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안나도 처음부터 나디아를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낯선 환경에 주눅이 들었다고 해도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고 무작정 호감을 가질 정도로 안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세 우는소리를 할 줄 알았던 나디아가 홀로 불안을 꾹꾹 눌러 삼키며 견뎌내는 모습을 보고서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전 안 해요. 못 해요! 제게 책임을 지울 생각은 하지 마세요. 비상대책 회의라고 하여 무슨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나 했더니, 나에게 다 떠넘길 생각이었던 건가요? 싫어요. 그 순진한 분에게 어떻게 그런, 그런 얘기를 꺼내요? 입이 찢어져도 못합니다.”
“하지만 안나, 당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몰라요. 각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부부간의 일입니다. 우리가 어찌 끼어들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각하께서 평생 후사를 보지 못하셔도 좋단 말이오?!”
그랜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평생, 저 끔찍한 고문을 견디셔야 하다니…!”
“누가 보면 공작 부인께서 고문이라도 하시는 줄 알겠어요.”
“저게 고문이지, 그럼 무어야….”
노신사가 끅끅거리며 울 듯이 중얼거렸다. 제이도 침통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차라리 힘이라도 없으시면 몰라, 힘은 넘치시는데….”
“…자업자득 아니겠어요?”
안나가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안나, 제발요. 각하께서는 오늘도 기사단을 습격하실 거라고요!”
“훈련도 되고 좋지요.”
“헉, 각하께서 난동을 피우신 게?.”
게리가 뒤늦게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기사단 다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 싶으세요?!”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스테이턴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볼 수 있게 해주게!”
“각하께서는 절대 혼자 이 위기를 이겨내실 수 없어요!”
“제발, 안나!”
두 남자의 피를 토하는 애원에도 안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어요. …곧 동이 트겠네요.”
안나의 눈길이 게리에게 흘렀다. 게리는 동정 섞인 안나의 눈길에 커다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차라리 독설을 해줄 때가 좋았다. 안나의 동정은 독설보다 섬뜩한 무언가가 있었다.
“살아남길 바라요, 기사단장.”
“…….”
곧이어 제이와 그랜트도 게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는 되지 않았다.
안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딱 잘라 거절을 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랫동안 스테이턴 성의 살림을 보살펴 온 안나에게 젊은 영주 루크는 아들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비록 상상도 못 한 부분에서, 상상도 못 한 실망을 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돌봐 온 이에 대한 걱정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겠는가.
이 한심한 사태를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는 없는 바, 안나는 나름대로 해결 방법을 고민했다. 직접 망측한 성교육을 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공작 부인에게 성에 대해 일깨워 줄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자고로 교육에는 부교재와 시청각 자료가 필요한 법.
안나는 몇몇 심복을 비밀스럽게 불러들였다. 그들은 선대 공작 때부터 안나 밑에서 일을 해 왔던 사람들로, 입이 무겁고 신중했다. 혹여 이 비밀스러운 비상사태에 대해 눈치를 채게 되더라도 절대 밖에 나가 발설하지 않을 자들이었다.
그날 아침 늙은 시녀 서너 명은 성을 빠져나가 은밀한 뒷골목으로 향했다.
*
따끈한 것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디아는 잠결에 그것을 더욱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푹신하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고 표면이 부드러워 기댈 수가 있었다. 기분 좋아…. 목욕물에 잠겨있다 슬며시 떠오르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난 나디아는 흡족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따뜻하며 단단하고 부드러운 것, 베개는 아니었다. 베개가 이렇게 딱딱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럼 이게 뭐지….
흐릿한 시야는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리자 금세 또렷해졌다. 눈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까맣고 북실북실한? 얼굴?!
“꺅!”
“나디아?!”
“루, 루, 루크….”
나디아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뒤로 물러났다. 당황한 루크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간 눈에 익은 험악한 이목구비는 그녀가 잘 아는 이의 것이었다. 나디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따끈하고 단단한 게 루크였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품을 파고들어서는,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미안하오, 놀라게 해서….”
“루크 얼굴 보고 놀란 거 아니에요. 설마 자는 얼굴을 보고 계실 줄은 몰라서….”
루크가 자신이 깨어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제 눈을 떴을 때는 그녀 혼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차!’
나디아는 후다닥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내렸다. 잠옷 치마가 허벅지 위까지 말려 올라가 하얗고 통통한 다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입가를 닦아 확인했다. 설마 자면서 침을 흘리지는 않았겠지…. 다행히 입가 주변은 깨끗했다.
“저 잠버릇도 안 좋은데…. 자다가 루크를 때리지는 않았죠? 발버둥을 치다가 발로 찼다거나….”
때려봐야 간지럽기나 하겠는가? 루크는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얌전히 잘 자던걸. 너무 곤히 자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소.”
“…저 때문에 늦은 거 아니에요…?”
