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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21화 (21/150)

20화

안나가 꺼내온 건 나디아의 사이즈에 딱 맞춘 듯한 승마복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치수를 재어보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이리도 딱 맞는 사이즈를 알아내서 승마복을 챙겨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심지어 내가 승마복을 입을지, 안 입을지도 안나는 몰랐잖아.’

다른 드레스처럼 승마복 또한 여느 수도 유명 의상점에서 맞춘 듯 고급스럽고 세련됐다. 어디 하나 품이 남거나 모자란 부분이 없다. 나디아는 새삼 안나의 안목에 감탄했다.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알아낸 정확함에.

정원에는 루크와 그랜트, 제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루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가려다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체면, 체면!’

공작 부인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아가씨였을 때처럼 달려가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보폭은 크게 벌려 루크에게 걸어갔다.

물론 나디아가 손을 흔들다 냉큼 내리는 모습은 모두가 보았다. 그랜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속내를 감추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가장하는 것이 오히려 티가 난다는 걸 나디아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끝까지 어른스러운 척하려던 나디아의 계획은 금방 실패로 돌아갔다.

“와아! 루크, 설마 이 아이가…….”

“맞소. 당신에게 줄 선물이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푸르릉!

투레질 소리가 거칠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겁먹지 않고 갈색 말에게 다가갔다. 말은 우아한 갈기와 튼튼한 다리, 긴 목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접근하며 연신 감탄을 하는 나디아에게 루크가 말했다.

“승마를 좋아한다고 했잖소.”

“기억해줬군요. 그게 더 기뻐요….”

“…….”

정말, 조만간 자신이 나디아에게 간이고 쓸개고 모조리 떼어주게 될 것 같았다. 나디아는 필요없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루크의 멍청하게 풀어진 얼굴을 보다 못한 제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각하와 함께 이 근방을 돌아보고 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래도 돼요, 루크?”

“근처라면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제이, 내 말을 데려와.”

“이런, 어쩌죠.”

마치 책을 읽는 듯 딱딱한 어조였다. 불길함을 느낀 루크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러나 제이는 루크가 나디아 앞에서는 화는커녕 큰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후였다. 공작 부인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당장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이는 곧 죽어도 거짓말은 못 하는 사람이었지만?.

“제가 너무 바빠서요.”

거짓말만 아니라면 할 수 있었다. 제이가 바쁜 건 사실이었으니까.

“마구간까지는 너무 멀어서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고 각하께서 직접 마구간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두 분이서 함께 말을 타고 돌아보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제이, 너?.”

그랜트도 거들었다.

“그게 좋겠군요, 각하. 그렇다고 이 근방 지리도 모르는 부인을 혼자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괜찮겠지요, 부인?”

제이와 그랜트는 루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행히 루크가 선물한 말은 두 사람을 태울 수 있을 만큼 크고 힘이 셌다. 나디아는 “루크의 시간을 빼앗는 것만 아니라면 좋다”고 대답을 해 루크가 도망갈 길을 완전히 차단했다. 루크는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루크가 먼저 말에 올랐고, 나디아가 이어서 안장에 발을 올렸다. 혼자라면 능숙하게 오르겠지만, 루크가 먼저 올라타 있어서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금세 안장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디아는 승마를 좋아했다. 숙녀답게 옆으로 앉아 말을 타기도 했지만, 승마복을 갖추어 입고 힘껏, 빠르게 달리는 순간을 무척 사랑했다. 가족들은 다칠 수도 있다며 말리고는 했지만 그들에게 걱정을 끼친다고 해도 힘껏 달리는 순간의 쾌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흡.”

나디아가 제 앞에 앉는 순간, 루크는 숨을 멈췄다. 나디아의 금발에서는 햇살 같은 향기가 났다…, 고 감상적인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그의 가슴에 그녀의 등이, 그리고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봉긋한 엉덩이가 닿았다.

“……? 응?”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고삐를 잡고 엉덩이를 뒤척거렸다.

“…….”

앞, 옆, 뒤, 다시 앞으로….

나디아는 꾸물거리며 엉덩이를 뒤척거렸다. 분명 제대로 안장에 앉았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왜 엉덩이 사이에 딱딱하고 길쭉한 것이 닿는지? 그것은 엉덩이골을 지나 허리까지 닿을 만큼 컸고 딱딱했다.

‘이 안장 모양이 다른 건가?’

나디아는 딱딱한 것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서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뒤에서 루크가 숨을 삼켰지만 나디아는 듣지 못했다. 딱딱한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움직이지도 않았고? 안장 모양이 달라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겠거니 했다. 뒤척이느라 문질러서 그런지 따뜻한 것 같기도 했다. 괜찮겠지. 나디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루크, 괜찮아요? 이제 갈까요…… 왜, 왜 그래요?”

