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3. 손대면 터질 것 같아
스테이턴 성은 때아닌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외지 경계를 맞댄 야인이 침입하지도 않았고, 전염성 불치병이 유행하지도 않았다. 극심한 가뭄이나 혹한으로 굶어 죽는 영지민이 생기지도 않았다. 스테이턴 성은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현명하게 이겨내 왔지만 이번 비상사태만은 머리를 맞대어도 도통 타개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하 회의실에 모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영지민의 존경을 받는 영웅들이었다. 스테이턴 영주를 모시는 최측근이며 맡은 바 임무에 대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심각하게 굳은 안색은 그들이 당면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주었다.
“모두 모이셨군요.”
타오르는 촛불이 흔들리며 무거운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제이드 앨런이었다. 그는 영주의 수석 보좌관으로, 영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나운 성질을 가진 영주를 상대로 겁먹는 일 없이, 입이 비뚤어져도 바른말만 하는 남자로 유명하다. 반듯한 외모와 건장한 체력, 시니컬한 눈빛 등으로 일부 여인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도 했다.
“쓸데없이 무게 잡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요.”
침울한 제이의 말머리를 자르고 여인이 말했다.
여인의 이름은 안나 브로이어였다. 몰락한 자작 가문의 차녀로 태어난 그녀는 스테이턴 성의 살림을 맡고 있는 늙은 시녀였다. 선대 스테이턴 공작이자 루크의 조부가 영지를 다스릴 때부터 그녀는 스테이턴 성을 위해 일을 했다. 어린 시절 루크를 키우다시피 한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안나는 언뜻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피부에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지만 꼿꼿하게 편 허리와 반듯한 어깨, 우아한 자세가 그녀의 나이를 실감할 수 없게 해주었다.
선대 스테이턴 공작이 죽고 어린 루크가 작위를 승계받는 과정에서 각종 사건이 터지는 동안 성을 굳건하게 지켜낸 사람도 안나 브로이어였다.
“시녀장의 말이 맞습니다. 곧 동이 틀 테니….”
이어 말을 꺼낸 사람은 집사 그랜트 존스였다.
희게 샌 머리칼을 말끔하게 뒤로 넘겨 정리한 늙은 신사는 인자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멋스럽게 다듬은 수염이 그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루크가 수염을 기르기로 한 계기가 바로 집사 그랜트의 수염이었다.
안나와 마찬가지로 선대 공작이 살아있을 때부터 스테이턴 성의 살림을 책임져 온 집사 그랜트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성질을 부릴 때에도 고분고분해지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뭐 때문에 모인 거라고 하셨죠?”
그리고 심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어색한 듯 눈치를 보고 있는 건장한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모르면 듣고 있기나 하게.”
“다짜고짜 새벽부터 자던 사람을 끌고 와 놓고 이게 무슨….”
남자는 스테이턴 성의 기사단 ‘흑곰’의 단장 게리 노스였다. 외모로 기사단장이 되었나 싶을 만큼 그 역시 사람보다 곰처럼 보였다. 루크가 대왕 흑곰이라면 그는 왕 흑곰 정도는 됐다.
종종 검이 아니라 도끼를 무기로 써야 하지 않겠냐는 조롱을 받는 게리는 루크와 달리 덥수룩한 수염 없이 말끔한 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염의 도움 없이 작은 눈과 그을린 피부, 우락부락하게 부푼 체격만으로 곰 같은 이미지를 얻어냈다.
외양처럼 그는 퍽 단순한 사람이었다. 단순하고 우직했다. 실제로 게리는 지휘관이라기보다 행동대장에 가까웠다.
그는 숙면을 즐기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제이와 그랜트에게 뒷목을 잡혀 끌려왔다. 전후 사정 파악은커녕 자신이 왜 여기에 끼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멀쩡한 2층 회의실은 놔두고, 정작 비상사태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지하 회의실에 모인 이유는 무엇인가. 동도 트지 않은 새벽,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데 왜 촛불은 하나밖에 켜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제이, 안나, 그랜트 모두 마치 전쟁에라도 임하듯 비장한 얼굴로? 의복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 모르게 적침이라도 있었나?’
게리는 가장 그럴듯한 까닭을 추리했다. 새벽의 스테이턴 성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에게만 들리지 않았을 뿐, 이미 2층 회의실은 쓰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핫, 그럼 각하는…!’
게리가 커다란 몸을 파르르 떨자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안나가 혀를 찼다.
“각하께서는 침실에 계십니다.”
“그럼 적침이 아닌 겁니까?”
