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타고나길 장대한 기골을 타고났다. 부지런한 훈련으로 단단한 근육이 붙어 살아있는 흉기와도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어리다는 이유로 그를 얕보았던 사람은 루크가 얼마나 위협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수염이 더해지니 사납고 험악한 인상이 완성되었다. 수염이 없었던 시절에도 인상이 나빴던 매서운 눈매는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후 2년 정도는 집사 그렌트가 그의 수염 모양을 관리해주었다.
자신을 보고 따라 하는 어린 공작을 책임져줘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봉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루크는 제 얼굴에 달린 수염을 다듬는 게 귀찮아졌다.
루크가 수염을 기르려고 했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그냥 기르기만 하는 것으로 다소 애송이 같던 뽀송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사납고 험악한 이미지를 얻었다. 여기에 모양까지 더할 필요는, 적어도 루크에게는 없었다.
지나치게 야성적인 이미지를 얻고 말았지만, 제이는 루크가 나름대로 제 수염을 아끼는 줄 알았다.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은 으레 그것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하지 않던가? 실제로 집사 그렌트는 사적인 술자리에서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하고는 했다. 제이에게도 수염을 기르라 왕왕 권했다. 그러니 티는 내지 않아도 아끼겠거니, 모양 좋게 다듬는다면 몰라도 아예 밀 생각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원래 얼굴이 어땠더라?’
제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 봐야 9년이었다. 그런데도 수염을 기르기 전 얼굴이 삭제된 것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꽤 기억력이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린 시절을 보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눈앞의 남자,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어린 시절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과 어린 시절은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쨌거나 수염을 모조리 밀어버리겠다는 루크의 선언으로 제이는 일이 편해졌다. 그는 원숭이를 사람으로 빚을 실력자 대신, 흉악한 공작의 눈초리와 기세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담력이 좋은 이발사를 구하기만 하면 됐다. 이발사도 칼을 드는 직업이니 담력이 좋은 사람을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
아마.
*
나디아는 대부분의 어린 여자애들이 그렇듯이 제 미래의 결혼 생활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나디아는 여느 귀족 영애들에 비해 그럭저럭 조건이 괜찮은 편이었다.
성공적인 결혼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행복한 결혼을 위한 조건이 괜찮았다.
비록 그녀의 집안인 랭커스터 남작 가문은 영지도 없고, 매우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덕분에 나디아는 정략혼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와 결혼하렴.”이라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랭커스터 남작 가문의 남매는 모두 연애 결혼을 했다.
장남 앤더슨은 무도회에서 만난 3살 연하의 아가씨와 일찌감치 결혼했고, 장녀 일리야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남자와 결혼했다. 정략혼이 당연한 귀족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랭커스터 남매는 매우 운이 좋고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디아는 자신도 당연히 연애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애, 그리고 결혼, 행복한 가정으로 이어지는 장밋빛 미래.
가정을 이룬 앤더슨과 일리야는 가끔 성가시고 힘들어했지만 대개 행복해 보였다. 조카들은 천사처럼 귀여웠다. 다정한 랭커스터 남작 부부처럼 그들도 자신의 배우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나디아는 당연히 연애결혼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연애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기회도 없었지만, 없어서 아쉽지도 않았다.
나디아는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좀 덜하지만, 혼자 낯선 사람과 남겨지는 건 끔찍했다. 긴장이 되어서 금세 손바닥이 푹 젖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신사들에게도 나디아에게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디아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녀의 가족이 있었다. 장남 앤더슨이나 장녀 일리야가 나디아를 얼마나 끼고 도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제아무리 나디아가 마음에 들어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티는 두 사람의 눈치를 받으면서까지 연애를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불편해했으니 연애는 퍽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디아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그녀의 결혼이나 연애는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을 뿐이라 조급하지 않았다. 구체적이지 않은 미래의 어느 순간.
