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백작 부인의 인생>.
나디아는 기대감에 부풀어 책장을 쓸었다.
책은 나디아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두께였다. 언니 일리야가 공원 산책을 하거나 오후의 티타임을 즐길 때마다 들고 다니며 읽었던 책을 돌고 돌아 이 먼 스테이턴 공작령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는 나디아 자신도 어른이니 일리야도 말리지 못할 것이다.
사실 나디아는 독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햇살 좋은 날에는 공원을 걷고 싶었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고 싶었으며, 우울할 때는 달콤한 과자를 잔뜩 만들어 먹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나 가족이 있어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혼자 시간을 보낼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언니 일리야는 달랐다.
일리야는 얌전하고 말수가 적었다. 그녀가 대화를 길게 나누는 사람은 고작해야 가족과 남편밖에 없을 정도였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리야는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혼자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기는 걸 좋아했다.
어렸을 때에는 혼자 있는 언니가 너무 쓸쓸해 보여 일부러 더 다가가고 귀찮게 굴었지만, 나디아도 이제는 언니가 그 시간을 진심으로 즐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언니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차 한 잔과 함께 책을 읽는 언니의 모습은 나디아가 보기에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흉내라도 내 보려 몇 번인가 언니의 옆에 앉아 책을 읽었지만, 나디아는 일리야처럼 진심으로 즐기지는 못했다.
햇살을 받고 있으면 졸음이 쏟아져, 꾸벅꾸벅 졸다가 끝내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나디아는 일리야가 혼자 책을 읽을 때에는 부모님이나 오빠, 혹은 오빠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일리야의 아이들과 놀아주어도 시간은 잘 갔다.
‘아이들에게 너무 과자를 먹이면 안 된다고 혼이 났었지….’
나디아는 문득 추억에 젖었다. 조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헤어진 지 아직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무척 그리웠다. 어린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던데, 나중에 만날 때쯤에는 너무 자라 못 알아보는 게 아닐까.
가족들은 막내딸 나디아를 무척 아껴주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대개 들어주려 했고, 험한 일은 무엇 하나 하지 않게 해주었다. 부모님이 허락한 가장 위험한 일이 승마일 정도였다.
언니 일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9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어찌나 귀여워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동생이 아니라 딸을 대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적어도 과보호하는 면에서는, 딸보다 더한 부분이 있기도 했다. 정작 일리야의 어린 딸은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걱정을 사는 아이였는데 말이다.
나디아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오빠, 언니, 하물며 그들의 배우자나 자식까지도? 나디아를 마치 성역처럼 다뤘다. 분위기라는 건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일리야는 자신이 즐겨 읽는 연애소설을 나디아가 들춰 보지도 못하게 했다. 순진한 동생이 읽기에는 너무 자세하고 노골적인 묘사들이라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의 인생>은 일리야가 연애 소설 중에서도 손에 꼽는 수작이었다.
묘사가 지나치지도 않고, 감정선과 사건을 적절하게 조합해 풀어나가는 진행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연애 소설이라면 신작이 나올 때마다 섭렵하고 있었지만, 늘 가까이 두고 여러 번 반복해 읽는 책은 <백작 부인의 인생>이 유일했다.
‘언니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니 얼마나 재밌을까?’
책을 즐겨보지 않는 나디아마저 흥미를 느끼고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물론 나디아는 <백작 부인의 인생>이 연애 소설인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저 여인의 일생을 다룬 소설이라고만 여겼다.
첫 문단은 평범했다. ‘마리아’라는 여성의 소개로 이루어진 문장이 이어졌다…….
*
퍽 두꺼운 책인데도 순식간에 읽혔다. 나디아는 자신이 이렇게 빨리 책을 읽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오랫동안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엉덩이를 떼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배도 고프지 않을 정도였다.
나디아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두꺼운 책장을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리야 언니…….’
과연 언니의 안목은 대단했다. 그러나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도 들었다. 지적이고 조용한 언니의 취향을 낱낱이 알아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포장된 노골적이고 은밀하며 음란한?.
