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32화 (32/150)

31화

6. 야수를 다루는 법

나디아는 공작 부인의 침실을 내버려 두고 어김없이 공작의 침실을 찾아왔다. 용기를 내어주었다고는 하지만 낯을 가린다던 그녀에게는 ‘처음 보는 사람’ 같은 자신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루크는 안도했다.

그러나 키스까지 진도를 나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키스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디아는 도망치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비껴 피하거나 두 손을 붙잡고 꼼지락거렸다. 그를 어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루크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고, 나디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루크는 나디아를 침대로 이끌어 눕히고, 가볍게 대화를 나누다 잘 생각이었다. 팔을 내어주고서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말이다.

나디아는 자신이 어색해하거나 어려워하면 루크가 상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품에 안겨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루크는 나디아가 무방비하게 잠들어버리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화에 응했다.

‘정말 별 것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나디아의 조카 이야기로 시작했다. 조카가 얼마나 귀여운지, 얼마나 사고뭉치인지, 혹은 영리한지. 어쩔 수 없는 아이라고 말하면서도 애정이 묻어났다. 그리고 언니 일리야와 오빠 앤더슨, 그리고 부모님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오늘 나디아는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처음 보내는 편지였소?”

“그동안에는 못 보냈어요.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도저히 거짓말은 할 수가 없어서….”

수도에 가면, 무릎 꿇고 사죄하자. 반드시 사죄하자……. 루크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부모님의 이야기에 이어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루크는 어린 시절의 나디아를 상상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토록 즐거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랭커스터 남작 삼 남매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사이가 좋아 그런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나디아는 자신의 기억 위주로 이야기를 했지만, 듣는 루크에게는 그녀가 귀여워 견딜 수 없었던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두 배로 즐거웠다.

“루크는요?”

“음?”

“루크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루크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만 조잘거리던 나디아가 고개를 들고 그를 보고 있었다.

“……재미없을 텐데. 지나간 이야기를 해 봐야….”

“제 이야기도 재미없으셨어요…?”

“당신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지. 당신 이야기를 더 듣고 싶소.”

“전 루크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이 성에서 태어났나요? 쭉 여기서 자랐어요?”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루크는 이 눈동자를 외면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태어난 건, …수도였지.”

“수도요? 루크, 수도에 살았어요?!”

“태어나 6살 때까지만.”

나디아는 엎드린 채 턱을 괴고 루크를 올려다봤다. 루크는 저절로 가슴골 사이로 흐르는 시선을 잡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왜 6살 때까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 사고였소. 마차가 전복되어서. 사이가 좋은 분들이었다고 하니 누구 한 사람 남겨놓고 싶지 않아 그랬을 거라고들 하더군.”

“…….”

“사이가 좋은 부모님을 두는 것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어. 부모를 잃은 날 맡아주신 게 조부이신 선대 스테이턴 공작이셨소.”

“…….”

“하하,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다소 괴팍한 분이라 말이지. 어렸을 때는 고생을 많이 했다오. 그 영감이 죽을 줄은, 솔직히 상상도 하지 못했어.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은 사람이라? 나디아?!”

후두두둑.

루크는 비명을 지르며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엎드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디아의 뺨을 굵은 눈물 몇 줄기가 가로질렀다. 루크는 사색이 되어 입을 벙긋거렸다.

“나, 나, 나, 나디아?!”

“으흐, 으….”

“나디아! 왜?.”

“흐어어어어엉….”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루크의 머리를, 나디아가 두 팔을 뻗어 감싸 안았다. 루크의 얼굴이 나디아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콧잔등이 누르는 대로 뭉개지는 부드러운 살덩이와 따뜻한 체온, 매끄러운 피부였다. 나디아의 손가락에 루크의 머리칼이 얽혔다.

“그, 그런 슬픈 이야기를, 흑, 어떻게….”

“…….”

“왜 그렇게 담담하게 얘기해요….”

“……아.”

그건, 오래된 일이었기 때문에. 루크에게도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도, 그리고 이제는 조부의 죽음조차.

“미안, 미안해요, 루크. 내가, 잘못, 물어봤….”

“아니….”

