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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29화 (29/150)

28화

다행히 제이는 순조롭게 이발사를 수배할 수 있었다.

공작이 무섭게 생겼다는 사실이야 성 아래에 사는 주민이라면 다 알았다.

루크는 흑곰 기사단과 어울리며 마을 술집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무서워서 감히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해도 그가 이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이라는 건 다들 알았다. 기사단이 ‘각하’라고 불러대니 모를 수가 없었다.

새로 수배한 이발사는 두툼한 뱃살과 너그러운 웃음이 인상적인 50대 남자로, 제이는 그가 적어도 신경 쇠약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작업으로 석 달 치 월급을 벌 수 있다는 제안에 혹해 냉큼 제이를 따라왔다. 공작 각하의 수염을 한번 밀어 보고 싶었는데 운이 좋다고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실력은 썩 좋지 않은 것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별반 상관없는 문제였다. 기절만 하지 않는다면 수염을 밀어버리기만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테니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

큰소리를 쳤던 담력 좋은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의 모습은 과히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이는 남자의 젖은 등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을 모르는 척 외면하며 말했다.

“각하, 이발사를 수배해 왔습니다.”

“당장 기절하지 않을 사람을 구해오라고 했더니…….”

루크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제 앞의 남자를 훑고는 피식 웃었다.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새 이발사가 그는 영 미덥지 못했다.

“최선이었습니다.”

“네 능력의?”

“이발사를 수배하는 일로 능력을 인정받아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이는 이발사 수배와 자신의 능력을 연관시키지 않기로 했다. 루크가 비식 웃으며 말했다.

“뭐든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이게 다,”

제이는 뒷말을 삼켰다. 하마터면 사람인지 곰인지 구분할 수 없게 생긴 네 탓이 아니냐고 말이 나갈 뻔했다. 그러나 슬쩍 눈썹을 치켜뜨는 루크를 보고서 제이는 슬쩍 시선을 흘리며 헛기침을 했다.

루크는 혀를 찼다. 새로 온 이발사도 영 못 미더웠으나, 어차피 면도날만 제대로 가져왔다면 상관없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면도날을 쥔 손이 달달 떨려도 고작해야 상처 몇 개 생길 뿐이다. 그 정도 생채기는 루크에게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디아가 오기 전까지는 수염 자체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보니 이게 이리 큰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을, 이렇게 시간을 들여 없애야 하는 줄도 몰랐지….’

고작 수염 밀어줄 이발사를 구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귀찮게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은 제이만이 아니었다. 그렌트도 제이 못지않게 성가시게 굴었다. 수염을 잘못 밀었다가 듬성듬성 남으면 얼마나 추한 줄 아느냐, 말끔하게 밀지 못하면 더 더러워 보이는 인상만 얻는다 등등등.

정말이지 성가시기 짝이 없었지만, 그렌트의 잔소리는 마음에 걸렸다.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었던 늙은 집사의 여린 마음을 신경 썼기 때문이 아니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더 꼴사나운 모양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선뜩했기 때문이었다.

나디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수염을 미는 것인데, 더 안 좋은 꼴이 되었다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렌트가 예를 들었던 염소수염 따위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나디아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기왕이면 좋은 점수를 얻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그럼, 이쪽으로 앉아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루크는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몸짓이었는데도 이발사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다, 제 등 뒤에 선 제이에게 살이 두툼한 허리를 푹 찔렸다. 악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가만히 있어도 무서울 판에 왜 이리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는 말인가? 이발사는 성 인근 주민이었고, 스테이턴 공작이 죄 없는 영지민의 목을 딸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아는 것과 느껴지는 건 다른 거였다.

사람에게는 분위기와 기세라는 게 있다.

스테이턴 공작에게서는 지배하는 자 특유의 위압감이 흘렀다. 수염으로 덮인 얼굴이나 큰 골격,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몸은 당연히 위협적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석 달 치 월급과 그것으로 마실 수 있는 술, 안주, 기뻐할 가족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며 이발사는 준비해 온 면도 준비물을 꺼냈다. 깨끗한 천으로 목 아래를 덮고, 미리 준비해달라고 요청한 따뜻한 타월을 그의 얼굴에 덮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면도 크림의 거품을 냈다. 준비 과정 중에는 공작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그나마 속도가 빨랐다.

