적인 사람이 못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느껴보는 사랑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며, 자신도 몰랐던 제 모습에 당황스러운 한편 신기한 것이다.

나디아를 만난 후로 루크는 매일이 꿈만 같았다. 가끔 본의 아니게 고통스러워질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꿈결처럼 행복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이 제 곁에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흑, 흐욱, 흡…….”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루크의 두꺼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콧잔등을 비볐다. 예쁜 코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울음을 그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루크는 등을 문질러주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다.

“그만 울어요, 나디아.”

“으흑, 흐흑, 어떻, 어떻게….”

나디아가 더듬더듬 말을 이으려 노력했다.

“나도 어떻게, 딸꾹, 해야 할지, 딸꾹! 흐우우….”

딸꾹질까지 시작되었다. 나디아는 저 스스로 눈물과 울음을 조절하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에 루크의 품에 이마를 비볐다. 루크는 벅찬 얼굴로 한숨을 쉬며 품에 안긴 작은 머리통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하얗게 질려 넘어가던 나디아를 보며, 루크는 그녀가 괴로워하거나 무서워할 만한 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두 번 다시 그녀를 기절할 정도로 무섭게 몰아세우지 않겠다고 말이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더라도 그것 하나만은 분명한 기준이었다.

난감했다. 행복한데 난감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루크는 싱숭생숭한 마음이 당황스러웠다.

‘일단 울음부터 좀 그쳐야 할 텐데.’

눈물이 너무 굵어서 탈수가 오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루크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나디아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촉촉한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려서 루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은 금세 떨어졌다. 나디아가 붉어진 얼굴로 항의했다.

“이럴 때 키스하고, 흐, 싶으세요?!”

“…그야….”

“후, 흑, 분위기 파악, 흑, 파악….”

“…하지만 당신 우는 얼굴을 보니까….”

흥분하고 말았다. 키스는 언제든지 하고 싶다. 기회만 있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다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나디아 앞에서는 제가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혹시 몰라 사과부터 하고 봤는데, 지금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기분이다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나디아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루크를 노려봤다.

“흑, 흐윽, 후…. 기다려주세요. 저, 금방… 어? 딸꾹질 멎었네….”

“다행이군.”

“……그래도 갑자기 키스한 건 잘못하셨어요, 아시죠?”

“그렇군. 고맙소.”

“잘못했다면 미안하다고 하셔야지, 왜 고맙다고 하세요?”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크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단언컨대, 이 얼굴을 성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들켰다면 토악질 시늉으로는 안 끝났을 것이다. 낯설 뿐만 아니라 다소 멍청해 보이도록 웃고 있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

나디아는 루크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난감해하는 것도 같고, 낯설어하는 것도 같은 애매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뺨과 목덜미, 귓바퀴가 예쁘게 붉었다. 루크는 또 참지 못하고 그녀의 붉어진 곳마다 입술을 내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이날 밤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 알았더라면 루크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의 죽음은 조부의 위로로, 조부의 죽음은 측근들의 위로로 잘 이겨냈다고 나디아에게 강조했을 것이다. 담담하게 말한 건 그 상처가 아직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무딘 사람이라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당신의 동정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동정 따위 받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린 나를 안아주는 건 누구에게도 무리였을 것이라고….

이 일로, 나디아의 안에서 루크가 어떤 이미지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면 말이다.

*

흑곰 기사단은 무서운 단결력과 충성심, 무식할 만큼 혹독한 훈련으로 이름이 높은 기사단이다.

그들의 지옥 훈련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먼 수도에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높은 산과 깊은 숲, 인적이 드문 험지를 구르며 훈련이 이어졌다. 딱 죽기 직전까지 굴리는 훈련에는 대개 스테이턴 공작이 함께 했는데, 덕분에 공작을 향한 충성심과 존경심이 다른 기사단보다 유독 높았다.

특히 기사단장 게리 노스는 스테이턴 공작의 창이자 방패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주군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사지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대귀족이면서도 함께 험지에 뛰어들고, 흙먼지 속을 구르며 훈련에 어울리는 영주이자 주군을 비록 다소 거칠고 무섭기는 해도 매우 존경했다.

존경은 하는데…….

게리 노스는 작은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노려봤다.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으나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옆에 선 기사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루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시력이 멀쩡했고, 꿈이라 여기기에는 날이 지나치게 밝았다.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라면 이건 현실이었다.

‘저 허우대 멀쩡하고 얼굴 반반한 사람은 대체 누구지?’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던 주인이 하루아침에 낯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경험은 흔한 게 아니었다. 목소리가 똑같지 않았다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보좌관 제이드 앨런이 함께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저 낯선 사람을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누구인가? 수도 라 먼스트로드에서 그는 야수 공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그를 본 사람은 하나같이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사람인지 야수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외모 탓이었다.

그러나 만약 지금 같은 모습으로 라 먼스트로드에 등장했다면 그는 야수 공작이라는 별명 따위를 달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심 대신 호감을 사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의외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맨얼굴이었다.

흑곰 기사단에게는 의외로 반반한 낯짝의 주군이 영 반갑지 않았다. 이질감이 들었다. 아니, 이질감보다는…… 그래, 배신감과 닮아 있었다.

동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는, 그런 종류의 배신감이었다.

짐승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심지어 잘생겼다. 게리처럼 루크와 같이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다고 분류되었던 기사들은 배신감도 한층 더 컸다.

연무장을 떠도는 어색한 공기를 루크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디아 외의 사람을 상대할 때는 한없이 얕은 인내심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롱소드를 냅다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제 면도를 하고 난 후부터 그를 마주친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이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짜증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작 면도 좀 한 걸 가지고! 제기랄, 너희가 무슨 낯 가리는 어린애들이냐?”

“고작이 아니죠. 저희 심정도 헤아려주셔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각하 얼굴은….”

제이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는 스테이턴 성의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루크의 새 얼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심기가 불편한 루크에게는 짜증 외의 감흥은 불러일으키지 못하겠지만, 제이는 입이 찢어져도 바른말밖에 할 수 없는 종자였다.

“다른 사람 아닙니까, 거의….”

“거의가 아닙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지….”

게리가 소심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는 제 목소리가 루크에게 닿기를 바라서 말한 게 아니라 그저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중얼거린 것이었는데, 가까운 거리와 굵은 목소리 때문에 정확히 루크의 귀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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