“고작 여섯 살이었는데, 피오나보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피오나는 얼마나 영리한지 모른다고 칭찬했던 조카의 이름이었다. 루크가 부모를 잃었던 나이가 조카와 비슷한 연령이었던 데다, 부모님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디아에게는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루크에게는 이제 와서 위로받기는 머쓱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은 슬프지만 그는 그 슬픔을 제대로 실감할 여유도 없이 구르고 또 굴렀다. 그게 조부 나름의 위로 방법이라는 건 그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조부의 빈자리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불쑥 드러나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차라리 생각할 여유 없이 구르는 게 나았다.

부모의 죽음은 물론이고 조부의 죽음도 루크는 담담하게 이겨냈다. 그에게는 그들이 남겨준 유산과 지위와 의무가 있었으므로.

나디아는 루크의 머리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어린아이 달래듯 자상한 손길이었다. 정작 우는 것은 나디아 본인이었는데 말이다. 루크가 말했다. 가슴팍에 입술이 눌려 발음이 답답하고 어눌했다.

“나디아, 오래된 일이오.”

“…….”

“그대가 울어줄 일이 아냐….”

“…안아주고 싶어요….”

“…….”

“부모를 잃었던 6살 루크를, 이렇게 안아주었다면……. 듣는 사람이 다 가슴 아프도록 담담한 목소리로, 죽음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누군가 루크를 안아주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조부의 위로가 훨씬 효과적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결국 루크는 거칠고 험하게 자랐겠지. 그게 그의 본질이었으므로.

‘동정은 딱 질색이었는데.’

나디아에게 받는 것이라면 동정이 아니라 동정 조각이라도 기꺼웠다.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인 줄 알지만, 루크는 그녀에게 자신이 괜찮다고 피력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제 머리를 끌어안은 나디아의 등에 팔을 둘렀다.

*

누군가 말했다.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확대하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에 대해 깊이 고찰해본 적은 없으나 실제 빠져보니 감상적인 인간의 과장된 표현이라 여겼던 스스로를 비웃고 싶을 지경이었다. 과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제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정확해서 놀랍기만 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역시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과거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어 루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크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머리는 숙취로 찌르듯 아팠으며 속은 뒤집어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게다가 꼴은 또 어땠나. 공원에 누워있는 그를 환자 취급을 해준 건 오직 나디아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부랑자에 불과했다. 루크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환자보다는 부랑자에 가까운 몰골이기는 했다.

첫눈에 반한 여인을 만났는데 부랑자 꼴을 하고 있었다니. 루크는 입이 찢어져도 처음 만난 순간을 나디아에게 실토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크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디아가 꼭 알려달라고 부탁이라도 한다면, 아니, 말만 해도 루크의 입은 결심 따위 던져버리고 술술 불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나디아에 관한 한 루크는 조그만 것이라도 자신하는 걸 그만두었다.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악과 배신감에 떨던 제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만했다. 스스로도 제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건 루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해결해야겠다거나, 해결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본인 꼴이 우습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우습다 뿐인가, 꼴사납기 짝이 없다.

나디아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실수 연발이었다. 레너드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납치하듯 결혼을 하게 되었고, 첫날밤 그녀를 겁에 질려 기절하게 만들었다. 나디아가 자신을 보고 또 기절할까 두려워서 한 달이나 도망다니기도 했다. 나디아가 먼저 용기를 내어준 덕분에 어찌어찌 그 상황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꼴사나웠다.

이제껏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인생에 후퇴는 없었다. 간이 배 밖에 나왔다는 조부의 평가처럼 그는 두려워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지금도 오직 단 하나, 나디아 마사 스테이턴뿐이다.

나디아가 사랑스럽다고 느낄수록 두려워지는 게 이상했다.

‘그건 아마….’

하얗게 질린 채 기절하는 나디아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루크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날을 꼽으라면, 그는 단연 첫날밤을 꼽을 것이었다. 밭은 숨을 내쉬며 바들바들 떨던 몸, 가련하게 떨리던 눈동자, 결국 뒤로 넘어가고 말았던….

팔 안에서 축 늘어지던 나디아의 무게와 온도를 지금도 떠올릴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나디아를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런 기억은 두 번 다시 사양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