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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8화 (18/150)

17화

크지 않은 원형 테이블에는 직사각형으로 잘린 브라우니 여섯 접시가 놓여 있었다. 나디아가 손수 만들어 장식까지 한 브라우니에서는 무척이나 진한 단내가 났다.

‘흑곰’의 기사단장 게리는 응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디저트 같은 달달한 종류의 과자는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제이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접시에 놓인 진한 브라우니를 보고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라면 각하나 우리가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게리, 제이도 디저트를 즐기지 않지만 루크의 경우에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달콤한 과자를 먹는 습관이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먹을 일이 있으면, 마치 소태라도 씹은 양 험악한 얼굴을 하고는 했다. 혀에 닿는 단맛이 뇌를 마비시키는 기분이라고 혹평한 적까지 있었다.

루크의 취향을 죄 꾀고 있는 안나가, 굳이 오후 티타임의 간식으로 특히 단맛이 강한 브라우니를 골랐을 리가 없었다.

그때 집사 그랜트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랜트, 각하는요?”

“부인을 에스코트하러 가셨다네. 곧 오시겠지.”

“안나도 같이 오겠군요. 대체 안나는 왜 이런 걸 준비했담?”

“차라리 스테이크나 주지….”

색이나 모양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접시 위 음식이 스테이크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게리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젊은 기사단장과 영주 보좌관이 불평을 늘어놓는 동안, 연륜이 쌓인 집사는 말을 아꼈다. 그들의 말처럼 안나라면 할 리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이 브라우니를 선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그랜트는 정확하게 추측했지만 굳이 그것을 어리석은 젊은이들과 공유하지는 않았다.

“와 있었군.”

“각….”

각하, 라고 말을 하려던 게리는 입을 떡 벌렸다. 인사를 하려 눈을 들었던 제이도, 그랜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매우 놀란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오는 부부를 맞이했다.

공작 부인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뜻 스치듯 보았던 공작 부인이 생각보다 미인이라는 사실에 가장 놀랐다. 들은 이야기 속의 이미지로는 작고 여리다는 인상이 강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녀는 오히려 키가 큰 편에 속했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나 부드러운 표정은 여린 이미지를 만들지만, 길쭉한 팔다리과 풍만한 몸매, 그리고 이목구비 자체는 성숙한 편이었다. 확실한 성인 여자였다.

나란히 선 그들은 그런대로 부부로 보였다. 자신들의 주인이 지나치게? 동화 속에 나오는 야수처럼 보였지만, 어쨌거나 루크는 인간이므로,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 같았다.

“처음… 뵙는 건 아니죠.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이에요.”

나디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각하의 수석 보좌관, 제이드 앨런입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했습니다, 부인.”

“아니에요. 반가워요.”

제이는 나디아의 상냥한 음성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 이런 분이 저 야수 같은 루크에게 납치 같은 결혼을 당했으니 얼마나 겁을 먹었겠는가? 그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며 입성을 거부하는 이발사를 억지로라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발사가 아니면 다른 이발사라도 수배를 해야겠다. 하루라도 빨리 저 착한 분의 눈이 덜 괴로워지도록….

“험! ‘흑곰’ 기사단의 단장, 게리 노스라고 합니다!”

“이전에 인사를 드렸었지요. 스테이턴 성의 집사, 그랜트 존스입니다.”

“반가워요.”

게리와 그랜트는 나디아의 환한 미소에 이끌리듯 따라 웃었다. 나디아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었다. 본인에게 악의가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랜트는 안나의 평가를 십분 이해했다. 나디아는 착하고 다정할 뿐, 연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서 있지 말고 우선 앉지. 안나, 당신도.”

“저도요?”

“안나, 앉아줘요. 나랑 같이 있어 주기로 했잖아요.”

나디아를 지키듯 뒤에 서 있던 안나는 나디아의 부탁에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여섯 접시는 그리하여 모두 주인을 찾았다.

루크는 나디아가 편히 앉은 걸 확인한 다음에야 접시를 보았다.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코를 자극하던 단내는 바로 이 접시에서 풍겨 나온 것이었다. 그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 게리가 말했다.

“아, 안나. 왜 하필 브라우니예요? 저희 모두 단맛은 별, 악!”

퍽 소리와 함께 안나의 구두 끝이 게리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그랜트의 눈이 기민하게 빛났다. 이 순간을 위해 평생 눈치를 쌓아 온 제이와, 누구보다 나디아의 표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루크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게리보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대신 희생양이 되어 준 게리를 앞으로 괴롭히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보 나디아. 단 과자를 싫어할 가능성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루크는 단 과자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고르려다 보니 초대한 사람들 중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나디아는 울먹거리며 게리를 올려다보았다.