언뜻 보아도 이미 날이 밝은지 오래였다. 어제는 새벽같이 나갔던 루크가 자신 때문에 늦게까지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고 잡혀 있었을까 봐 나디아는 너무나 미안해졌다. 루크는 어쩐지 초췌한 인상이었다. 눈 밑도 어쩐지 어두운 것이 피로해 보였고, 수염에 덮이지 않은 피부도 푸석푸석해 보였다.
‘내가 너무 무거워서 밤새 고생하셨구나….’
그저 따끈한 무언가가 기분 좋아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끌어당겨 안고,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나디아는 자신이 친구들에 비해 통통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평균 여성보다 키도 큰 편이라 무게도 많이 나간다고 여겨 그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밤새 제가 달라붙는 바람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깨와 목이 얼마나 아팠을까? 나디아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다시 루크를 살폈다. 그는 천천히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자세가 어쩐지 어정쩡했다. 어깨가 무겁고 허리가 아픈 사람처럼 굽어 있었다.
‘어떡해, 나 때문에….’
루크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허리에는 채 걷지 않은 이불이 걸려 있었는데, 전신이 근육으로 짜여진 저 날렵한 사람이 이불조차 제대로 걷지 못한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나디아가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콩콩 두드려주었다.
“윽?!”
“미안해요…. 나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해서 몸이 굳었죠.”
“아니, 아니오! 나디아, 제발….”
콩콩콩, 가렵지도 않은 힘이었건만 허리를 두드리는 손길에 루크는 죽을 것만 같았다.
“제가 너무 세게 쳤나요?!”
“그? 그게 아니오…. 난 정말 괜찮소.”
루크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나디아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가느다란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연약하게 느껴졌다. 나디아는 그가 떼어낸 손과 여전히 어정쩡하게 굽히고 있는 그의 등허리, 그리고 이제는 확실하게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루크….”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미안하지만 아침 식사까지 함께 들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네, 전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보세요. 식사 꼭 챙기시고요….”
“일어날 필요 없소! 더 자요!”
다급한 목소리가 일어나려는 나디아를 급히 만류했다. 조금 큰 목소리에 나디아는 놀란 것 같았으나, 그의 얼굴을 살피고는 화난 기색이 없어 안심했다. 그녀는 일어나려던 자리에 주저앉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루크.”
“……쉬고 있으시오. 시녀장과 집사에게는 말을 해두겠소.”
“네.”
방긋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의 등 뒤로 커다란 창을 통해 햇살이 비쳤다. 나디아는 본래 예쁘지만, 햇빛을 후광처럼 등지고 있을 때에는 밝은 금발이 천사의 금관처럼 보여 아름다웠다. 루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밤새 그녀를 두고 갖은 상상을 했던 자신이 죄라도 저지른 것 같아 차마 그녀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나디아가 허리를 두드리는 건 물론이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금기였다. 밤새 아프도록 힘을 받은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는 이불로 허리를 둘러 가렸고, 일어서고 난 후에는 뒤를 돌아 그녀를 보지 않는 것으로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살핀다면, 금세 알아차릴 것이었다.
아니, 알아차리는 게 좋을까. 이 흉물스러운 것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나디아가 그의 고통과 인내를 알아주지 않을까. 루크는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보았으나 이내 지웠다. 어렵사리 경계를 풀고 안심을 시켰는데, 이것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또 겁을 집어먹을지 몰랐다.
달라붙어 있는 밤은 고통스러웠지만 끔찍하게 행복하기도 했다. 제게 달라붙어 안심한 듯 새근새근 잠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건드릴 수 없어 괴롭고, 온갖 망상으로 그녀를 더럽힌 죄책감이 치밀어 오르지만 그래도 그녀가 안심하고 기대어주는 건 행복했다.
행복하지만…… 나디아는 왜 이렇게 무방비할까? 그녀는 자주 뒤척거렸고, 그녀가 움직일수록 얇은 잠옷 자락은 쉽게 둘둘 말려 올라갔다. 루크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하얗게 드러난 탐스러운 허벅지를 보지 않으려고 밤새 천장만 노려보았다.
루크는 비틀거리며 침실을 나섰다. 이틀을 꼬박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제아무리 체력이 좋은 루크라도 힘이 들었다. 그냥 밤을 새웠다면 모를까, 전신에? 특히 아랫도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밤을 지새워야 했으니…….
‘제이와 상담해보자….’
어떻게든 나디아를 겁먹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미 새벽에 성의 간부들이 모여 비상대책 회의를 열었음을 알지 못하는 루크는 자신의 유일한 상담자를 닦달해 해결책을 강구 해낼 참이었다. 그 혼자서는 이 행복한 고문을 끝낼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루크는 침실 문을 닫고 뻣뻣하게 일어선 아랫도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밤새 그를 괴롭힌 주범……! 이대로 누군가의 앞에 나설 수는 없었다. 순진한 나디아 외의 다른 사람은 그가 어떤 상태인지 한눈에 알아볼 테니까 말이다.
결국 찬물 샤워밖에 도리가 없나. 그는 어기적어기적 샤워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