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5. 수염 뒤에 사람 있어요
스테이턴 성은 크고 넓다.
제국과 역사를 함께 한 오래된 가문이니만큼 성의 규모도 컸다. 보수 관리를 부지런히 하여서 낡거나 음침하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결코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성벽부터, 스테이턴 성의 상징이 그려진 깃발까지….
스테이턴 공작 가문은 본디 손이 귀했다.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도 공작 가문 직계는 다섯을 넘어가지 않았다. 많아봤자 자식은 셋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하나, 혹은 둘이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그의 부모는 딱 그 하나만을 낳았다.
스테이턴 공작 가문이 손이 귀한데도 명맥이 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대부분의 명줄이 길기 때문이었다.
루크의 부모를 제외하고, 스테이턴 가문의 사람들은 대개 여든을 넘겼다. 루크의 조부 또한 86세에 죽었다. 현재 먼 방계를 제외하면,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직계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단 하나였다. 얼마 전 결혼해 새로운 스테이턴이 된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을 포함해도 둘이다.
만약 스테이턴 성에 공작 가문의 직계만 살았다면 이 성은 한층 더 을씨년스럽고 침울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성에는 공작 가문 직계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 큰 성을 관리하는 집사, 시녀장, 그들 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 그리고 흑곰 기사단, 영지를 관리하는 사무관들….
공작 가문 직계가 사용하는 구역과 상주 고용인들의 구역은 나뉘어져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같은 성 안이었다.
스테이턴 공작을 곁에서 보좌하는 최측근, 제이드 앨런은 성 안에 숙소를 배정받아 지내고 있었다. 성 밖에도 그의 가족이 사는 집이 따로 있었지만, 그는 대개 성 내부의 숙소에서 살았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그의 업무 사정상 매일 성 밖의 집을 드나드는 것이 더 피곤하다는 이유였다.
오래된 성 내부의 방은 넓고 호화스러웠다. 일단 가구들이 모두 이제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고, 보수 관리를 하며 남아도는 재정의 일부를 끌어다 썼기 때문에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보수 관리에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쓰는 게 아니냐는 루크의 질문에 집사는 “공작 부인도 안 계시고 공자님도 안 계셔서 할당된 예산이 남아돕니다”라고 대답했다. 루크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자 뾰족한 짜증을 담아 “공작 각하께서도 품위 유지비를 한 푼도 가져다 쓰지 않고 계셔서 재정이 여유롭군요!”라고도 말했다.
어쨌거나 제이드 앨런, 그러니까 제이는 성 내부의 호화로운 방에서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이 밝기는 했지만 아직 아침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벌컥! 쾅!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제이는 그 자리에서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발가벗고 남의 눈에 노출될 뻔하지 않았나! 그는 자신의 부지런함에 안도하며 무례한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헉….”
“……기분 나쁘게 사람 얼굴 보고 질색하지 마라.”
루크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사람 열다섯은 죽이고 온 듯이 살벌한 얼굴이었다.
“가, 각하, 이 새벽부터….”
제이는 말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제 상관의 중심부를 보았다.
“…….”
“…….”
성추행 같은 눈길이 아니라 그저 확인일 뿐이었다. 요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새벽부터 벌떡벌떡 일어나는 이유야 단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공작 부인에게 고문을 당하다 왔는지, 아니면 오늘에야말로 소원이 성사되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루크가 제이의 눈길을 읽고 으득 이를 갈았다. 제이는 재빠르게 눈을 정면으로 복귀시켰다.
“이발사.”
“예?”
루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흉흉하고 살벌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이발사를 불러와라.”
“아직 실력 좋은 이발사를 수배하지 못했….”
“시끄럽다! 고작 수염 밀어버리는 데 실력은 무슨!”
“각하, 이발사를 비하하는 발언은?.”
“비하가 아니라 단순히 밀어버리는 작업에 실력 따질 것 없다는 말이다!”
“……설마 전부? 밀어버리시려고요……?”
써보지도 못한 성기를 잘라 버리겠다고 하질 않나, 이번에는 오랫동안 길러온 수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밀어버리겠다고 한다.
제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루크는 대체 왜 제이가 저토록 충격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치켜떴다.
“네 녀석이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내가 직접 밀어버리고 싶은 걸 참아 주는 거다.”
“…….”
“정오까지 이발사를 수배해 데려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다 밀어버리는 수가 있다. 알겠느냐?”
“예, 알겠….”
“그리고!”
