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22화 (22/150)

21화

“결혼도, 당신의 뜻은 아니었지.”

“…….”

“변명 같겠지만, 아니,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나디아는 말없이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초조한 듯 연신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는 진지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저 입술을 과일 베어 물듯 물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미친 게 아닐까.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나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래서 청혼을 한 거요. 내 신분이나 가문의 이름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소. 그게 당신에게 부담이 되리라고도 미처….”

“나에게 반했어요?”

“……”

“우리, 이전에도 만났었나요? 대체 언제?”

“…….”

루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신이 공원에서 구해주려 했던 부랑자가 바로 나요, 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억지로 결혼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은 거요.”

“……그야 처음에는 놀라고 무서웠어요.”

루크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나디아가 눈을 내렸다.

“루크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좋은 분들인지 몰랐으니까요. 이곳은 너무 넓고, 낯설고….”

결혼이 결정된 날부터 첫날밤, 그리고 이 성에 와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위장이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외롭고 쓸쓸했다.

“게다가 성에 오자마자 아팠잖아요. 사람이 아프면 약해지니까… 조금 울기도 했고요.”

“……알고 있소.”

“루크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말을 뱉고 보니 마치 따지는 듯 뾰족하게 들려 나디아가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정말 놀라서 물은 거였다. 다행히 루크는 마음이 상하지 않은 듯했다.

“…부인이 밤새 앓고 있다는데 걱정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소.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몇 번 상태를 살피러 갔었소.”

말하고 보니 왜 이리 스토커 같은지 모르겠다. 의식이 없는 사이 몰래 다녀갔다고, 그녀가 불쾌해하면 어떻게 하나.

“날, 걱정해줬어요…?”

“……당연한 거요.”

“……루크….”

손끝부터 감동이 짜르르 타고 올라왔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루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떤 말로도 이 감동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피부를 붙이면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녀는 단단한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대어 비볐다.

“고마워요. 난 그때 내 편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때도 루크는 내 편이었군요. 내가 몰랐던 것뿐이었어.”

“…….”

“과정이야 좀 놀라고 무서웠지만, 난 지금 행복해요. 이렇게 루크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제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인걸….”

나디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루크가 화답하듯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어서 가슴 깊숙한 곳부터 행복이 차올랐다.

스테이턴 공작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청혼을 했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녀는 스테이턴 공작을 만난 적이 없었고, 부모님도 스테이턴 공작 가문과 그 어떤 인연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인가, 어째서 나인가….

‘루크는 나한테 반해서 청혼한 거였어.’

루크를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가면무도회에서 스치듯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의 외모는 어떤 의미에서든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자신도 루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다소의 어긋남 따위는 어떤 문제도 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던 나디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배를 찌르는 안장의 툭 튀어나온 부분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뭐지. 왜 만들어놓은 부분이지? 루크의 가슴을 끌어안았을 때부터 배를 꾹 누르고 있는 그 부분을 확인하려 손을 뻗었다.

탁!

루크가 나디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크?”

“…이만, 이만 돌아가지 않겠소?!”

“벌써요?”

“아직 아침 식사도 들지 않았지. 벌써 점심 식사를 할 시간에 가깝소.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

어쩐지 루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했다. 몸이 안 좋은 걸까.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크가 고삐를 당겨 성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동안, 나디아는 그에게 붙잡힌 손목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쾅!

집무실의 두꺼운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힌 루크는 매서운 눈으로 사냥감을 찾았다. 제이는 지금이라도 책상 밑에 숨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지만, 어차피 금세 들키고 말 발악일 것이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각오를 다졌다. 저 눈을 부라리는 맹수가 당장 제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아도…….

‘아니지, 각하는 사람이었지!’

사람은 도구를 쓰는 동물이므로, 루크는 그가 즐겨 쓰는 투핸드소드로 목을 칠 것이다……. 이미 자신이 루크에게 살해당하는 게 기정사실이라 확신한 제이가 바들바들 떨었다.

