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20화 (20/150)

19화

4. 긴 밤 지새우며

다음 날 아침, 안나는 공작 부부 침실에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또렷한 목소리에는 잠 기운이 없었다. 안나는 안심을 하고 문을 열었다. 나디아는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을 뜬 지 꽤 시간이 지난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나디아가 기분 좋은 듯 먼저 웃었다. 안나가 말했다.

“편히 주무셨어요? 부인.”

“네, 덕분에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기사단장님과 집사님, 수석 보좌관님께서 혹 불쾌해하지는 않으셨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인을 걱정하셨어요.”

“정말이지 상냥한 분들이시네요….”

이토록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곳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힘이 되어 줄 사람이 많이 생겼다.

나디아가 환히 웃자 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께서는.”

“아, 어제 오후에 나가셔서는, 바빠서 잘 시간이 없을 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저 때문에 아침에도 늦잠을 주무셨고, 오후에도 한참 시간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그러셨군요.”

그런 같잖은 변명을 했구나, 라는 듯 안나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밤새 들어오지 않은 공작 대신 어떤 변명을 해주어야 할까 고민했던 안나는 나디아를 마주 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루크에게도 3일 연속 밤샘은 힘겨웠다. 체력이 제아무리 넘쳐난다고 하여도 잠을 자지 못하면 사람은 힘을 쓰지 못한다. 게다가 우는 나디아를 달래며 심력까지 소진했으니 이만 쓰러져 기절하고 싶은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로 루크는 집무실 책상에 엎드려 기절하듯 잠을 잤다. 무려 이틀 만에 단잠을 잔 그는 새벽부터 기사단을 방문, 기사단장 게리를 제외한 기사단 전원을 쓰러뜨린 후 개운하게 돌아갔다고 전해 들었다.

“오늘은 무얼 하실 예정이신가요?”

“저, 오늘부터는 이 영지에 대해 좀 공부를 하고 싶어요.”

“공부요?”

“이제 이 영지에서 평생을 살 텐데, 아무것도 몰라서야 곤란하잖아요. 대충이라도 좋으니 책이나 자료 같은 게 있다면 골라주실 수 있을까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지만….”

“부인.”

안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저에게는 죄송하다고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부인에 대해 어떤 것도 오해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나….”

“하물며 저희들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시는 분께 사과를 듣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희가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판국에……. 스테이턴 가문과 공작령에 대해 정리한 서적이 몇 권 있어요. 그랜트? 어제 인사를 드렸던 집사가 가계도와 함께 알기 쉽게 설명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랜트는 다시 공작 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하지만….”

“네?”

“필요한 자료와 서적을 찾으려면 서재를 찾아봐야 해요. 며칠 준비 기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저 혼자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집사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다는데 며칠 기다리는 정도로 불평할 수는 없지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 다른 책을 몇 권 추천해 드릴까요?”

“다른 책이오?”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는 한층 더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책이에요. 시간이 남으실 때 읽어보시라고, 그렇지 않아도 준비했답니다.”

“안나, 절 위해서….”

안나는 준비해 온 책을 두어 권 내밀었다.

나디아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쁘게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읽을 책이 필요했다, 기쁘게 읽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안나는 미약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 책들은 남녀의 연애를 그린, 꽤 수위가 높은 소설책이었다. 특히 부부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그려진 책을 추천받아 엄선했다. 노골적인 묘사까지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디아가 받아들이기에는 쉬울 것이었다.

외설 시계와 조각상은 순진한 공작 부인에게 너무 갑작스러운 충격인 것 같았다. 빨갛게 달아올라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미안해졌다.

안나는 수준을 대폭 낮추기로 했다.

충격 요법을 써서 한 번에 일깨워주고자 하였지만, 나디아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거부감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지식을 심어줄 수밖에 없었다.

‘성교육을 해주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걱정이 돼서…….’

