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피곤해 보이셨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봐.’
루크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디아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발걸음도 무거워 보였고(아랫도리 때문이다), 허리도 구부정했으며(아랫도리 때문이다), 안색도 어두웠다(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루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나디아는 골몰했다.
나디아는 루크가 좋았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생긴 건 무서워도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염려가 가득했으며, 행동거지 하나에도 배려가 묻어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평생 믿고 살 수 있다, 나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좋아 죽을 것 같은 마음은 아니라도 그가 자신을 소중히 아껴주는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남편…. 자신을 배려해주는 그를 위해 나디아도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루크는 밤낮으로 바쁜 것 같았다. 오늘은 좀 늦었지만 그는 아침 일찍 나가서는 밤늦게야 침실로 돌아왔다. 스테이턴 영지라는 큰 땅을 다스리고 있으니 나디아가 알지 못하는 고민과 걱정거리도 많을 것이었다.
그가 토로하지 않는 고민을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디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았다.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과자 만들기였다.
‘마침 루크가 부엌을 써도 좋다고 해주었으니까. 과자를 만들자!’
나디아는 달콤한 과자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과자 만들기도 좋아했다. 뽀얗고 단단한 휘핑크림과 고소한 견과류, 곱게 체에 거른 밀가루, 달콤한 설탕과 시럽……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다행히 그녀가 굽는 과자와 케이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모두 호평이었다.
“식사를 마치셨나요? 치워도 될까요?”
“네,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안나.”
“별말씀을요.”
“안나가 시녀장이실 줄은 몰랐어요. 분명 인사를 나눌 때 말씀해주셨을 텐데 왜 기억을 못 했는지….”
“정신이 없으셨으니 그럴 수 있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나는 부드럽게 웃어 주고는 손짓을 하여 식기를 치우도록 했다.
“오늘은 집사와 기사단장이 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괜찮으실까요?”
“인사요? ……안나도 같이 가 주는 거죠?”
“…그럼요. 저도 함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행이었다.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게 두렵지는 않았지만, 성에 왔던 날 언뜻 보았던 기사단장은 첫날밤의 루크 만큼이나 크고 사납게 생긴 사람이라 조금 걱정스러웠다. 또 겁을 먹고 기절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제 자신은 외모에 휘둘리지 않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까. 조금은 겁을 먹고 만 자신을 속이듯 나디아가 중얼거렸다.
“지금이 몇 시쯤이지요?”
“직접 시계를 보시지요. 벽난로 위에 시계가 있습니다.”
“……?”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대답에 나디아가 의문스레 안나를 보았다. 안나는 특별히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디아는 눈을 깜박이다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 위에는 못 보던 물건들이 몇 가지 올려져 있었다.
“……?”
이게…… 시계인가?
처음에는 무엇이 이상한지 몰랐다. 오전 10시 반이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읽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계판에 무언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막연히 숫자인 줄만 알았던 그것은…….
“……!”
남녀가 뒤엉킨 그림이었다. 나디아가 경악해서는 입을 뻥긋거리며 눈을 홉뜨고 안나를 보았다. 안나 역시 그 시계판을 보았을 텐데도 태연한 안색이었다.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그러나 차마 시계판의 그림이 이상하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도 없었다. 나디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다 안나에게서 다시 시계로, 그리고 차마 시계를 보지 못하고 옆으로 비껴 흘러갔다. 그러나 그곳에도 나디아가 시선을 둘 곳은 없었다.
“……!”
기이한 조각상이었다. 벌거벗은(발목이나, 허리에 둘둘 말려 올라간 옷가지가 걸려 있기는 했다) 남녀가 허리 아래를 맞대고서, 여자는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남자는 여자의 발목을 잡고서?.
망측해서 더 볼 수가 없었다. 다리를 훤히 다 드러내고(나디아는 방금 전 루크에게 달라붙어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고 있던 자신이 떠올라 아찔해졌다), 허리를 맞붙여서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눈을 떼려 하니 또 그러기가 힘들었다. 참 이상했다. 나디아의 눈이 슬금슬금 다시 망측한 인형 조각상으로 돌아갔다. 안나가 슬그머니 웃더니 말했다.
“뒤를 보면 태엽이 있답니다. 감아 보시겠어요?”
“네?! 저걸요? 이게 움, 움직이기도 해요??”
“그럼요. 움직이고말고요.”