사실에 기반한 독설이나 직언으로 인한 분노였다면 제이도 이토록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입이 찢어져도 바른말밖에 할 줄 모르는 종자라, 세 치 혀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바른말을 한 대가로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고작, 주군의 부부 생활을 도우려는 의도로 장난 좀 쳤다고 죽는 건 너무 꼴사납지 않은가?

‘아니, 솔직히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는 아니지 않았나?’

어쨌든 찰싹 달라붙어 데이트를 즐기지 않았는가? 그 과정에서 조금, 아니, 좀 많이…… 괴로워졌다고 해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다지 탓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남자로서 루크의 상황을 동정해놓고, 제이는 잘도 합리화를 시도했다.

공작 부인이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그녀를 납치하듯 데리고 온 루크를 아주 조금 얄밉게 여기게 되었고, 도우려는 의도 반, 장난치려는 의도 반으로 뱉은 말이었다. 솔직히 장난치려는 의도가 조금 더 컸다.

루크가 제이를 발견했다. 제이는 깨끗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자고 결심하고 비장한 얼굴로 주군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그의 비장함이 무색하게, 루크는 죽을 듯 어두운 안색으로 그를 지나쳐 소파에 풀썩 몸을 던졌다.

제이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안 죽이실 겁니까?”

“죽일 기운도 없다…….”

정말 죽을 것 같이 힘없는 목소리였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물러간 자리를 죄책감이 채웠다.

“…그렇게 괴로우셨습니까?”

“……그렇지만도 않았다.”

루크는 등받이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쭉 마음에 걸렸던 사과도 했고, 나디아의 용서도 받았다. 외출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나디아가 스테이턴 성과 영지를 아름답다고 말해준 건 정말이지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일그러진 루크의 얼굴이 너무나 괴로워 보여 제이가 물었다.

“공작 부인께서 순진한 분이신 것 같기는 하지만 각하를 무척 좋아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끌어드리면….”

“제기랄, 나디아는 내가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인 줄 안다!”

“…예…?!”

제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정… 상냥…?!

“날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순진한지 아느냐? 강압적인 결혼에 대해 원망은커녕, 내가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행복하다고…….”

“……각하께서 부인께 다? 다정, 다정하고 상냥, 상냥, 상냥하신 건 맞는 말 아닙니까.”

저 얼굴에 대고 ‘다정’이니 ‘상냥’이니 말을 하려니 혀가 굳은 것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라 말을 마칠 수가 있었다. 적어도 나디아에게는 멍청해 보일 만큼 다정했으니까.

그 순간 루크의 얼굴 근육이 크게 움직였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매가 아니었다면 제이는 그가 우는 줄 알았을 것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고맙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거시기를 세우냐?!”

“…….”

“날 의지하며 안겨 오는데 나는…….”

루크가 이를 악물고 아랫도리를 노려봤다. 아직 꼿꼿하게 서 있는 그것은 바지 위로도 형태가 고스란히 보였다. 짐승도 아니고, 피가 몰린 아랫도리 때문에 그녀의 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턱 아래로 스치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가슴에 안겨 뺨을 기대오는 살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저 가느다란 목 아래에 숨겨져 있을 섬세한 어깨와 흰 피부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지….

“이깟 것, 잘라버리겠다!!”

“아아악! 안 됩니다! 스테이턴 가문의 후사가!”

“놔라, 제이!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이깟 것!”

루크가 미친 사람처럼 페이퍼 나이프를 들었다.

이것만 없었으면 나디아가 바라는 대로 꼭 끌어안고 자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고, 우는 그녀를 달래줄 때에도 허리를 빼고 기마자세로 버틸 필요가 없었고, 스테이턴 성과 영지를 칭찬하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그녀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만, 이 더럽고 흉측한 것만 없었다면…!

제이가 비명을 지르며 루크에게 달려들어 페이퍼 나이프를 빼앗았다.

“아직 제대로 쓰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안 돼!”

“아아아악!”

루크의 손에서 날붙이를 모조리 빼앗고 나서야 제이는 후다닥 물러났다. 루크는 짐승처럼 크게 울부짖었다.

아랫도리가 없어지셔도 충분히 짐승 같으시다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것이 제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