루크는 어린아이 머리통 만한 주먹으로 벽을 쾅 내리찍었다. 힘겹게 보수 관리를 하고 있는 성의 석벽이 쩍 갈라졌다.
“이번에는 쉽게 기절하는 녀석은 데리고 오지 마라.”
“…….”
저 얼굴을 보고도 멀쩡할 일반인이 과연 있을까….
“유능하다는 네 말, 믿겠다. 실망시키지 마라.”
제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발사를 수배하는 일로 제 유능함을 증명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이는 다소 막막한 기분으로 성을 나섰다.
다행히 그에게는 미리 조사해 놓은 리스트가 있었다. 흑곰 기사단 내에서 깔끔하기로 유명한 기사들과 가장 멋스러운 집사에게 추천을 받은 이발사 리스트였다. 안타깝게도 가장 실력이 좋다는 이발사는 이제 데리고 올 수 없겠지만, 아직 다섯 명이 넘는 이름이 리스트에 남아 있었다.
‘수염을 모조리 밀어버릴 작정이셨다니….’
진작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일이 편했겠는가? 제이는 억울해졌다.
제이는 루크에게 수염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어디까지나 ‘정리’였기에 원숭이도 사람으로 빚어 놓을 실력자를 찾아 헤맸던 것이었다.
무작정 밀어버리는 데에 뭐 얼마나 많은 기술이 필요하겠는가?
루크는 성인이 되기 직전부터 수염을 길렀다.
그가 수염을 기르게 된 데에는 집사 그렌트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렌트는 회백색으로 센 머리칼을 깔끔하게 다듬어 넘기고, 같은 색의 수염을 멋들어지게 다듬었다. 덕분에 그는 나이보다 더 젊어 보였고, 중후한 신사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호평을 한몸에 받았다.
아마 처음엔, 애송이 같은 인상을 벗어버리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루크의 조부가 돌아가시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갓 19살이었다. 제아무리 선대 공작이 영지를 잘 다스렸다고 해도, 세대가 교체되는 시기에는 어쩔 수 없이 불순한 무리들이 생기게 돼 있었다. 빈틈을 보면 무너뜨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까.
물론 루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의 혹독한 수련-이라 쓰고 고문이라 읽는다-을 받으며 자란 루크는 타고나길 호전적인 전사였다. 그랬다, 그는 기사보다 전사에 어울리는 남자였다. 필요하다면 명예는 땅에 던져 제 발로도 짓밟을 수 있다,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다. 루크는 조부의 가르침을 뼛속까지 새겼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와중에도 지켜야 할 것은 있었다. 공작령의 안전이나 평화 같은 것이었다. 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 공작령을 풍요롭게 유지하고 다스릴 의무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라고 배웠다. 솔직히 조부는 가끔 루크에게 “나라 같은 건 망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눈곱만큼은 영지의 평화에 영향을 미칠 테니 웬만하면 사이좋게 지내라.”라고도 말했다.
어쨌거나 갓 19살이 되었을 때조차 호락호락하지 않던 루크는 자신이 조부만큼은 아니어도 어리다고 얕잡혀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감히 반기를 드는 괘씸한 것들을 재기할 수 없게 밟아주면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제이는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역시 나이가 좀 들어야 하나.”
“감히 각하를 얕보고 덤비니 불순분자 처리에는 편리하지 않습니까?”
“편리했지.”
“그러니 당분간은 놔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편리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빠.”
“…….”
“누군가 나를 비웃는 건 상관없다. 내 귀에 들리지만 않으면 그만이고, 들렸을 때에는 그만한 대가를 돌려주면 돼.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조부가 살아계실 때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어. 다시 말해, 내가 얕잡혀 보이지 않았다면 굳이 그들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지.”
갓 성인이 된 어린 공작을 얕잡아 보지 말라는 게 무리였다. 조금 억지 같기는 해도 제이는 루크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선대가 물려준 ‘스테이턴 공작 가문’을 조금도 잃기 싫은 것이다. 조부의 빈자리로 생기는 틈마저도.
“나도 안다. 이건 겉보기일 뿐이야. 결국 시간을 들여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뿐인 행세라도 필요하다. 난 누구에게도 얕잡혀 보이지 않겠다.”
그 말대로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작위를 물려받은 지 정확히 2년 만에, 훌륭하게 공작령을 휘어잡았다. 적어도 공작령 안에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좀… 지나치게… 위엄이 생겨 버렸지….’
수염 하나 없이 뽀송뽀송한 애송이였던 시절의 얼굴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