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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9화 (9/150)

8화

그러나 태자를 향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루크가 아무리 건방져도 그는 스테이턴 공작이었고, 눈앞의 남자는 일단은 태자였다. 개인적인 충성은 바친 적이 없지만, 제국의 공작으로서 섬길 의무는 있는 대상이었다.

그런 태자의 탄생일이니 누군가에게는 제 부모의 생일보다 큰일일 수 있었다.

레너드는 이 상하관계를 이용해 루크를 종종 성가시게 했다.

조부가 죽은 후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루크는 영지 운영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는 수도의 중앙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중앙 정치에 놀아나며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도 스테이턴 공작이 가진 힘과 영지와 역할을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레너드는 그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루크가 수도로 돌아와 자신의 힘이 되어주길 여러 번 종용했다. 레너드가 우아하게 턱을 괴고서 물었다.

“대체 수도가 왜 싫으냐? 스테이턴 공작령이 부유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수도만은 못하지 않아.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아.”

“관심 없습니다.”

“심심하지도 않나. 이 젊은 나이에 시골에 처박혀서….”

“필요한 건 다 있습니다.”

“수도에 오기만 하면 내 섭섭지 않게 놀아주겠네.”

“놀고 싶지 않습니다.”

루크가 으득 이를 갈았다. 루크가 생각하는, 수도의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는 바로 레너드였다.

“딱딱하긴. 재미없군.”

“재미없으니 이제 부르지 마십쇼. 관심도 꺼주시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며 왜 자꾸 불러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핑계일 게 뻔한 이유를 들어 자꾸만 불러대는 데에 어울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자네, 결혼은 안 하나?”

“……이제는 제 부모 역할이라도 하려는 참입니까?”

“아니,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네. 나도 약혼녀가 있고, 곧 결혼하게 될 것 같거든.”

“…….”

“자네는 약혼녀조차 없잖아. 대귀족에게는 드문 일이지.”

그것은 루크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에게 맡겨졌기 때문이었다. 조부는 괴팍한 사람으로, 루크와 마찬가지로 수도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나뿐인 손자의 결혼에도 관심이 없었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십쇼.”

“내 약혼녀의 친구 중에 괜찮은 여인이 있어. 한 번….”

“제발, 신경, 꺼, 주십쇼.”

“거, 사람 성질은…. 그러지 말게. 진짜 곰 같아 무서우니. 어린 시절에는 나 못지않게 귀여운 꼬마였는데 왜 이리 험악해진 것인지.”

으득. 루크가 이를 갈았다. 레너드의 반질반질한 면상을 한 번이라도 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숙취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바쁜 중에 수도에 불려와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치솟는데 레너드가 신경을 살살 긁기까지 하니, 루크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루크가 말했다.

“이리 쓸데없이 불러대어 충정을 확인받지 않아도 스테이턴 공작은 황가에 거역하지 않습니다. 스테이턴 공작령은 제국의 영지이며, 언제라도 황제 폐하의 부름에 응할 겁니다.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스테이턴은 황가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

레너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잘생긴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루크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 꺼내어 뱉을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대는 태자였다.

루크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굳이 말로 꺼낼 일이 아닌 걸 지적해버리고 말았지만 그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못내 찝찝하다는 사실조차 화가 났다. 지금은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레너드가 마련한 수도 번화가의 저택을 나와버린 루크는 빈털털이였다. 부하를 부르자면 부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마냥 귀찮았다. 그는 채 가시지 않은 숙취에 허덕거리며 휘적휘적 걷다가 어느 공원 풀밭에 드러누워 버렸다.

우아하게 양산을 쓰고 산책을 하던 귀부인이 곰인지 사람인지 구분되지 않는 몰골의 루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가 신고를 하면, 신분을 밝히면 될 일이고……. 루크는 더 생각하기 귀찮았다. 잠시 누워 쉬다가 정신을 차리면, 배부터 채운 뒤 당장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제가 심기를 거스른 레너드의 기분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햇살이 따뜻했다.

꽃의 도시는 한창 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후가 따뜻한 편인데 계절까지 봄이니, 햇살도 공기도 낮잠 자기에 딱 적당했다. 루크는 하늘을 보고 드러누운 채 눈을 감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저기, 괜찮으세요…?”

“…….”

“혹시 어디 아프신 건….”

달콤한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루크는 눈을 번쩍 떴다.

“억!”

그러나 밝은 햇살이 따가워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제아무리 전신을 빈틈없이 단련한 전사라고 해도 안구를 단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빛이 남긴 잔상이 감은 눈 안쪽에 떠올랐다.