“상식적으로 적침이 있었다면 우리끼리 여기 이러고 있겠어요?”
“그… 그렇죠?”
게리의 커다란 어깨가 쭈글쭈글 접혔다. 안나의 매서운 독설 앞에서는 누구나 작아지고 말았다. 그랜트와 제이가 그를 안쓰럽게 보는 것도 모르고 게리가 말했다.
“그럼 저희는 왜 여기 모여 있는 겁니까?”
어차피 안나는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 게리의 시선은 그랜트를 향해 있었다.
그랜트는 다시 무겁고 어두운 얼굴을 했다. 그에 게리가 더욱 쭈글쭈글해진 건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스테이턴 가문의 성립 이래로 가장 심각한 비상사태를 맞았기 때문이라네.”
“네?!”
“오랜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이 같은 위기는 맞은 적이 없었지….”
침통하게 중얼거리는 그랜트에게 안나가 톡 쏘았다.
“이처럼 한심한 위기도 없었지요.”
위기? 한심해? 비상사태? 게리의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성의 중추인물들이 이처럼 심각한데, 기사단장이라는 자신은 비상사태는커녕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스테이턴 성은 위기는커녕 오히려 분위기가 좋았다.
스물여덟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아 골치를 썩이던 스테이턴 공작이 드디어 결혼을 했고, 후사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서두르느라 부부 관계에 조금?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제 날짜로 다 해결되지 않았는가?
끝까지 감도 잡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게리에게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줄 인물은 이 자리에 없었다.
사실 설명을 해주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누가 말씀을 꺼낼 겁니까?”
“크흠, 그런, 그런 종류의 일은 역시….”
그랜트의 눈길이 안나에게 흘러갔다. 안나는 턱을 치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에게 성교육을 떠맡길 생각이세요?”
“크흠, 큼, 그렇다고 우리가 말을 꺼내기엔 좀, 이상하지 않겠소?”
“……확실히 늙은 남자가 잠자리에 대해 묻는 건…… 기분이 나쁘겠죠.”
그랜트와 제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랜트만이 아니다. 제이가 그런 말을 꺼내는 것도 이상했다.
“싫어요.”
그러나 안나는 자신이 일의 해결을 떠맡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안나!”
“왜요? 난 그런 말 하기 싫어요. 당신들, 공작 부인이 어떤 분인지 알고는 계세요? 그랜트, 당신은 인사를 한 번 나눈 적이 있었죠.”
“예, 딱 한 번….”
그랜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첫날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공작 부인을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랜트는 루크의 시중을 주로 들었으며, 공작 부인의 시중은 안나가 책임지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이 스테이턴 성에 도착한 날에 나누었던 짧은 인사는 노신사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기가 약한 사람처럼 보였다. 꿀처럼 진한 금발과 눈처럼 하얀 피부, 유독 커다란 녹색 눈동자. 눈을 마주치면 습관처럼 웃어 주는 상냥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대체 이 여인의 어떤 점이 주인을 그토록 사로잡았는지 의아했다. 루크는 연약한 사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안나와 그랜트, 제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랜트는 안나가 새로운 공작 부인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공작 부인의 시중을 들게 된 후 몇 번이나 그녀에 대해 물었으나 안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아꼈다.
“어떤 분인 것 같았어요?”
“어떤 분이냐니…. 부드럽고 친절한….”
“맞아요. 그분은 매우 친절하시죠.”
안나가 그랜트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착해요.”
“……그, 그랬군.”
“그리고 매우…….”
안나는 한 박자 숨을 쉬었다. 제이와 그랜트, 상황 파악이 안 된 게리까지 그녀에게 더욱 집중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매우? 순진하시죠.”
“아…….”
제이와 그랜트가 긴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이 이 비상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두 번째 원인은 숫기 없어 슬픈 루크였고 말이다.
문득 안나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결코 연약한 분은 아니에요. 한 달이나 이 낯선 성에 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도 우는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어요.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 없이 존중을 해주고, 예의를 지키려고 하죠. 갑작스럽게 떠밀려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불안하고 억울할 법도 할 텐데도 상황을 원망하지도 않으셨어요.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에요.”
“허….”
그랜트는 감탄하고 말았다.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공작 부인은 저 까다로운 시녀장의 마음을 얻어낸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가. 그리고 안나가 매섭게 덧붙였다.
“공작 부인께서는 그 어떤 수작도 부리지 않았어요. 사람이 다 당신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랜트.”
“아, 알았네. 오해하지 않겠네.”
“연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보다 비굴해지기 쉬워요. 연약한데도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죠. 전 그렇게 판단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