‘히야아아아악….’
부부가 침대에 누워서 ‘꼭 끌어안고 잔다’는 게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을 줄이야. 나디아는 책장을 덮고서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쳤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놓치고 말았던 다른 사람들의 미묘한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들, 그리고 루크가 그녀를 보며 불편해 보였던 순간순간 말이다.
‘어머니는 왜 이런 걸 하나도 알려주지 않으셨던 거야?!’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다면 이리 바보처럼 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어린 나디아가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라고 물을 때, 부모님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부가 같이 누워 꼭 끌어안고 자면 생긴단다.”라고만 대답해주었을 뿐이었다.
나디아는 “끌어안고 자면”과 “생긴단다” 사이에 이토록 많은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아직 책으로 배우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 생략된 과정이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좋다면, 그녀는 그동안 너무 많은 손해를 본 셈이었다.
“책에 나오지 않은 부분도 있을지 몰라.”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백작 부인의 일생>은 마리아라는 여성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성애에 대한 부분은 무척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노골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다. 주로 여성의 기쁨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는데, 여성과는 다른 남성의 신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표현은 삼가고 있었다.
그냥 허리 아래에 여성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길쭉하고 단단한 것이 있다고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그걸…….
“…….”
끼릭, 덜컹!
나디아는 눈만 굴려 벽난로 위를 흘긋거렸다. 마냥 괴이쩍던 시계판의 그림과 태엽을 감으면 움직이는 망측한 조각상이 그곳에 있었다. 온종일 까닭도 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장악했던 그 조각상들 말이다.
모르고 볼 때에도 망측했던 그 조각상은 이제 똑바로 보기도 부끄러웠다. 나디아는 여전히 저게 “예술적”이라는 스테이턴 성의 기준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저 자세가 무엇을 하는 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끌어안고 자면”과 “생긴단다”의 사이에 있는 행위였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가 다르다는 건 나디아도 알긴 했다. 그냥 알기만 했던 게 지금까지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디아는 결혼을 한 어른이었고,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라 멍청하게 굴었지만 이제는 다 알게 됐다.
루크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본의 아니게 그에게 또 멍청한 꼴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고 창피했다. 또 고마웠다. 그는 나디아가 부끄러울까 봐 배려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 준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인가.
나디아는 결심했다.
루크가 나디아의 무지를 지적하지 않고 묵묵하게 기다려주었으니, 오늘 밤에는 그녀가 먼저 다가가기로 말이다. 같이 누워 잤는데도 불구하고, <백작 부인의 일생>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 진정한 부부가 되지 못했다.
다정하고 착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사람. 루크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 안쪽이 따뜻해졌다.
나디아는 루크와 진정한 부부가 되고 싶었다. 적어도 모자란 공작 부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 결혼을 했으니, 루크가 자신을 배려해주며 마음을 써주어 행복한 만큼은 그도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힘낼 것이다.
나디아는 덮었던 책장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백작 부인 마리아’의 성애 부분을 유심히 읽고 또 읽었다. 작가가 유려한 표현으로 얼버무려 놓은 부분은 앞뒤 상황을 꿰어맞추어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기도 했다. 시계의 노골적인 그림과 조각상의 움직임이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루크와 자신이 이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백작 부인 마리아’가 말하는 ‘기쁨’이며 ‘행복’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가장 궁금한 건 바로 키스였다.
부모님과 언니, 오빠와 주고받던 굿나잇 키스와 ‘백작 부인 마리아’가 말하는 키스는 너무나 달랐다. 입술과 입술을 그저 부딪치는 게 아니라 입을 벌리고 혀를 얽는 행위였다. 나디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전에 보았던 루크의 입술이 떠올랐다.
‘그 입술에 키스하면 어떨까? 어떤 기분일까? 마리아처럼 기분이 좋아질까? 다른 사람의 입술은 어떤 촉감이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나디아는 <백작 부인의 일생>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