움- 움- 움직인다고? 어떻게? 왜? 저러고 뭘 하고 있기에? 망측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머릿속과 달리 손은 조각상에 달린 태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디아는 호기심에 충실했다. 이미 불편할 것 같은 자세인데 뭘 어떻게 움직인다는 것인가….
끼릭끼릭…. 태엽을 다섯 바퀴쯤 감았다. 그리고 놓았다. 나디아는 조각상을 내려놓았다.
남자의 넓은 가슴팍이 흔들렸다. 그리고?.
끼릭, 덜컹! 끼릭! 허리가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였다. 중앙부가 깊이 붙을 때마다 여자 조각이 바르르 떨렸다. 끼릭, 덜컹! 바르르….
“…….”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호기심으로 눈을 떼지 못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갈 곳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어떤가요, 부인.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지요?”
“……네, 네에. 그, 그, 그러네요….”
그게 스테이턴 성의 기준인가?! 실제로 남녀의 조각상은 수도에서 흘러온 작품이었지만 나디아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므로 이곳의 문화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나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대답을 하면서도 저게 예술인지 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저 남녀는 대체 무얼 하는 것인가? 왜 볼일을 보는 곳을 붙이고 비비며 움직이는 것일까? 사람이 저래도 되는 것일까? 저게 좋은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머릿속에 조각상의 노골적인 모습이 꽉 들어차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조금 틀면, 그곳에는 온갖 포즈로 엉켜있는 남녀의 그림이….
“히, 히잉….”
머리에 피가 몰려 폭발할 것만 같았다. 눈앞이 팽팽 돌았다. 결국 나디아가 시뻘개진 뺨을 감싸고 주저앉자 안나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부인?! 역시 자극이 너무 심했나….”
“어, 어지러워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음기에 젖어 있었다. 안나는 너무 성급했다고 후회했다.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 했을 뿐이었는데, 움직이는 조각상까지는 너무 심했던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화끈 달아오른 뺨을 두드렸다. 난생처음 보는 해괴하고 망측한 조각상이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뺨을 달아오르게 만든 까닭은 따로 있었다. 물론 저 그림과 조각상 자체로도 충분히 부끄러웠지만…….
‘왜 저 남자 조각상 얼굴이 루크 얼굴로 보이지?!’
어젯밤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주었던 루크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이는 게 아닌가? 게다가 손끝에는, 잠에서 깨기 직전 더듬었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얇은 옷감 너머로 느껴지던 체온과 제 것과는 다른 단단한 근육 같은 것들….
‘엄마야!’
그리고 여자 조각상,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활짝 벌린 채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에는 자신의 얼굴이?.
“히이이이잉….”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어도 한번 떠오른 형상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
생크림을 저었다. 힘을 주어 저을 때마다 액체에 조금씩 힘이 붙었다. 거품기에 생크림이 엉겨 붙어 젓기가 힘들어질 때까지, 예쁜 뿔 모양이 잡힐 때까지 나디아는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
과자를 만들 때만큼은 어떤 잡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혀 위에 퍼질 달콤한 맛과 아기자기한 모양, 과자를 먹어주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상상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만 같았다. 물론 과자를 만들며 하나둘씩 집어먹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기분 탓인 셈으로 쳤다.
오늘 만들 과자는 진하고 꾸덕한 브라우니였다. 오븐에서 막 꺼낸 브라우니를 한 김 식히고, 그 위에 올릴 생크림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포크로 작게 잘라 생크림과 함께 한입에 쏙 넣으면, 진한 초콜릿 맛과 달콤한 생크림의 촉감이 모든 고민을 잊게 만들어 주리라.
생크림이 겨우 단단해졌다. 단단……. 나디아는 생크림이 담긴 볼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단해졌다는 말을 떠올리자마자 아침에 더듬었던 루크의 몸이 떠오르고 말았다.
자신과는 다르지만 사람의 몸이었고, 폭 안겨 자면 너무나 안심이 되는, 믿을 수 있고 착한 남편의 품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뛴단 말인가? 이건 다 안나가 보여준 망측한 시계판과 괴상한 조각상 탓이었다. 허리를 아래위로 움직여 몸의 중심을 부딪치는, 이상한 박자….
‘안 돼, 왜 자꾸 그 조각상에 루크와 내 얼굴을 붙여넣는 거야….’
너무 충격적인 물건을 보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부끄러우면서도 그 모습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게 더 문제였다. 틈만 나면,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자꾸 쿵덕, 끼리릭거리며 움직이던 조각상이 떠올랐다.
‘이래서 루크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 조각상에 그의 얼굴을 붙여서 생각했다는 걸 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