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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1화 (11/150)

10화

그 뒤로는 더 속전속결이었다.

레너드의 조언대로 청혼을 한 다음 날 랭커스터 가문은 의외로 선선하게 허락의 뜻을 전해왔다. 루크는 뛸 듯이 기뻐했고, 레너드는 그의 옆에서 즐거워했다.

루크는 나디아를 아내로 맞을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 빠른 결혼을 추진했다. 레너드가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도움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결혼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때…… 레너드 그 자식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어.’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었다.

이제 와서는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루크는 당시 제 감정에 버거워서 랭커스터 남작 부부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 스테이턴 가문의 위상은 루크의 실감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평소 영지에만 머물며 수도에는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권력의 크기에 따른 상하관계가 이토록 명백한 줄은 미처 몰랐다. 레너드의 말처럼 싫으면 거절하겠지,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랭커스터 남작 가문이 스테이턴 공작 가문에서 보낸 청혼서를 받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히 거절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청혼에 대한 대답은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왔다.

랭커스터 남작 부부는 스테이턴 공작에게 마치 협박이라도 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애지중지 곱게 키운 막내딸을 얼굴도 보지 못한 공작에게 시집보냈으니 죄책감도 컸을 터다. 루크는 결혼식 당일에나 보았던 랭커스터 남작 부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얼굴은 무척 우울하고 어두웠다.

그렇게 결혼식이 치러지고, 충격적인 첫날밤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이건 벌일까? 제이의 말마따나 납치나 다름없이 결혼한 벌인 것일까? 그렇다면 이 벌의 반절은 레너드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여인과의 교제에 지나치게 무지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

루크는 지옥문을 앞둔 듯 매섭게 침실 문을 노려봤다. 눈빛은 두꺼운 문을 뚫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누가 보면 그가 철천지원수를 앞에 두었다고 오해할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사랑하는 부인과의 동침을 앞둔 남편이었다.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있을 뿐, 그리고 다가올 고문을 견뎌낼 각오를 다지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싫은 건 아니었다. 루크는 목 안쪽으로 신음을 삼켰다. 싫을 리가 있겠는가? 나디아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의 상상보다,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던 첫 만남 때보다 지금이 더 아름다웠다. 그러니 싫을 리가 없다…….

다만 너무 괴로울 뿐이다.

루크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도저히 제 손으로 고문실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진짜 고문이 나을 것 같았다. 누군가 그를 하루 종일 두들겨 팬다고 해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때 문이 달칵 열렸다.

“어머, 각하!”

“……나디아.”

“아니, 아니지. 루, 루크….”

나디아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뺨이 붉었다. 루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얼굴 근육이 풀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바보처럼 헤, 하고 근육이 늘어질 것 같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먼저 주무셔도 되었는데.”

“아니에요. 잠도 오지 않는걸요. 다만 입이 심심해서, 간식거리라도 부탁할까 해서….”

나디아가 루크의 뒤를 흘긋 살폈다. 같이 온 시종이나 시녀를 찾는 눈길이었다. 루크는 쓸데없이 사람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하는 편이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을 부르겠소.”

“예?!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루크가 다시 나갈까 봐 급히 그의 소맷부리를 붙잡기도 했다. 살짝 팔을 흔들기만 해도 떨어질 힘이었지만 루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입이 심심하신 것 아니었소?”

“아녜요. 루크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 그랬던 거지, 지금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디아가 배시시 웃으며 머뭇거렸다. 루크가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자 그녀가 이어 말했다.

“바, 밤에 먹으면, 살찌잖아요….”

“……?”

“저는, 그렇지 않아도 조금, 통통한 편이니까…. 밤엔 먹지 말라고 엄마도 혼내시고는 했어요.”

“딱 보기 좋은데.”

나디아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오.”

“헤, 헤헤….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빈말이 절대 아니었지만 루크는 입을 다물었다. 나디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을 걱정해서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했다. 자신이 레너드처럼 “천사처럼 아름답다.”라는 둥의 칭찬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디아, 바로 잘 거요?”

“음…. 아니요. 아직 졸리지 않아요.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그럼 간식을 가져오라 이르지. 당신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입이 좀 심심해졌어.”

나디아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루크는 시종을 불렀다. 간식을 좋아하는군. 나디아와 달달한 과자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녀는 살아있는 생크림 천사 같았으니까. 루크는 제이에게 겁먹어 주저앉는 이발사 대신 과자를 잘 만드는 요리사를 찾아보라고 말하기로 했다.

“오늘은 무얼 했소?”

