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디아는 한참이나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기에는 그녀의 울음이 너무 길고 서러웠다. 루크의 품에 안겼다가, 다시 떨어졌다가, 이내 다시 안겨 우는 나디아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쓰러질 것 같아서 루크가 그녀를 데리고 일어나기로 했다.
안나를 비롯한 그랜트, 게리, 제이는 결국 자리를 떠나고 만 공작 부부의 빈 자리를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디단 브라우니를 한입 가득 먹었는데도 입맛이 썼다.
“왜 우셨던 걸까요?”
제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물음은 자연스럽게 안나에게 흘렀다. 안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공작 부부가 나간 문을 보고 있다가, 냉랭한 시선을 흘렸다. 제이는 괜히 찔끔해 어깨를 떨었다. 수완 좋은 수석 보좌관조차 성의 노련한 시녀장의 힐난에는 잘못한 게 없는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글쎄요, 그동안 쌓인 불안이 터졌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성에 홀로 끌려와서, 무섭고 쓸쓸하셨을 테니까요.”
그랜트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마치 나디아가 악당에게 납치당해 감금된 공주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충성심이 강한 제이는 그들의 대화에 반발심을 느꼈지만, 객관적인 이성은 그들의 말이 그다지 틀리지도 않았다는 점을 주지했다.
‘너무 여린 분이잖아요, 각하……!’
제이는 속으로 외쳤다. 만약 루크가 그의 주군이 아니었다면, 아예 연관이 없는 타인의 시선으로 공작 부부를 보았다면 제이는 틀림없이 루크를 욕했을 것이다. 순진한 여인을 강압적으로 납치해서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데리고 와 감금했다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충격적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서두른 결혼이었지만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 결합이라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공작 각하께서 많이 서두르셨구나, 그래도 그렇지 스테이턴 영지에서 일하던 측근들을 따돌리고서 결혼식을 치러버리다니 너무하다고…….
그러나 나디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떠한가? 그녀는 대귀족 스테이턴 공작의 강압적인 청혼을 감히 거절하지 못했고, 얼굴도 모르는 남편을 맞아야 했다. 게다가 그 남편은 사람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야수였고, 끌려오듯 당도한 성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말 걸어주는 이 하나 없이 방치당한 한 달여…….
눈물이 터질 만했다. 제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약 여동생이 그런 상황이라면 루크를 때려주고 싶어질 것이었다. 공작 부인에게 성교육 따위를 시킬 수 없다는 안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불한당! 악당! 나쁜 사람! 괴한!’
물론 제이에게는 여동생이 없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여동생의 오빠가 된 제이는 수석 보좌관으로서의 충성심도 잊고 루크를 욕했다.
“역시 제가 브라우니가 싫다고 했기 때문에…….”
게리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나디아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 말은 믿지 않았다. 심지어 울기까지 했으니……. 게리는 죄책감 때문에 가슴에 돌이 얹힌 듯했다.
생각보다 너무 여리고 착한 분이 아닌가. 수도에서 왔다기에 어딘지 까칠하고 도도한 아가씨를 상상했던 게리는 나디아를 보고서 매우 놀랐다. 공작 부인은 너무나 순하고 착하며 여린 분이었다.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루크는…….
불쑥 치민 불순한 생각에 게리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손을 대면 터질 것만 같은 여린 분에게 루크는 지나치게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과연 어울리는지는 이미 부부이니 차치하고, 루크가 과연 나디아를 상처 주지 않고 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루크는 기사단장 게리를 유독 험하게 막 대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게리의 걱정은 수직상승했다.
제이가 말했다.
“안나, 공작 부인을 따라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따라가서 무얼 하라고요.”
“하지만 각하께서…….”
저 여린 분을 잘 달래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제이는 아직 충성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각하께서 잘 달래어주시겠죠. 우리가 걱정해봤자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부인을 도우면 됩니다.”
“이제 우리가 모셔야 할 공작 부인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으니…….”
“그래요.”
“모시는 보람이 있을 것 같은 분이군.”
그랜트가 허허 웃으며 남은 브라우니를 챙겼다. 공작 부인이 손수 만들어준 것이니 감히 남길 수 없었다. 한입에 먹어치운 게리를 제외하고 제이와 안나도 남은 제 몫을 챙겼다.
