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7화 (17/150)

16화

스스로 실토하지 않는 한 루크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리 없는데도 나디아는 혹여라도 그가 알까 봐 조마조마했다.

대체 허리를 움직이고, 몸의 중심을 부딪치는 단순한 동작이 왜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걸 생각하면, 루크와 제 얼굴을 한 조각상이 움직이는 걸 떠올리면 어째서 안절부절못하게 되는지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을까……?’

무언가 좋은 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동작을 하는 조각상을 어렵사리 만들어놓은 것이 아닐까. 벌거벗은 채 엉켜있던 남녀의 그림도 차례차례 떠올랐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데도 어쩌면 이렇게 머릿속에 쏙쏙 박혀 진하게 남아있는지…….

‘혹시 부부가 같이 누우면 그런 동작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설마 부부도 아닌 남녀가 벌거벗고 누워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건 나디아의 상식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부라고 해도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건 어려운 일 같았다. 나디아는 부모님의 당부를 떠올렸다.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단다.’

비밀이 없다는 건, 벌거벗은 모습조차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저 그림이나 조각상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남녀는 부부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나디아는 훌륭한 논리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부부가 되면 그냥 한 침대에 누워 꼭 끌어안고 자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나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부끼리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어머니가 결혼 전에 알려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이 결정되던 날부터 어머니와 언니는 틈만 나면 울며 사과하기 바빴다.

가엾은 내 딸, 가엾은 내 동생…. 그들의 울음소리를 떠올린 나디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의 손이 저절로 잘 굳은 생크림을 향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움직여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한 입 떠먹었다. 달콤한 맛이 혀에 퍼졌다. 힘이 났다.

‘편지를 써야겠어.’

수도에 계실 부모님과 언니, 오빠는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결혼으로 제대로 이별을 할 여유도 갖지 못했다. 정신없이 치러진 결혼식, 울며 떠나보낸 어머니의 얼굴이 아프게 가슴에 남아있었다. 저 먼 공작령, 야수라는 소문이 자자한 무서운 공작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니 얼마나 걱정을 하고 계실까.

그러나 야수라던 공작은 사람이었다. 아니, 당연히 사람이겠지만? 조금도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와 덩치가 좀 크고 얼굴이 험상궂을 뿐, 그는 나디아가 만나 본 그 누구보다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시라고, 딸은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상한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편지를 쓸 것이다.

“이제 완성…!”

따끈한 브라우니 옆에 곱게 생크림을 올리고, 작은 허브로 장식했다.

스테이턴 성에 와서 처음 만든 작품이다. 모양은 다소 투박했지만 진한 맛과 꾸덕한 질감이 잘 살아있어 썩 마음에 들었다. 나디아는 뿌듯하게 웃으며 안나에게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 보여요?”

“맛있을 것 같네요.”

“집사님과 기사단장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안나는 환히 웃으며 불안해하는 나디아를 달랬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그릇을 싹 비워야만 할 테니까요. 루크나 집사 그랜트는 단 음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기사단장의 입맛까지는 안나의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오후에 잡혀 있는 집사, 기사단장과의 접견에는 루크가 동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루크가 지켜보는 앞에서 나디아가 실망할 만한 행동을 했다가는 여러 방면으로 괴로워질 것이므로, 안나는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고작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지만, 좋은 인상을 주려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갸륵하고 어여쁜가? 안나는 나디아의 마음 씀씀이를 높이 샀다.

그녀는 이 스테이턴 성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입장이다. 공작 부인, 스테이턴 성의 안주인이다. 아랫사람을 턱짓으로 부리며 명령만 내려도 그들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성에서 일을 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우려는 마음이니 안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인기 만점일 게 분명해요.”