안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늘어놓았다. 루크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은 맞지만, 나디아가 아무 지식도 없이 현실을 맞닥뜨려 당황하거나 상처를 입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디아도 원하게 되어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나디아는 안나에게 받은 책을 가볍게 후루룩 훑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에 익은 제목이었다.

‘어? 이 책은…… 언니가 읽던 책인데?’

나디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백작 부인의 인생>!

언니 일리야가 매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었다. 나디아가 자신도 읽고 싶다, 빌려달라고 아무리 떼를 써도 이 책만은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 여동생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던 언니의 거절에 나디아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책 제목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일리야는 보채는 나디아를 타이르며 “어른이 된 다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젠 읽어도 되겠지! 난 어른이 되었으니까!’

결혼을 한 유부녀니까.

얼마나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어른들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인지, 드디어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디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디아, 나요. 들어가도 되겠소?”

“루크!”

나디아는 환히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쪼르르 달려가 직접 침실 문을 열어주었다.

안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가 루크에게 마음을 얼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친숙하게 느끼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안나는 나디아에게 건넸던 두 권의 책을 흘긋 보았다. 의외로 저 책의 도움이 없어도 되는 게 아닐까? 괜한 참견을 하는 게 아닌지…….

“어서 와요, 루크! 오늘은 처음 보네요.”

“그, 그렇군. 잘 잤소? 나디아.”

나디아가 직접 문을 열어줄 줄은 몰랐는지 루크는 다소 얼빠진 얼굴이었다. 안나는 그 얼굴을 보고는 괜한 참견이라던 생각을 고이 접었다. 꼭 필요한 참견이었다. 그녀는 루크가 나디아에 관한 한 한없이 바보 같아진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

저런 얼빠진 얼굴은, 거의 루크의 평생을 지켜봐 온 안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기사단을 뒤집어놓고 온 루크는 막 샤워를 마치고 와서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디아는 그의 젖은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를 황홀하게 보았다.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더 멋있는 것 같아. 야성적이고….’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요상하기도 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기분이 좋아졌다.

‘뭐지? 왜 저리 보는 거지? 혹시 거품이 남았나? 아니면….’

한편 루크는 나디아의 열렬한 눈빛이 좋으면서도 의아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기야 하지만, 좋기는 하지만 그녀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인지 궁금했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잠깐 잤소.”

안나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집무실에서 천둥소리같이 코골이가 들렸다는 시녀들의 보고를 받았다.

“바쁘지 않으세요? 일부러 들러주신 건가요?”

“당신이 잘 잤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루크….”

“……주고 싶은 선물도 있어서.”

왜 나디아의 앞에 서면 혓바닥이 돌이라도 된 듯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을까?

루크는 애초에 달변가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잘 못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욕만 좀 섞이면 그 누구와 대화를 하더라도 막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유려한 화술을 자랑하는 태자 레너드를 상대로도, 비록 매끄러운 대화는 잇지 못하더라도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순간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오직 나디아의 앞에서만 그는 바보가 된 것처럼 말문이 턱턱 막혔다. 아마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절 위한 선물요? 루크가 주는 거예요?”

“……기뻐해 줄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쁘지 않을 리가요! 너무 좋아요!”

나디아는 박수까지 치며 기뻐했다. 아직 선물이 무엇인지도 보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루크는 바람 빠지듯 웃고 말았다.

“아직 무언지 보지도 못하였으면서? 당신이 싫어할 선물이면 어떻게 하려고.”

“루크가 주는 거면 뭐든 좋아요. 날 위해 골라준 거니까.”

그리고서 행복한 듯 웃는다.

루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선물을 보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자신을 멍청하다 욕하는 동시에,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지 못할 게 없을 것 같다는 멍청한 생각도 했다. 행복한 듯이 웃는 얼굴만 보아도 이토록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게 아쉬웠다.

루크의 시선이 옆으로 스르르 흘러갔다. 그는 제가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를 기도하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안나, 이리로.”

루크는 안나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침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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