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눈 뜨고 기절한 것 같습니다.”
“…….”
“각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메두사 같은 겁니까?”
“…….”
“어쩌면 새로 만나는 사람마다 기절을….”
제이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첫날밤에 기절한 나디아를 비꼬는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디아는 못 들었는지 안나와 무어라 속닥거리고 있었다.
루크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성마른 손짓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빌어먹을 수염 따위를 기르는 게 아니었다. 중후해 보이는 외모로 애송이 티를 벗으려 했다는 발상 자체가 유치했다.
그러나 유치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염에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굳이 태도를 바꾸지 않은 거였다. 그랬을 뿐이었는데 제이는 물론이고 그랜트, 게리까지 자신이 수염을 소중히 여긴다는 착각이나 하고 있다는 게 기가 막혔다.
“제이, 면도날 이리 내라. 안나, 거울을 가져와.”
“각하? 무슨 생각을….”
“직접 하겠다.”
제이는 결연하고 비장하게 면도날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루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디아가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제이에게 한바탕 걸쭉한 욕설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나디아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를 놀라게 할 더러운 단어 같은 걸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대신 나디아에게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제이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제이와 그랜트의 성화 아닌 성화에 이만하면 충분히 어울려주었다.
“아, 안 됩니다. 각하의 손에 칼을 쥐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무슨 여섯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나? 칼은 너보다 잘 다루니 헛소리, 아니, 잔소리 말고 내놔.”
“이 칼을 각하 몸에 가져다 대실 생각 아닙니까!”
“내가 무슨 자해라도 한다고 했나?”
루크는 고개를 살짝 틀어 나디아의 시선에서 비껴난 뒤 소리 없이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놔, 답답하게 굴지 말고!”라고 벙긋거렸다. 제이는 거의 울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두 남자의 멍청한 촌극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안나가 큰 눈을 깜박거리는 나디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다과를 준비할까요?”
그냥 보기 아까우니 맛있는 과자라도 먹으며 구경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나디아는 안나의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곧 점심 식사를 해야 하니 오후에 함께 티타임을 가지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묵음으로 욕을 하는 루크와 묵음으로 울부짖던 제이의 절제된 몸부림을 빤히 보고 있던 나디아가 불쑥 말했다.
“제가 해드릴까요?”
루크와 제이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안나도 놀란 눈으로 나디아를 쳐다보았다. 나디아가 손뼉을 부딪치며 발랄하게 말했다.
“아버지 면도를 어렸을 때부터 도와드렸어요. 어머니가 수염을 싫어하셔서? 매일 깨끗하게 면도를 하셨거든요. 앤더슨, 그러니까 오빠도 도와준 적이 있고….”
어린 딸에게 면도날을 쥐여주고 기꺼이 목과 턱을 내어준 랭커스터 남작의 담력이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나디아는 손재주가 좋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직접 쿠키나 케이크를 구웠다. 부엌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칼과 불을 다루는 데에 익숙한 편이었다. 랭커스터 남작도 나디아가 칼을 익숙하게 다룬다는 것을 알고서 재미 삼아 한두 번 맡겨본 것이었지만, 이런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하니 제이와 루크, 안나가 그의 담력을 높이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디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저 잘해요!”
“…….”
전문가처럼 기술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심스러운 면도에는 자신이 있었다. 드물게 자신의 장점을 어필할 기회라 들뜬 나디아는 두 손을 맞잡고 열렬하게 루크를 쳐다봤다.
루크는 이미 넘어간 상태였다. 당장 제이의 손목을 비틀어 면도날을 나디아에게 안겨줄 기세였다. 나디아가 하고 싶다는 게 면도가 아니라 살해였어도 기꺼이 하게 해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새벽부터 마을을 뛰어다니며 고생을 한 자신은 무엇이 되는가? 제이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적어도 부부 사이에 관한 한 그 어떤 걱정도 참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버려 두는 게 제일이고, 얽혀봐야 헛수고밖에 되지 않는다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으면 될 것을.’
제이가 순순히 면도날을 내밀었다. 루크는 빼앗듯 받아 챙겨서는 곱게 나디아에게 넘겼다.
*
사악, 사악.
눕힌 칼날이 조심스럽게 뺨 위를 스쳤다. 혹여 상처를 입힐까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루크는 나디아라면 상처 한 둘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어도 불만 따위 생기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랬다가는 제가 아니라 나디아가 죄책감에 슬퍼하며 상처받을 테니 그녀가 조심해주기를 바랐다.