“제 실수예요. 단맛을 싫어하실 줄은, 미처…….”

“헉, 아, 아닙니다! 단맛 되게 좋아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저 때문에 애써 거짓말하지 않으셔도…….”

‘단맛은 별’까지 들었으니 뒤에 올 말이야 뻔했다. 나디아는 제 실수를 탓했다.

“진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과자일 뿐이니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거잖아요!”

“정말입니까?”

같은 실수를 할 뻔했던 루크와 제이, 그랜트에게서 죽일 듯한 눈총을 받고 있던 게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났다. 그렇다. 사람 취향은 다양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는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안나의 말에 게리의 안색은 흰 시트처럼 탈색되고 말았다.

“그렇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지요. 무려 공작 부인께서 오전 내내 손수 만든 브라우니지만.”

“…….”

“생크림도 직접 만들어 올리셨고, 장식도 직접 하셨지만, 입맛에 안 맞으시다면 뭐.”

“…….”

“안 드셔도….”

“먹겠습니다! 저 사실 브라우니 엄청 좋아합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놀림 받을까 봐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사실 좋아합니다!”

게리가 벌떡 일어나며 용맹하게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나디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루크가 나디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게리를 쏘아보았다.

“야만스럽게 큰 소리 내지 마라.”

“…….”

“나디아, 놀라지 않았소?”

“전 괜찮아요. 제 조카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는 했거든요. 익숙해요.”

비록 조카는 이제 다섯 살이 된 어린아이였지만 말이다. 우락부락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데에야 겁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디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있다, 겁을 먹었다는 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나디아의 작은 손등을 덮었다. 나디아는 깜짝 놀라며 옆을 보았다. 그녀의 옆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 루크였다.

“진짜 좋아합니다, 부인. 정말입니다….”

게리가 변명을 더했다. 나디아는 루크가 손을 잡아 준 순간 이미 게리의 취향 같은 건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여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잘 먹겠소, 나디아.”

루크가 가장 먼저 포크를 들었다. 꾸덕한 질감과 진한 초콜릿 향…. 객관적으로는 무척 잘 만들어진 브라우니였지만, 단맛을 싫어하는 루크에게는 별반 감흥이 없을 것이다. 소태를 씹는 게 낫다고도 했던 루크는, 정말 행복한 얼굴로? 그 어디에도 싫은 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정말 맛있게 브라우니를 먹기 시작했다.

이어서 게리가 브라우니를 한 번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매너 없는 행동이었지만 외모에 어울리는 호쾌한 한 입이었다. 이어서 제이가 얌전한 척 잘라 먹었고, 그랜트와 안나도 브라우니를 맛보았다.

나디아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루크는 정말 맛있게 먹어주었지만, 제이와 게리, 그리고 그랜트까지도 사실 단맛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인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까, 상처를 받을까 봐 억지로 먹어주고 있는 거였다.

‘어떡해, 너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나디아는 자신의 손을 꼭 쥔 루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브라우니를 먹고 있던 사람들의 손이 뚝 멈추었다.

“나디아?! 왜 그러시오? 역시 게리 저 새, 아니, 기사단장이 마음에 안 드시오?”

“죄송합니다, 부인! 진심이 아니었?.”

“아니에요!”

나디아가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안나는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랜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이는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나서지도, 그렇다고 다시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진짜… 아니에요…. 너무, 너무….”

나디아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너무 고마워서, 따뜻하게 대해주시려는 게 느껴져서, 행복해서요….”

루크가 사실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 곁을 내어준 안나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스테이턴 성은 아직 낯설고 무섭지만 나디아 자신을 환영해주고 있다는 것…. 남편이 야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조금은 남아 있던 불안이 씻은 듯 사라진 기분이었다.

나디아의 말에 그랜트, 안나, 제이, 게리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정말이지 착한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사에 도리어 그들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디아는 한 번 터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루크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끌어안아 주었다. 루크의 품에 뺨을 기댄 나디아가 훌쩍거렸다.

뺨에 단단한 가슴이 닿았다? 끼릭, 덜컹!

‘날 위로해주는 남편에게 지금 내가 무슨?.’

감동과 감사와 울음 사이에도 떠오르는 조각상의 잔상은 너무나 강력했다. 나디아는 루크의 품에 이마를 박았다. 그 와중에도 어깨를 토닥여 달래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런 사람한테, 이런 남편을 두고, 나라는 여자는 이 무슨 망측한?.’

감동에 이어 죄책감이 솟았다. 나디아는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잔상이 괴롭고 루크에게 미안해서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난 너무 나쁜 사람이야….’

루크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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