“병아리 같아요, 그렇죠?”
“손녀가 생긴 기분이야.”
그랜트와 안나는 드물게도 훈훈한 분위기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잘…… 달래실 수 있을까? 있겠지? 그렇겠지?’
제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닫힌 문을 흘긋거렸다. 자신이 주군인 루크를 걱정하는지, 방금 만난 나디아를 걱정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제이 자신은 우는 나디아를 결코 달랠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나디아가 아니더라도 울고 있는 여자를 앞에 두면 온몸이 굳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서 멍청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주군은 다를 것이다. 제이는 믿었다.
*
다르지 않았다. 루크는 정확히 제이의 예상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우는 나디아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석상처럼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백지처럼 새하얬다.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잘게 떨리는 어깨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루크는 평생 우는 여자를 달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인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거니와,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도 없었다. 멀리서 그를 보고 겁을 먹어 울었던 여자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앞에서 울었던 여자는 없었으니 나디아가 처음이었다.
“나디아.”
결국 루크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울음을 그쳐가던 나디아가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촉촉했다. 빨개진 눈가가 안쓰러웠다. 손을 뻗어 눈물을 직접 닦아주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루크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손을 대기에, 우는 나디아는 너무 약해 보였다. 혹여 자신이 잘못 건드렸다가 더 아파하면 어떻게 하나.
루크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울고 있는 나디아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은 한편 두려운 것이다.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보는 사람의 심정과 가닥이 비슷한 두려움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또 다 망쳐버렸어요.”
성의 간부가 모인 자리마저 우느라 망쳐 버리고 말았다. 나디아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제 몫은 해내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결혼을 한 이후로는 한심하고 못난 꼴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리고 왜 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움직이는 조각상이 사라지지 않는지……. 나디아는 루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피해 버렸다.
“나디아, 오해하지 마시오. 당신은 어떤 것도 망치지 않았소.”
“…….”
“오히려 아주 잘 해냈어. 손수 선물까지 준비해줄 줄은 아무도 몰라서 놀란 것뿐이야. 장담컨대 그들은 당신을 아주 좋아하게 됐을 거요. 그러니까….”
“으흑….”
겨우 울음을 그친 나디아가 북받치듯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루크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디아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잔상이 무엇인지 몰라도 루크에게 너무 미안했고, 분명 울기만 하는 자신이 성가시고 귀찮을 텐데 마냥 다정해서 너무 좋았다.
‘어떻게 해……. 너무 좋아. 미안하고, 좋아…….’
낯선 사람들 속에서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만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고 손을 잡아주지 않았나. 그가 세심하게도 자신을 보고 있어 주었다는 증거였다. 달래주는 방법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결코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것도 감동스러웠다.
나디아는 루크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루크가 너무 좋아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고마워요.”
“으응? 무엇이….”
“고마워요, 루크. 미안, 미안해요, 허엉….”
“미안하다고?”
대체 왜? 무엇이? 어째서?
나디아의 널 뛰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루크는 그녀의 말이 모두 수수께끼로 들렸다. 고맙다는 건 알겠다. 그녀를 힘든 상황에 밀어 넣은 게 자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성의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던 자리를 망친 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목소리와 표정을 들어보니 그녀는 자리를 망친 데 대한 사과를 하는 게 아닌 듯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나디아의 속을 알 수 없는 루크는 그저 답답할 노릇이었다.
루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내야 할 때다. 울고 있는 나디아가 유리 세공품 같아서, 상처 입힐 것 같아 두렵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서, 미안하다 우는 그녀를 어떻게 내버려 둘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용기를 내어서 나디아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디아는 루크의 품에 쏙 들어왔다. 딱딱한 그와 달리 부드럽고 푹신한 몸은 잠시 바르작거리더니 이내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대었다. 루크는 턱 아래에 닿는 나디아의 매끈한 머리칼에 키스했다.
“루크…. 루크.”
“쉬이. 괜찮소. 다 괜찮아….”
용기를 내기를 잘했다. 나디아의 호흡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문제는 루크 자신이었다.
‘망할 본능,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순식간에 터질 듯 부푼 아랫도리가 혹 나디아에게 닿지 않도록 그는 허리를 엉거주춤하게 뒤로 뺐다. 그리고 기마자세처럼 무릎을 굽히고 버텼다.
오랜 단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