신음을 흘리며 눈가를 문지르는 그에게 다시금 상냥한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헉, 진짜 아프신가 봐. 언니, 어떻게 하지? 의사를 불러드려야 하지 않을까?”

“나디아, 제발 이리로 와!”

“어떻게 그래. 날이 따뜻해졌다고 해도 밖에서 자는 건 위험해. 도와드려야지….”

“제발! 위험한 건 너야!”

루크는 눈가를 덮은 채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건 여인과 달리 말리는 쪽은 그래도 제정신인 것 같았다.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공원 풀밭에 뒹굴고 있는 신원불명의 남자에게 다가오지 않으리라. 다행히 루크는 외관과 달리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운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언니, 의사를 불러드리자. 의식은 있으신 것 같은데 움직이질 않으셔….”

“나디아, 언니 말 좀 들어. 그 사람이 정신 차리기 전에 얼른 이리로 와….”

두 여인은 자매지간인 것 같았다. 루크는 당장 일어나 신분을 밝히기보다 이대로 누워 그들이 돌아가길 기다리기를 택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언니라는 사람이 이 여인을 데리고 가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세상 거칠 것 없는 루크라고 해도 피할 수 있는 망신은 피하고 싶었다.

“언니!”

머뭇거리던 목소리는 몰라보게 단호하게 떨어졌다.

“이 분이 날 해치려고 하셨으면 이미 난 죽었을 거야. 다 듣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하물며 아픈 사람인데!”

“넌…… 넌 진짜, 이렇게 착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한숨과 함께 말리던 쪽이 단념을 한 것 같았다. 자신에게 말을 건 쪽이 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던 루크는 의외의 결론에 조금 놀랐다.

“언니, 가서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 줘. 나는 그동안 이 분을 돌보고 있을게.”

“하지만… 너를 어떻게 혼자 두고?.”

“여긴 사람도 많고, 이 분은 위험하지 않다니까 그러네. 응? 얼른.”

가벼운 발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상황은 보이는 듯이 파악이 되었다. 언니라는 여인이 정말 의사를 부르러 갔고, 다른 여인은 그의 곁에 남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루크 혼자 누워있을 때에는 피하기 바빴던 사람들이, 여인이 곁에 서 있으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감싸고 누워있지만 루크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수도에는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없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적이 없었고, 어린 시절 알던 사람들은 지금의 모습을 모른다. 그러나 공원에 누워있다 신고를 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병사에게 끌려간 뒤 신분을 밝히면 조용히 끝날 일이니까.

그러나 이대로 여인이 의사를 부르고, 진짜 길거리의 부랑자마냥 진찰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차라리 루크가 진짜 환자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그저 숙취일 뿐이었다……. 의사도 당황할 것이고, 그 상황에서 신분을 밝히면, 스테이턴 공작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남아있던 숙취의 기운이 단숨에 가셨다. 여인은 루크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걸 발견했는지 그의 옆에 앉았다.

“이 땀 좀 봐……. 조금만 견뎌 주세요. 곧 언니가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올 거예요.”

“이 신사분을 부축하게 도와주실 분 없나요?”

“좀 도와주세요!”

호의가 선의를 불렀다.

이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도시에서 이 같은 친절을 만날 줄 몰랐다. 명백한 루크의 계산 착오였다. 졸지에 진짜 아픈 부랑자가 되어 의사의 진찰을 받게 생긴 루크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깃털 같은 손길이 그의 뺨에 닿았다.

톡, 톡.

부드러운 손수건이 뺨을 두드려 땀을 닦아 주었다. 루크는 얼굴을 가린 채 그 손길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괘, 괜찮소.”

“하지만 땀이 너무 많이 나요. 탈수가 올지도 몰라요.”

그건 그저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루크가 소맷부리로 땀을 닦자 여인이 말했다.

루크는 살짝 팔을 내리고 여인의 얼굴을 훔쳐봤다. 빛에 익숙해진 눈에 어렴풋한 상이 잡혔다.

여인의 머리 뒤로 후광 같은 빛이 흘렀다. 천사처럼 빛나는 금발, 생크림같이 하얀 피부, 그리고 염려를 담아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루크는 숨을 삼켰다. 여인은 그 어떤 명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천사의 현신 같았다.

“이 손수건을 쓰세요.”

루크는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수건을 받았다. 여인은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여겼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를 데리러 간 그녀의 언니가 언제 오는지 살피는 모양이었다. 루크는 깨달았다.

‘도망치려면 지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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