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나디아, 눈이 빨간데.”
루크는 깜짝 놀랐다. 나디아의 커다란 눈은 울기라도 한 것처럼 붉었다.
“혹시 울었소?”
“아뇨, 아니에요. 그냥 독서를 좀…….”
“스테이턴 영지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해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아직 공부는 시작도 안 했는 걸요….”
나디아는 어설피 웃었다. 하루 종일 공부는커녕 소설책에만 빠져 있었으니 루크의 걱정이 그저 민망했다. 사실 그녀는 안나를 비롯한 성의 간부들이 가장 바라는 공부를 열심히 한 셈이었지만 말이다.
루크는 나디아의 부정에도 완전히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녀가 혹시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울었을까 봐, 그러고도 걱정을 끼칠까 봐 말도 못 하는 것일까 봐 마음이 아팠다. 저 눈은 분명 울었거나, 혹은….
‘밤샘 업무를 하고 난 후 사람들 눈이 저렇지 않았었나?’
밤새 문서와 싸움을 하고 난 뒤에 저리 충혈이 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어젯밤에도 나디아는 잘 잤다고 했고, 오전에 보았을 때도 눈은 깨끗했다. 그렇다면 몰래 울었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잘까.”
루크는 비장하게 말했다. 그는 침실에 오기 전에 결연한 다짐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온 참이었다. 허리 아래, 다리 사이에 붙은 묵직한 것은 그의 일부가 아니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붙은 혹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딴 것에 지배당해 짐승이 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인간의 이성을 유지할 것이었다.
절대 나디아가 싫어할, 놀랄, 무서워할 짓은 하지 않겠다.
나디아가 웃어 주기만 한다면 그는 다리 사이에 달린 쓸모없는 기관 따위는 잘라낼 각오도 할 수 있으니까……!
“이리 와요, 루크.”
침대 근처에 서 있던 나디아가 베개 옆에 앉으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루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그것처럼 비장미가 넘쳐 흘렀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자 나디아가 팔을 뻗었다. 루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상체를 숙여 주었다. 나디아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이, 이대로 쓰러질 수도 없고…….’
목에 나디아를 매달고 그 무게를 고스란히 버티며 루크는 고민했다. 이대로 나디아가 이끄는 방향으로 쓰러지면 그는 그녀의 위로 쓰러지게 된다. 그러면 그녀의 말랑한 몸이 고스란히 닿을 것이고, 의식상으로는 이미 떨어진 기관이지만 꼿꼿하게 힘을 받은 그곳도 그녀에게 닿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을 보는 나디아의 눈빛이 이리도 비장해 보이는 것일까? 게다가 붉게 충혈되어 그런지 무언가를 바라듯 뜨거운 듯이 느껴졌다. 대체 왜……?
그런 생각으로 버티던 중이었다. 나디아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정신이 없다 못해 미쳐서 착각을 하나, 싶던 루크는 입술에 닿은 촉감에 눈을 크게 떴다.
“……?!”
나디아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포개듯 겹쳐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나디아는 그저 입술을 가져다 대기만 했다. 다만 뺨에 키스하듯 바로 떼지는 않고 부드럽게 눌러 봤다. 입술로 느끼는 타인의 입술은 예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말랑거렸다. 온몸이 단단할 것 같은 이 남자조차 입술은 부드러웠다.
루크는 목 안쪽으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입술을 벌려 나디아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아랫입술을 쏙 넣어 빨고, 그대로 혀를 밀어 넣어 그녀의 혀를 끌어내 얽고 비볐다. 굵은 살덩이는 축축했고, 부드러운 한편 오돌토돌한 돌기가 느껴졌다.
누군가와 닿을 줄은, 그것도 이리 노골적으로 얽어 비빌 줄은 몰랐던 부분이었다. 두꺼운 혀가 입안을 헤집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꺾었다. 그의 목에 걸친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혀끝이 입천장을 훑고 혀를 얽어 비비고 문질렀다. 볼 안쪽, 혀뿌리, 목구멍 안쪽까지 더듬을 듯 깊숙이 들어와 훑기도 했다. 입안에 이다지도 많은 신경이 몰려 있었던가? 감각이 올올이 곤두서고 예민해졌다. 비빌수록 기분이 좋았고, 강하게 혀를 빨자 등줄기가 짜릿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이 흐리멍덩해지고 나른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전신이 깨어나는 것 같으면서도 머리는 어딘지 몽롱해졌다.