루크는 최대한 침대에 들어가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나디아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건, 나란히 누워 혼자 뜬 눈으로 허벅지를 찔러야 하는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했다. 나디아가 말했다.

“일어나보니 이미 점심 때였어요. 제가, 어, 너무…… 긴장했었나 봐요. 늦잠을 다 자고…….”

“신경 쓸 것 없소. 자고 싶은 만큼 자요.”

“……헤, 헤헤. 그리고 안나가 식사를 챙겨 주어서 든든하게 먹었고요. 그리고 잠깐 정원을 산책했고…….”

말을 이어가던 나디아의 안색이 문득 어두워졌다.

“나디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불편한 점이라도 있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스테이턴 성은 이제 당신의 집이오. 만약 누군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루크는 저도 모르게 험악한 인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환경에 떨어져 겁을 먹었을 나디아를 괴롭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설령 제이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스테이턴 성에는 감히 공작 부인을 괴롭힐 만큼 간이 큰 사람이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인 것이다. 성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성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모두 친절하세요.”

“그렇다면…….”

어째서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이냐, 당신이 우울하면 내 마음이 찢어진다…… 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크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디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나디아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심심해요….”

어린 투정이라 생각한 건지 나디아는 괜히 부끄러워했다.

“저, 자수를 놓는 건 좋아하지만 그것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산책도…. 너무 빨리 끝나니까….”

“아…….”

루크는 탄식했다. 제가 어색하고 어려운 것만 생각했지, 오랫동안 방치된 채 시간을 보냈어야 했던 나디아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또 제 무심함이 나디아를 휘둘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없이 미안해졌다.

스테이턴 영지는 부유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수도만 한 문화시설을 갖추지는 못했다. 게다가 여기에는 그녀의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나디아는 온전히 혼자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공작 부인은 무얼 해야 하죠? 어머니께 듣기로는 성의 관리를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제가 할 수 있을지….”

“성 내부의 관리는 집사와 시녀장이 맡고 있소. 내일 날이 밝으면 그들에게 소개를 시켜주리다. 이미 인사는 했겠지만….”

“네, 첫날 이미 집사님께 인사를 받았어요.”

“직접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많지 않을 거요. 중대사가 있을 때에만 나디아, 그대가 판단하는 대로 결정해주면 돼. 내 미리 말을 해두겠소.”

나디아가 환하게 웃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을 믿고 말해준 루크가 고마웠고, 그제야 이 성에서의 제 자리와 역할이 생긴 것 같아 기뻤다.

“고마워요…!”

“…내가 먼저 신경을 써주었어야 했는데, 미안하오.”

“아니에요, 정말 괜찮은걸요!”

“……그 외에도 혹시 하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이든….”

“어, 저, 그렇다면.”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크가 나디아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트레이를 들고 들어온 사람은 안나였다. 나디아가 반가운 듯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트레이에는 나디아가 좋아하는 과자가 잔뜩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과자를 챙겨 왔습니다, 각하.”

“두고 나가게.”

“……예.”

나디아를 보며 환하게 마주 웃어 주었던 안나는 루크에게 무척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눈길에는 “이 한심한 놈”이라고 쓰여있는 것만 같았다. 루크는 울컥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나도 알고 있다. 루크는 깨달았다. 저 나이 많은 시녀조차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을 두고도 그 어떤 짓도 하지 못하고? 인내와 고행의 밤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루크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나가 나가고 나디아는 과자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각하, 아니, 루크는 과자 좋아하세요?”

“음? 좋….”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루크는 달달한 과자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도 찾지 않았으니 다 큰 지금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저 반짝거리는 눈을 앞에 두고 어떻게 “싫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하지.”

“저도 좋아해요! 혹시, 괜찮다면, 가끔 주방에 가서 과자를 만들어도 될까요? 본가에 언니가 오면 같이 과자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는 했거든요. 어, 잘하지는 않지만, 맛있게 먹어주는 걸 보면 기쁘고….”

“……무척 어울리는 취미요.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아도 되오. 마음껏 과자를 만들 수 있게 준비하라 하겠소.”

나디아는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또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감사 인사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순수하게 기뻐하고, 쉽게 감동했다. 루크는 가슴 안쪽이 녹인 설탕처럼 흐물흐물해지고 달달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디아가 손을 뻗어 과자를 집었다. 딱 알맞게 구워진 쿠키는 달콤하고 고소해 보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쿠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오동통하고 붉은 입술을 벌려 한 입 베어 물었다…….

‘진정해라,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고작 과자 한 입 베어 먹었을 뿐인데, 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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