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가? 각하……?”
“…….”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 절박한 시선이 제이에게 닿았다. 물론 제이도 이발사의 심정을 절절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제이는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동일 인물이 아니잖아…….’
고작 면도 따위로 사람이 바뀌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이건 뭐 변신이 따로 없었다.
충성심이 깊은 제이조차, 솔직하게 말해서,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갔다면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욕설이 반절을 차지하는 말투, 낮고 거친 목소리가 합쳐진다면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그건 입을 열어야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악마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수도 라 먼스트로드에 살았던 시절, 루크는 무척 귀여운 생김새로 어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였지만 생각해보면 태자 레너드도 “어렸을 때는 나 못지않은 귀여운 꼬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안나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저런 얼굴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선대 공작의 손자가 양친을 여의고 공작령에 왔던 날.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작 루크의 얼굴은 아주 흐릿했다. 안나는 그 시절 저 비리비리한 꼬마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한 적이 있었다는 걸 겨우 기억해냈다. 그래, 그런 적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어린 시절의 루크는 잘생겼다기보다 예쁘장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생김새였다. 선대 공작의 무자비한 훈련과 드러나지 않았던 본인의 적성, 환경 따위가 어울려 지금의 야수가 완성되고 말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 토대는 그랬다.
수염이 덥수룩한 야수가 있었던 자리에는, 날카로운 분위기의 미남이 서 있었다.
매서운 눈매는 수염과 나란히 두었을 때에는 사납고 험악했지만, 얼굴을 다 드러내놓으니 잘 벼린 칼날 같은 분위기를 완성시켰다.
겨우 실제 연령에 어울리는 외모가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드러난 피부가 뽀송뽀송하다. 그래도 19살 무렵처럼 애송이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건 여전해도 원인이 판이하게 달랐다. 전에는 잡아 먹힐까 봐 두려웠고, 지금은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손을 대면 차갑게 잘려나갈 것 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루크는 미간을 좁히고는 안나와 제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디아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울을 찾는 날이 올 줄이야.’
뚫어질 듯 쳐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더없이 기꺼우면서도 부끄러워 숨고 싶은, 이중적인 기분이었다. 맨얼굴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면 덜하겠는데,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라서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는 괜히 나디아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제이와 안나가 작은 것이라도 힌트를 주길 바랐다. 루크의 눈짓을 알아차린 제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심하십시오, 각하!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엄청납니다…. 눈빛만으로 이 모든 말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긍정적이라는 의사만은 또렷하게 전달이 되었다.
‘진작 다 밀어버려야 했어…….’
그랬다면 나디아가 야수에게 잡아 먹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무서운 건 여전했지만 적어도 같은 인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을 테니까.
안나의 눈빛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된 과거의 기억과 수염이 사람 얼굴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되새기느라 답지 않게 느릿한 반응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결과가 나쁘지 않다는 증거였다.
루크는 두 측근의 반응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나디아에게 한발 다가갔다.
나디아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
“…….”
“……나디아?”
루크가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디아는 심지어 뚫어져라 보고 있던 눈길도 거둔 채였다. 그가 재차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
“…….”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는 마치 첫날밤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겁을 먹은 듯이 보였다.
수염을 밀었어도 여전히 자신이 위협적으로 보였기 때문일까. 맨얼굴을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는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보다 작은 나디아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나디아는 더 물러나거나 도망가지는 않았다. 기절할 것처럼 몸을 떨지도 않았다. 다만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어 버렸을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시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낮추고 고개를 든 루크가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녹색 눈동자와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나디아의 뺨이 금세 발그스름하게 붉어졌다.
“루크….”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루크를 발견하고 나디아는 당황했다.
“일어나요. 바지 더러워질 텐데….”
“당신이 나를 봐준다면 일어나겠소.”
“……그럴게요.”
나디아가 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순순하게 대답은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염을 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나디아를 위해 면도를 한 것이었으므로, 그녀의 반응이 탐탁지 않자 곧장 후회했다.
“그리 이상하오?”
루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수염을 매만지듯 턱 부근을 쓸었다. 손끝에 닿던 수염이 모조리 사라진 턱이 어색했다. 그의 표정을 알아차린 나디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
“진짜, 진짜 아니에요.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처음 보는 사람 같아서.”
나디아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다.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 남들보다 배는 시간이 걸렸다. 수염이 덮인 루크의 얼굴에는 이미 익숙해졌고, 그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친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낯선 사람이 수염 뒤에서 튀어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조금 낯설어서……. 그래서.”
나디아는 자신의 이런 점이 무척 싫었다. 시원하게 넘겨버리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점까지 하나하나 어려워하는 자신이 못난 사람 같았다. 익숙한 사람의 곁에서 안정을 찾고, 새로운 경험에는 주저한다. 고치고 싶어도 잘 안 됐다.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조차 그에게 들킬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나디아는 흘긋 눈을 들어 루크를 보았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어젯밤 자신에게 끊임없이 달콤한 키스를 해주었던 남자의 것과 똑같았다.
겨우 안도가 찾아왔다. 나디아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혹시 자신의 반응으로 이 상냥한 남자가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 같아서 아직 어려웠지만, 그녀는 그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그가 오해를 하도록 내버려 두기도 싫었다.
나디아가 살짝 발돋움을 해서 루크의 입매 옆, 수염으로 뒤덮였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잠깐 닿았다가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루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매만졌다.
가진 용기를 끝까지 쥐어짠 나디아가 푸시시 김이 올라올 것처럼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그리고 무어라 입술을 우물거리다, 뻣뻣하게 뒤로 물러났다. 루크도 움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멍청하게 서서, 나디아가 도망가듯 방에서 나가는 걸 붙잡지도 못했다. 수염을 밀어서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뺨만 매만졌다.
제이는 이 닭살 돋는 부부의 모습을 이발사에게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공작 부부의 위엄은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게 틀림없었다.
어린 소년, 소녀도 아니고 고작 뺨에 입을 맞춘 것으로 부끄러워하는 부부라니……. 손발이 간질거리는 장면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 주인공이 자신의 험악하고 무서운 주군이라는 점이 다소 끔찍했다. 지울 수만 있다면 뇌리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었다.
“……제이.”
루크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예, 각하.”
“……보았느냐?”
“……무엇을요.”
“이건 현실인가.”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말이었다. 제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인과 얽히기만 하면 한없이 한심해지는 주군의 체면을 지금이라도 지켜주려면 당장 이발사부터 내보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두려웠다.
“일단 현실이긴 할 겁니다.”
혼자 꿈을 꾸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어떻게 가능하지? 꿈이 아니고서야…….”
“……?”
“어떻게 저렇게 귀엽고 예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
“…….”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은 건 제이 자신이었다. 자신이 뭘 들은 건지 모르겠다.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제이는 넋을 놓은 루크를 외면하고, 이발사를 흘끔 보았다. 입이 간질거리는 듯 입술을 꾹 다문 이발사를 보니 당장 오늘 오후 성 인근 마을에는 이 멍청하고 닭살 돋는 공작 부부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다.
수염 뒤에서 튀어나온 게 사람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알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