*

밀가루와 설탕 가루가 묻은 옷을 벗고 깨끗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안나는 철벽처럼 태연한 얼굴로 건넨 드레스였지만, 그 옷을 입어야 하는 나디아의 손은 덜덜 떨렸다. 수도에서 가장 비싼 의상실에서도 가장 비싼, 전시용으로 걸어두어야 할 것 같은 드레스를 마치 옷장에 걸린 수많은 드레스 중 하나 꺼내듯 꺼내니 땀이 날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재력이 엄청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가늠할 수 있는 기준으로는 잴 수도 없는 수준일 걸까……. 이런 게 굴러다닐 정도면 대체……. 시녀들이 꼼꼼한 손길로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등 부분에 매듭이 많아서 혼자서 입고 벗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실제로 안주인을 맞고 난 후 안나는 얕보이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재력을 뽐내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지만, 혹여 깐깐한 수도 여인의 눈에 촌스럽고 가난한 집안으로 보일까, 모든 것을 최고로 선별해 준비해둔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잘한 일이었다. 안나는 나디아에게 그 어떤 것도 모자람 없이 해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스테이턴 성의 안주인이 나타났으니, 황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것들을 누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드레스는 나디아의 하얀 피부와 풍만한 몸매, 순진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의 매력을 한껏 살려주었다. 곱슬곱슬한 금발을 다듬는 건 안나의 몫이었다. 파티도 아니고 그저 집안의 작은 행사일 뿐이니 과한 액세서리는 생략했다. 밝은 머리 색 덕분에 액세서리가 없어도 화사한 인상을 주었다.

“굉장히 잘 어울려요, 부인.”

“정말요? 이런? 예쁜 드레스를 입을 기회가 별로 없어서 어색해요.”

“앞으로 자주 준비해야겠네요. 정말 예쁘니까. 그렇죠, 각하?”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하라고 불릴 사람은 이 성에 오직 단 한 사람이었다. 밤이 되기 전까지 루크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았지만, 그녀는 아직 루크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밤이 오기 전까지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머릿속에서 조각상과 시계판 그림들을 완전히 없앤 다음 만나려고 했는데……!

나디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루크를 보면 그를 두고 상상했던 조각상이 떠올라 미안하고 민망해지기 때문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겁을 먹어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이게 다 루크가 재빨리 칭찬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각하.”

“?핫!”

“어떠십니까. 무척, 잘 어울리시죠?”

안나의 목소리는 한겨울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루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 천사가 강림한 줄 알았던 그 순간에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리던 날, 기절했던 첫날밤마저, 그리고 자신의 품에서 잠든 밤, 오늘 이 순간까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계속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멍청이 같은 생각이로군.’

입 밖으로 내기 창피한 감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루크는 진심이었다. 나디아에게 반한 이후 그는 음유시인들이 노랫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평소 간지러운 말이나 칭찬은 결코 못 하던 루크였지만, 그는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인 나디아를 위해 용기를 내기로 했다.

“무척 아름답소.”

“……루크….”

“손을.”

뺨으로 안나의 경악한 눈길이 쏟아졌지만 루크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늙은 시녀는 그가 ‘아름답다’는 둥의 말을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은 잘만 하면서 왜 중요한 일에는 힘을 못 쓰냐는 비난도 섞여 있겠지.

나디아가 그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가 다시 눈을 피했다. 루크는 나디아가 그저 수줍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루크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에 얹었다. 손이 내려앉는 순간 나디아가 크게 움찔거려 놀랐지만, 잠시 기다려주니 먼저 팔을 잡아 왔다.

나디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유독 눈을 마주 보는 순간을 좋아하니까. 최선을 다해 웃어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루크는, 그녀가 먼저 눈을 피해버리자 내심 충격을 받았다.

‘왜지?!’

오늘 아침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았나. 찰싹 달라붙어 자는 동안에도 그는 무사히 잘 버텨내었을 터였다. 루크는 나디아의 보폭에 맞추어 걸으며 온갖 가능성을 떠올려야만 했다.

‘혹시 그걸 봤나?!’

흉물스럽게 솟아올랐던 그것을 그녀가 눈치챘다거나, 그게 징그러웠다거나,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거나……. 온갖 가능성이라고는 하나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루크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잊자, 조각상은 잊자, 단단한……. 잊자!’

끼릭, 덜컹! 끼릭…. 나디아 또한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부부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안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