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
루크는 당연히 잠들지 못했고, 나디아도 어쩐지 잠들지 않은 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디아는 나디아대로 작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상하네. 뭔가 허전해. 이상한 것 같아.’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나디아도 부부는 처음이었으니까. 남편과 보내는 밤이 익숙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까? 부부는 처음이니 이상한 걸 느끼지도 못해야 정상이 아닐까?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부는 같은 침실을 쓰며, 꼭 끌어안고 자야 한다.
나디아의 부모님은 거기까지만 알려주었다.
꼭 끌어안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결혼시키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어야 했지만, 그들에게 나디아의 결혼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언젠가 닥치겠지만 당장은 아닐 일.
언젠가 나디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천천히 연애를 하고, 결혼이 결정되면 그때 마음을 먹고 알려줘야지 하고 미뤄두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디아는 언제까지나 아기 같은 막내딸이었다. 부모에게 자식은 일흔이 되어도 어린애라지만,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있는 나디아는 유독 어리게 여겨진 것이다. 막내딸에게 성인의 세계를 차마 알려줄 수 없었던 그들은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법한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둘러대었다.
다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되면 어련히 알게 되려고. 그런 마음이었다.
실제로 못되고 야한 것들은 부모가 알려주기보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것이었다. 부모가 가르쳐 줄 것은 예의나 절제, 상냥하고 다정한 마음씀씀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나디아가 지나치게 부모의 바람대로 자란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걱정이 많았던 나디아는 어젯밤 술과 안도의 힘을 빌어 푹 잠들었지만 오늘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부인으로서 성의 관리도 맡겨준다고 하였고, 남편은 자신에게 성의를 다하며 아껴준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아!’
나디아는 문득 무엇이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들어 루크를 훔쳐보았다.
가까이 달라붙어 있던 덕분에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 쉽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야수인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었는데, 그녀는 이제 그의 수염이 싫지 않았다. 아직 낯설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매서운 눈매도 무섭지 않았다. 꽤 사나운 인상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따뜻한 눈동자가 있었으니까….
나디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루크는 완전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두꺼운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조금 전부터는 말도 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매를 보고 용기를 얻은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루크의 수염을 건드려보았다. 루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잠드셨나 봐.’
나디아는 조금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의외로 매끄러운 수염을 살짝 쓰다듬었다가? 위로 향했다. 따뜻한 피부가 닿았다.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나디아의 손이 루크의 얼굴을 덮듯이 쓰다듬자 그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꺅!”
“…나디아.”
루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켜며 상체를 일으키고, 제 얼굴에 닿았던 나디아의 손을 살짝 잡아서 떨어뜨렸다.
낮은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화, 화났나? 허락도 없이 얼굴을 만져서….
“…나디아.”
살짝 올려다보는 나디아를 마주한 루크가 다시 한번, 어딘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화난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디아가 물었다.
“미, 미안해요. 기분 나빴어요?”
“…그럴 리가. 놀랐을 뿐이오.”
“신기해서….”
만져보고 싶었다.
“…….”
루크는 나디아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순간도 잠든 적이 없던 그는 물론 나디아가 팔을 들어 올릴 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가 수염을 건드렸을 때 티 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참았던가? 움직이지 않던 전신은 힘이 뻣뻣하게 들어간 근육의 활약 덕분이었다.
“잠드신 것 같아서 몰래 만져보려고 했던 건데…… 깨실 줄은 몰랐어요. 불편하셨죠.”
“……당신이 무엇을 하든 내가 불편해할 일은 없을 거요. 날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말을 하면서도 루크는 제 발등을 찧는 심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뱉은 말을 철회하고 당분간만이라도 좋으니 떨어져 자자고 해 볼까, 몇 초에 불과한 찰나에 수백 번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입은 벌렸으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디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루크, 그럼, 앞으로도 루크를 만져도 돼요?”
“…….”
왜 단어 선택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나? 아닌가?’
루크는 나디아가 정말 다 알고서 이러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만져도 되냐는 말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루크는 바람만 불어도 야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아니, 나디아라면 머리카락 한 올조차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만 해도, 눈만 깜박거려도…….
그는 독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디아가 팔을 들었다.