나디아는 제가 자신했던 대로 꽤 솜씨가 좋았다. 깨끗하게 밀어내고 걷어내는 손길이 퍽 익숙했다. 이발사가 면도 크림을 꼼꼼하게 발라두었던 덕분에 일이 쉬워진 이유도 있었다.
루크가 눕듯이 기대앉아 고개를 들고, 나디아는 의자 뒤에 서서 신중하게 면도를 했다. 루크는 제 턱에 묻은 크림을 걷어내듯 칼을 눕히는 나디아의 얼굴을 핥듯이 바라봤다.
얼굴이 퍽 가까웠는데도 나디아는 집중했기 때문인지 수줍어하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가 뚫어져라 그의 턱 부근만 노려보고 있었다. 집중을 하면 입술을 쭉 내미는 게 습관인 모양이다. 날렵한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미간에 얕은 주름이 졌고,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따라 흘러내렸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루크도, 나디아도 편안하게 서로를 오래도록 응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빨려 들어갈 듯이, 그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서로만을 담았다.
나디아가 먼저 눈을 깜박였다. 루크는 그녀가 더 편히 움직일 수 있도록 목을 길게 내밀었다. 맥이 뛰는 자리, 면도날이 아무리 작아도 잘 긋는다면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곳이었다.
길고 두꺼운 목이 드러난 자리를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슬쩍 매만졌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에 닿는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돼 있었다. 면도 크림이 끈적하게 손끝에 닿았고, 그녀는 그대로 면도날을 눕혀 긁어냈다.
랭커스터 남작이나 앤더슨의 면도를 도와줄 때와는 달랐다. 그땐 소꿉장난을 치듯 재미있기만 했는데, 지금은….
이 단순한 행위가 이토록 자극적이고 은밀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나디아는 깨끗하게 드러난 목의 맨살을 따뜻한 타월로 닦아내며,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렇게 커다란 사람이 제 손에 온전히 모든 걸 내맡기고 있다. 자신을 손쉽게 찢어발길 수 있는 맹수를 손바닥 위에 올려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착각이겠지만,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거머쥔 것 같았다.
“……다 됐어요.”
“고맙소.”
잠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루크의 목소리는 낮고 어딘가 긁힌 듯 거칠었다. 나디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긴장을 한 탓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빨리 끝나 아쉬운 건지, 무사히 해내 안도한 것인지 스스로도 잘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면도날을 내려놨다. 루크가 젖은 타월로 얼굴을 닦아내는 동안 그녀는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각하….”
“세상에….”
제이와 안나가 차례로 중얼거렸다. 가볍게 심장 근처를 두드린 나디아도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면도에 집중하느라 수염이 사라진 루크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집중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단점이 있었다.
“응……?”
나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9년 만에 드러난 맨얼굴이었다. 루크는 어색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맨질맨질한 감촉이 영 생경했다. 손에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러웠다.
다행히 루크는 피부가 흰 편이었다. 만약 그가 게리처럼 햇볕에 그을려 어두운 피부였다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부분만 희게 얼룩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해서 저러나?’
거울이 없어 스스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게 답답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나디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측근이었던 제이와 안나까지 말도 없이 눈만 깜박이는 게 이상했다. 그는 누구라도 무슨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어?”
오랜 침묵을 깬 건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선 채로 기절해서는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이발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루크의 맨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제이가 그를 보았다.
“헉,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됐다. 일은 잘 끝났으니까.”
“네?”
“보수는 말했던 대로 지급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도 좋다.”
“하지만….”
이발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우물거렸다. 그는 인상대로 선한 사람이라, 일을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높은 보수를 받는 게 양심에 찔린 모양이었다. 그가 말했다.
“각하께서는 화가 나셔서 돌아가신 건가요? 사과라도 전해드릴 수 없겠습니까?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그만….”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변명이었다. 나디아는 이발사가 떠듬떠듬 내뱉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사람은 너무 놀라면 넋을 놓게 된다.
제이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직접 전해드리면 되겠군.”
“네? 하지만….”
이발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 방 안에는 공작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안나, 나디아, 그리고 루크의 얼굴까지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제이에게 속삭였다.
“농담하지 마시고요. 진짜로 죄송해서 그럽니다. 제가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고 잘해드릴 수 있다고 좀 전해주시면….”
“마음은 알겠으니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예?!”
불쑥 튀어나온 대답에 이발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연히 대답은 루크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발사는 루크를 한 번, 제이를 한 번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설마…….
“가?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