“……아무것도…….”

루크의 얼굴이 너무나 험악했다. 더는 외모에는 휘둘리지 않고, 심지어 루크를 좋아하게 된 나디아인데도 겁을 먹고 말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럽고 다정한 남편이 일순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로 보였다.

루크는 이를 악물고 나디아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나디아를 겁먹게 해서는 안 된다, 안 된다, 안……. 나디아가 움직일 때마다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을 그는 필사의 정신력으로 붙잡았다.

따각따각.

말 고삐를 쥐자 말이 걷기 시작했다. 루크는 말이 완전히 뒤돌기 전, 살기를 담아 제이와 그랜트를 노려보았다.

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만든 원흉을 그는 잊지 않을 것이다. 다녀와서 죽인다, 기필코 죽인다. 죽일 거다. 살기 담긴 경고를 제이와 그랜트는 정확히 읽었다.

때로는 지나친 충성심이 죽음을 부르기도 했다. 그 죽음이 부하의 것이든, 주인의 것이든.

*

루크는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때리거나 발로 배를 걷어차지도 않고, 오직 고삐만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말을 움직였다. 말 또한 마치 루크의 또 다른 다리라도 되는 양 그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승마를 즐기는 만큼이나 말을 사랑하는 나디아는 그의 기술에 감탄했다. 말을 때려서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승마를 ‘잘’하는 것이라 믿는 몇몇 신사분들의 논리에 그녀는 매우 질린 참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불어왔다. 말은 점점 속도를 높였다. 성문을 나가고도 한참, 넓게 펼쳐진 들과 숲길을 빠르게 달렸다.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고 스쳐 지나가는 전경을 담았다.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높이 솟은 나무들을 지나 드넓은 평원에 다다랐다. 루크는 나디아가 감탄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으며 빙긋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에만 가둬두기 미안했던 참이었다. 승마를 즐길 만큼 활동적인 성격에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수만 놓아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 것인가?

성의 근방에는 승마하기 좋은 평원과 숲길이 있었다. 산짐승이 나오거나 위험한 지형도 아니라 안심할 수 있었다. 루크가 말했다.

“길을 외울 수 있겠소? 이쪽이 풍경도 좋고, 안전….”

“너무 좋아요!”

나디아는 완전히 흥분했다. 일 년에 한 번, 가족끼리 휴가를 떠날 때에나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부모님은 그녀가 승마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나마도 풍경 속을 시원하게 달리지도 못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 루크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루크!”

“……다행이야.”

루크는 옅게 웃고 말았다. 나디아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아 그 역시 기뻤다.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환히 웃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 귀여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스테이턴 성과 영지를 좋아해 주는 게 행복했다. 이 성과 영지는 루크가 사랑하는 고향이며 자부심이었으니까.

안나가 단단하게 묶어준 머리칼이 풀어 헤쳐져 엉망진창이었지만, 뺨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녹색 눈동자는 전에 없이 반짝거렸다. 기분 좋은 나디아에게 전염이 된 듯, 루크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걸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정리해주었다. 나디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친밀한 스킨십이 새삼스럽게 가까운 간격을 상기시켰다. 빈틈없이 달라붙은 그의 넓은 가슴, 단단한 배, 그리고 마치 끌어안기듯 감싼 두껍고 긴 팔.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볼이 상기되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루크의 검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다정했다. 이전에도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유독 행복한 듯했다.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풍부해 절로 나른해졌다.

“나디아, ……미안했소.”

“네?”

꿈결에 젖은 듯 몽롱했던 나디아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다니요. 루크가 사과할 일이 뭐가 있어요. 이렇게 예쁜 말도 선물해주고, 멋진 풍경도 보여주었는데….”

“……당신을….”

루크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와 가까이에 있던 나디아는 수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그의 입술에 주목했다. 미처 보지 못한 그의 입술은 생각보다 모양이 예뻤다. 아랫입술이 특히 도톰해서 마치 시럽을 뿌려 굳힌 과일 같았다.

“…강제로 여기에 데려왔잖소.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

“하지만 저는 루크와 결혼했는걸요?”

“…….”

그 결혼이야말로 루크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까닭이었다. 결혼을 취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자신의 청혼이 나디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깨달았다는 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첫날밤에 나디아가 겁을 먹고 졸도하지 않았더라도 루크는 그녀를 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스테이턴 성에 데려오고도 한 달이나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또 겁을 먹고 졸도하는 모양을 보는 것도 무서웠지만.

“결혼도, 당신의 뜻은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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