눈을 감은 루크는 매우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지만, 이발사나 제이는 기묘하게 긴장해 침묵했다.

이발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타월을 걷어내고, 면도 크림을 꼼꼼하게 펴 발랐다. 눈을 감고 있어 주니 훨씬 나았다. 이대로 면도가 끝날 때까지 눈만 감고 있어 줘도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었다. 이발사는 마치 잠든 맹수의 털을 빗기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잔뜩 기합을 넣어 날을 벼린 면도날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리고 하얀 거품으로 덮인 공작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꿀꺽.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된단 말인가. 수염 한두 번 밀어본 것도 아니고…….

샤악, 소리와 함께 오른뺨의 수염이 깨끗하게 밀려 나갔다.

“루크?”

눈이 번쩍 뜨였다.

반사작용 같은 것이었다. 나디아의 목소리에 반응해 눈을 번쩍 뜬 루크의 커다란 몸이 움찔 떨렸다. 이발사와 제이가 급히 숨을 들이켜고 몇 번째인지 모를 비명을 참았다. 제이는 심장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면도 크림으로 뒤덮인 루크의 얼굴은 이상하게 약해 보였고, 기합을 넣어 벼린 면도날은 위험해 보였다. 면도날로 사람 목을 땄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건만 어째서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제이는 면도 크림 사이로 피가 흐르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다행히 상처가 나지 않았는지 피는 보이지 않았다.

루크도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디아의 목소리가 들려 가장 놀랐고,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숨을 삼키는 이발사와 제이 탓에 두 번째로 놀랐다.

루크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디아에게 물었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턱밑에 두른 천이 마치 어린아이 턱받이 같아서 조금 민망했다.

“나디아? 여긴 무슨 일로….”

“루크, 면도해요?”

“아, 음….”

루크는 나디아의 시선이 향하는 제 턱을 문지르려다 손을 내렸다. 면도 크림이 가득 묻어있어 만질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동그랗게 뜬 녹색 눈동자가 이 와중에도 미치도록 귀엽고 예뻤다. 어떻게 단 한 순간도 예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멍청한 생각을 하며 그녀를 보았다. 루크가 정신을 차린 건, 나디아의 뒤에 서서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안나를 발견한 후였다. 안나는 나디아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나디아를 바라보던 루크가 잠깐 넋이 나갔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라고 눈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나디아가 말했다.

“저 때문에 면도하려고 하시는 거면 안 그래도 돼요. 전 상관없어요. 간지러운 것도 오늘은 잘 참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이건, 나디아….”

“그만큼 기르려면 오래 걸렸을 텐데….”

나디아가 마치 루크의 수염을 살아있는 동물이나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말하는 바람에, 루크는 자신이 귀중한 무언가를 죽여 버리려고 했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고작 수염일 뿐인데.

“별 것 아니오. 어쩌다 보니 기르게 된 거고, 계속 기르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었소.”

“하지만 신사분들에게는 수염이 무척 중요한 것이라고 아버지가 그랬는걸요.”

“……전혀 중요하지 않소.”

수도의 신사들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루크는 제 수염을 반려동물처럼 소중하게 기르거나 다듬지 않았으므로 단언할 수 있었다. 혹시 수도의 신사들은 자신의 털을 소중한 동물처럼 기르며 아끼는 취미라도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역시 수도는 자신과 맞지 않았다.

나디아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루크의 단호한 목소리에 납득은 해준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주겠소?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네….”

루크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한쪽 뺨만 밀어버린 상태였다. 면도를 마무리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면도 크림을 덕지덕지 묻힌 꼴로는 나디아와 대화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서 손을 움직이지 않고 무엇 하느냐는 듯 한쪽 눈을 뜨고서 이발사를 쳐다보았다. 말 없는 재촉에도 이발사는 면도날을 꼭 쥔 채 꼼짝도 못 했다.

“뭐 하고 있나. 계속하지 않고.”

“…….”

감히 영주의 명령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뻣뻣하게 선 이발사가 이상했다. 제이가 다가와서 이발사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발사는 꼼짝하지 않았다. 제이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눈 뜨고 기절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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