루크는 그녀가 때릴 것도 아닌데 전신을 긴장시켰다. 평소 단련해 온 근육이 마치 전투에 나가기 직전처럼 단단해졌다. 당연히 나디아는 루크를 때리지 않았다. 루크는 나디아가 팔을 드는 순간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간 자신의 머리를 깨부수고 싶었다.
나디아의 손이 루크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 나디아에게 내어주지 않았던 팔이었다.
“……?”
그녀는 아마 그대로 들어 올리려 했던 것 같지만, 루크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디아가 끙 소리를 내자 그제야 루크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슬쩍 들어주었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몰라 루크도 어리둥절했다. 나디아는 루크의 반대편 팔을 잡아서, 그대로…….
“……나디아?”
“헤헤.”
그대로 제 허리에 둘렀다…….
나디아가 바라는 대로 끌려 오려니 자연스럽게 루크의 몸도 돌아갔다. 그러니까, 나디아와 마주 보는 방향으로 말이다.
루크는 손바닥을 쫙 폈다. 손바닥이라도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돌아간 몸 아래로 나디아가 쏙 들어왔다. 루크가 떨어져보려 겨우 손바닥이나 빠듯하게 펴는 사이 그녀는 그의 품에 폭 안긴 채 매우 만족스럽게 웃었다. 루크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나디아가 그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맞추었다.
나디아는 유독 눈을 맞추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루크도 굳이 말하자면, 시선을 피하는 사람보다는 똑바로 마주 바라보는 사람을 좋아했다. 지금 이 순간만 빼면.
이제 도망갈 곳이 없다. 피할 곳도 없었다. 어젯밤은 침대가 넓어 뻣뻣하게 굳어 견디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나디아의 전신이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고문이 업그레이드됐다.
나디아가 말했다.
“꼬옥, 안고 자야죠. 그렇죠?”
“…….”
그렇고말고. 꼬옥 안고 자야하고 말고…….
그날도 루크는 잠들지 못했다.
*
나디아가 태어난 랭커스터 가문은 비록 신분이 대단하거나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 어떤 집보다 화목했다. 랭커스터 부부는 의견이 달라 다툼이 있을 때에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고,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다. 어린 나디아의 머릿속에 박힌 부부의 모습은 바로 랭커스터 부부의 모습이었다.
부모님은 어린 자식들의 눈으로 보아도 가끔 샘이 날 만큼 다정했다. 스킨십 또한 많은 편이었다. 그들은 가까이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손을 잡거나 서로를 끌어안았고, 감사 인사와 버드 키스를 자주 나눴다. 서로를 보는 눈빛은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콤했다.
“저도 언젠가 결혼을 하겠죠?”
어린 나디아가 물었다. 랭커스터 남작 부인은 딸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랭커스터 남작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아직 어린 딸이 결혼하는 장면을 상상해버린 탓이었다. 남작이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지 않니, 나디아.”
“……그건…… 그렇겠지만.”
“아직 이 아비의 품에서 떠나지 말아다오!”
남작 부인이 남편을 흘겨보며 그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당신 말대로 아직 먼 미래의 일이잖아요. 성급하게 울지 마세요.”
“하지만…… 상상만 해도.”
“이이도 참. 못 말린다니까.”
그러나 힐난하는 말과 달리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에는 사랑이 흘러넘쳤다. 나디아는 내심 아버지 못지않게 어머니도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먼 미래도 아니지. 나디아, 네가 올해 몇 살이었지?”
“다음 달이면 열넷이 돼요.”
“……그럼…….”
정말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남작 부인도 말끝을 흐렸다. 그녀 또한 아직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어디론가 가버린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허전하고 슬퍼진 것이다.
“어, 어머니……?”
“우리 예쁜 나디아, 언제 이렇게 컸니…….”
남작 부인이 나디아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그리고 남작이 그들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언젠가 결혼을 하겠지, 라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부모님이 눈물을 터뜨리자 나디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끌어안고, 손을 잡고서 다정하게 바라보는 부부. 나디아는 언젠가 자신도 부모님 같은 짝을 만나고 싶었다.
“우리 예쁜 나디아, 멀리 가면 안 된다.”
“아이참, 어머니도. 저 어디 안 가요. 제가 어딜 가겠어요?”
나디아는 활짝 웃으며 울먹거리는 부모님을 달랬다.
9년 후, 야수라는 공작에게 청혼을 받아 멀리 떠나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