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여인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의 호의에 이끌려 모인 사람들은 아직 신원미상의 부랑자에 대한 경계를 채 지우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위험할 게 분명해 보이는 남자에게 부주의하게 다가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게 당연했다.
여인이 그에게서 시선을 뗀 바로 지금.
초조한 마음에 여인이 내민 손수건을 꾹 쥐었다. 적진 한복판에 던져진 듯 전신이 긴장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틈을 찾았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때를 보다,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앗! 선생님!”
여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아서 루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도망쳤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빠른 속도였다. 약 먹은 소처럼 내달리는 그를 피해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사람이 없는 골목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헉, 허억….”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 건물과 건물 사이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숨어든 루크가 숨을 골랐다.
여인이 다급하게 외치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선생님이라니, 선생님이라니! 평생 들어본 적도 없고 들을 일도 없던 호칭이었다. 부랑자를 향한 호칭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했다. 여인은 그를 정말 환자라고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욱….”
다 가신 줄 알았던 술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습한 골목에 버려진 쓰레기 냄새와 곰팡이 냄새 때문에 구역질까지 났다.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입가에는 거친 손바닥 대신 부드러운 손수건이 닿았다. 여인이 내밀었던 손수건이었다.
옅은 베이지색 손수건은 곱게 장미 자수가 놓여 있었다.
‘아끼던 손수건이었을 텐데, 정체도 모르는 부랑자에게 건네주다니….’
수도에는 레너드 같은 인간만 있는 줄 알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머물렀을 때에도 그들 주변에 모인 인간 군상은 거의 비슷했다.
자신들의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의무는 모르고 권리만 따지는 사람들이었다.
루크는 손수건을 보며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세에 강림한 천사처럼 아름답던 얼굴은 빛이 남긴 잔상처럼 그의 눈꺼풀 아래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손수건에 묻은 여인의 향기에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심장병인가?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 탓에 전신에 피가 활발히 돌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걸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심장 부근의 옷을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몇 번이나 깊게 심호흡을 해 봐도, 다른 생각을 해보려 해도 눈꺼풀 아래 남은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냄새 나는 골목에 주저앉아 있음에도 손수건에 묻은 희미한 향기가 무엇보다 강렬하게 코를 자극했다.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심장도 진정되질 않았다.
루크는 손수건을 뒤집었다. 곱게 접힌 손수건 안쪽에는 주인의 이름이 단정한 글씨로 수놓아져 있었다.
‘나디아 M.랭커스터’
나디아, 나디아라고 하는구나. 루크는 ‘나디아’하고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나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심장이 한층 더 빠르게 뛰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술렁거림이 전신으로 퍼졌다. 지독한 불안감과도 닮은 설렘이었다.
루크는 ‘나디아’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며 손수건을 주머니에 곱게 넣었다.
*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 루크의 상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열병 같은 첫사랑이었다. 어떻게든 그 여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공원을 다시 찾아가 볼까 망설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원에 다시 찾아간다고 한들 그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만나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환자, 혹은 부랑자로 알고 있을 텐데? 이제 와서 어떻게 신분을 밝히고…….
돌연 생각이 멈추었다.
‘신분을 밝히고…… 뭘 하지?’
여인을 만나고 싶다, 반했다, 그 얼굴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루크는 일생 단 한 번도 여성과 교제해본 적이 없었다.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시간도 없었다. 조부가 돌아가신 후 작위를 승계받고, 공작령을 다스리는 데만 몰두하느라 연애의 ‘연’도 떠올리지 못했다. 무뚝뚝한 성격과 험악한 외모도 한몫을 했다.
그의 인생에 가까운 여인은 돌아가신 어머니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일찍 돌아가셔서 단편적인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시중을 들어주는 스테이턴 성의 시녀나 하녀가 있었지만, 그들은 감히 영주에게 가까이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루크는 대개 기사단과 같이 생활했고, 공작령의 업무를 보는 사무관이나 집사와 교류를 했다. 몸을 단련하고 검술을 수련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는 모두 풀렸고, 후계자나 결혼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는 험악하게 성질을 부렸다.