이런 게 키스였다니. 나디아는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그저 입술을 맞대는 스킨십과는 달랐다. 굿나잇 키스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굿나잇 키스나 굿모닝 키스에서는 ‘키스’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디아는 이제 그런 걸 키스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으응….”
포개진 입술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고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루크의 몸이 크게 흠칫 떨렸다. 그는 무언가 깨달은 듯 접붙이고 있던 입술을 순식간에 떼내었다. 키스에 흠뻑 빠져 있던 나디아는 갑작스럽게 떨어져 나간 것이 불만스러워 목 안쪽으로 신음을 흘렸다.
“미, 미안하오! 그만 이성을….”
“…으응….”
나디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물기 젖은 녹색 눈동자가 빨려들 듯 신비롭고 몽환적이었다. 루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눈가가 붉어진 나디아의 얼굴에는 그녀를 만난 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나디아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를, 욕망으로 흐려진 표정.
루크는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타는 듯 갈증이 일었다. 끓어오르는 물처럼 몸속이 뜨겁고 머릿속이 흐려졌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피가 아니라 어느 미친 의사의 약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극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나디아는 무언가를 바라는 듯 붉어진 눈으로, 팔로 제 목을 끌어당기고 입술을 부딪쳤다. 한계까지 몰려 있던 인내는 그 간단한 접촉에도 쉽게 뚝 끊기고 말았다. 그녀는 그저 베이비 키스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굿나잇 키스를 하듯 가벼운 접촉만 바랐을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뚝 끊긴 이성 너머로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러나 이미 루크는 나디아의 입술을 혀로 열고 있었고, 촉촉한 점막이 달라붙듯 느껴진 순간 잠깐 떠오른 생각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의 피부가, 살이 이토록 먹음직스러울 수 있었던 것일까? ‘네가 너무 달아서’라는 멍청한 말은 진짜였던 것이다. 입속에 숨은 혀를 얽어내 빨아들이고, 고인 타액이 흐르지 않게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루크가 정신없이 나디아의 입안을 애무하고 음미하는 동안 나디아는 밭은 숨을 헐떡이며, 서툴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까 키스에 정신없이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나디아의 책임도 있었다. 루크는 정말 ‘처음에는’ 이성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이성을 되찾아오려고,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생각이란 걸 시도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디아가, 혹시라도 이런 걸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려고 노력하며,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아 버리는 바람에? 루크는 그녀에게 확답을 듣지도 못한 주제에 이성을 놓치고 욕망에 휩쓸려버린 것이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들은 아직 바싹 붙어 있었다. 루크는 나디아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비록 그녀의 숨과,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크림색 살결, 봉긋하게 솟은 가슴의 굴곡, 무엇보다 배꼽 아래로 빈틈없이 달라붙은 몸의 체온 따위가 그의 머리를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
녹색 눈동자에 이성이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튀어나온 말은 루크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더럽게 무슨 짓이냐, 사람이 개처럼 왜 혀를 내미냐 등등의 비난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붉게 달아올라 몽롱했던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가 원망으로 차올랐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글썽거렸다. 루크는 나디아의 머리 옆을 짚고 있던 팔을 펴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울지 마시오! 내가 잘못….”
“왜 그만두는 거예요?”
“잘못했… 응?”
무조건 내뱉던 사과가 뚝 멎었다. 나디아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눈을 꾹 감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루크는 그녀의 눈물과 뺨을 핥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멈추는 거냐고요…. 루, 루크는, 루크는….”
나디아는 훌쩍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가 싫은 거예요? 나, 나로는 부족한 거죠? 내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
루크는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족해? 싫은 거냐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나디아는 언제나, 루크에게 과분하게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나디아.”
“루크와 진정한 부부가 되고 싶어요. 혹시 나로는 안 되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말해줘요…….”
“……말했듯이, 당신은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소. 나는?.”
평소 말보다 행동으로 제 뜻을 보여주던 루크는 이 순간 화술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았던 과거를 후회했다. 레너드처럼 달변가는 아니더라도 꼭 해야 할 말을 꼭 필요한 순간 적절하게 고를 수 있는 기술은 배워두어야 했다.
“당신이 날 싫어할까 봐.”
“…….”
“날 무서워하고, 징그럽다고 여길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요.”
“…….”
“당신을 놀라게 하기는 싫었으니까.”
천천히 말을 마친 루크가 나디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디아에게는 오로지 그의 눈만 보였다.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나디아가 말했다.
“나는 키, 키, 키스가 너무 기분 좋았는데, 더 하고 싶은데, 하루 종일이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싫지 않았다는 뜻이군.”
나디아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크는 픽 웃었다. 그녀는 너무나 솔직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