막내딸을 지나치게 사랑한 랭커스터 남작 부부는 내심 그녀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자신들의 품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고 우리와 살자꾸나,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렴.
‘어머니, 아버지께….’
나디아는 잉크에 적신 깃펜으로 편지지 윗줄을 채웠다. 유려한 필체였다.
본인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갑작스럽기만 했던 결혼이었지만? 나디아는 불행하지 않았다. 불행할 뻔했고, 사실 며칠 전까지는 불행하기도 했다.
결혼은 했는데 남편은 찾아볼 수 없었고, 지나치게 극진한 대접에 위장이 콕콕 쑤셨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몸은 편안했어도 마음은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디아는 이곳에서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가족처럼 편안하지는 않아도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루크…. 루크 보고 싶다.’
고작 편지의 첫머리를 써놓고서 금세 딴생각에 빠졌다.
편지지를 펼쳐두고 깃펜에 잉크를 찍은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부모님께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은데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디아의 머릿속은 온통 어젯밤 루크와의 키스로 가득 찼다. 혀를 내어 비비고, 입천장을 삭 긁고, 단단한 이를 뭉근한 살덩이로 밀어내는 감촉. 여린 점막 안쪽을 훑고 핥을수록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저릿한 쾌감에 잠식됐다.
‘키스가 이런 건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해봤을 텐데.’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가 꿈을 꾸는 듯이 몽롱해졌다.
끊임없이 주고받았던 키스도 기분이 좋았지만, 그보다 그녀를 들뜨게 한 건 루크의 눈동자였다. 무섭게만 느껴졌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검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자신만 보였다. 나디아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으으으, 어떡해….”
왜 이러지? 진짜 왜 이렇게, 루크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지? 살짝 뗀 나디아의 손가락 사이로 붉어진 뺨이 드러났다. 얼굴이 홧홧하고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어젯밤 이전에도 루크를 생각하면 가슴 안쪽이 따뜻해졌다. 갑작스러운 결혼 때문에 놀라고 힘들었지만 오해도 풀렸고 사과도 받았다. 첫날밤엔 기절할 정도로 무서웠던 루크의 외모도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익숙해지기도 했다. 수염이 좀 간지럽긴 하지만 말이다.
그를 알면 알수록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신했다. 루크는 나디아의 감정과 의사를 존중하고 배려하려고 애를 썼다. 투박하고 서투른 호의는 알기 쉽게 와닿았다.
호의에는 호의를 돌려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고, 나디아는 기왕이면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응하는 공작 부인이 되고 싶었다. 잘하고 싶었다. 잘해서, 앤더슨과 일리야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기를 바랐다. 완벽한 부부가 되고 싶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앤더슨과 일리야가 찾아냈던 사랑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루크와 함께라면 행복한 가정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뢰와 호의로 이루어졌던 어제까지는 이렇게 미친듯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온통 그의 눈동자로 가득 차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의 생각만 하고 있지 않았다.
제 얼굴이 담긴 검은 눈동자를 떠올리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막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하고, 피부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다. 자꾸 보고 싶고, 궁금하고,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싶었다. 어젯밤 잠들어버린 게 아쉽기만 했다. 난 왜 잠들어가지고….
‘편지! 편지 써야지!’
나디아는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딴생각만 하고 있다가는 날이 새도 편지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부모님이 안심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상세히 편지를 써야 했다. 일리야에게도, 앤더슨에게도 따로 편지를 보내두어야 할 것 같았다. 틀림없이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할 말을 다 쓰고 나면 오른손이 퍽 아플 것 같았다. 그리움만 담아도 지면이 모자랐다.
‘다 쓰고 나면 루크 보러 가야지! 방해가 되지 않게 잠깐만 보고 와야겠다.’
나디아는 부모님, 앤더슨, 일리야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동안 여섯 번 얼굴을 감싸 쥐었고, 네 번 저 혼자 발을 동동 굴렀으며, 아홉 번 달콤한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