언젠가 결혼을 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만 했지,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루크는 이때에, 아마 먼 훗날에는 후회하지 않을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의 상황과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레너드에게 상의해버린 것이다. 심복은 모두 영지에 두고 와 달리 상담을 할 상대가 여의치 않았고, 제 주변에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해 가장 밝은 것이 레너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너드의 연애 상황에 대해서는 한 톨 아는 바가 없었지만, 저 화려한 외모를 하고서 여성과의 교제 경험이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황통의 후계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해야 할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레너드는 전후 사정을 듣고서,
“으하하하하하하하하!”
“…….”
“으학학, 으헉, 크흡, 컥!”
“…….”
“아학, 아하학!”
그야말로 대폭소를 했다.
루크가 질색했던 우아한 행동거지나 체면은 집어던진 대폭소였다. 평소에도 이랬으면 루크는 레너드를 아주 조금 덜 싫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창피함이나 비참함은 둘째치고.
“다 웃었습니까?”
“으흑, 아흑, 허억….”
“다 웃으셨냐고 여쭸습니다.”
“아니, 아직…. 어흑… 배, 배 아파….”
“…….”
“으흐흐흑….”
이제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흐느낌이었다. 루크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뭐, 뭘….”
“그 여인을 다시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만난 다음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말이다.
레너드는 눈물을 훔쳤다. 아직도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지만, 그는 겨우 진정한 것 같았다. 루크는 불만을 꾹꾹 억누르며 레너드가 줄 해답을 기다렸다. 그는 제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자네는 그 여인과 무얼 하고 싶은데?”
“무얼, 하고 싶냐뇨….”
“그렇지 않아. 만나기만 하면 끝인가? 다시 한번 만날 수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계속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은 건가?”
레너드는 드물게도 루크가 알아듣기 쉽게, 비비 꼬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를 놀리려는 의도일 테지만 생각할 여유가 없는 루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계속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자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로군!”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냐고 계속 묻고 있지 않습니까.”
얕은 인내가 바닥난 루크가 으르렁거렸다. 레너드는 즐거운 듯 싱글벙글 웃으며 턱을 괴었다.
“자네가 아는 건 그 여인의 이름뿐이고.”
“예.”
“다시 만나서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싶다.”
“그렇습니다.”
같은 말을 왜 계속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수도의 방식이라면 루크는 역시 이 도시와 맞지 않았다. 레너드가 말했다.
“청혼하게.”
“예?!”
“여인과 맺을 수 있는 긍정적인 관계의 끝은 결혼이 아니겠나. 마침 이름도 알고,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도 알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이야. 당장 청혼하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루크가 눈을 부릅떴다.
“왜? 결혼은 하기 싫은가?”
“예? 아니, 그건 아니고?.”
“여인을 만나 가지고 놀기만 하고 책임지지는 않을 셈인가? 자네, 보기와 달리 쓰레기였군!”
“…….”
이미 수없이 책임지지 않는 교제를 했을 레너드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쪽은 놀랄 겁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자네 말대로 천사처럼, 푸흡,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면, 이미 짝이 있을지도 모르네. 청혼을 하고서 그쪽이 승낙을 하면 교제할 수 있겠지만 거절하면 이미 짝이 있다는 뜻이겠지. 청혼부터 하고 보게나.”
“…….”
“만약 약혼자가 없는 상황인데도 거절을 당한다면, 그래도 좋지. 청혼을 계기로 대화를 나눌 계기가 생길 테니까. 우선 자네의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는 게 우선이네.”
듣고 보니, 또 그럴듯한 말이었다.
처음 겪는 사랑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루크의 머리에 레너드의 말이 쏙쏙 박혔다. 레너드는 미친 사람처럼 말 중간중간 어깨를 떨며 웃었지만, 이미 반쯤 넘어간 루크에게는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레너드와의 상담이 끝날 즈음 루크의 머릿속에서는 청혼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인생은 속전속결. 루크는 그날 바로 랭커스터 가문의 막내,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에게 청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